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부자 그리스도인

기웅서 |2009.07.13 00:04
조회 71 |추천 2

부자 그리스도인

 

한 부자 관원이 예수께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수께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을 지켜라"

 

라고 말씀하셨다. 부자 관원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 쯤이야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다시 한 말씀 하셨다.

 

"그러면 네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 후에 나를 따르라."

 

부자 관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부와 명성으로써 뭇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던 자였다.

그러한 그에게 부를 버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절반도 아닌 전부 다를 팔아서 나눠주라니.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받을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부자의 머릿속에서 번뇌가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예수의 행적을 보아하니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같은데 말야.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잖아.

영생을 주지 못할 것도 없잖아. 그런데 내 소유를 다 팔라니. 

도대체 왜 그러라는 거야! 나는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어.

그건 자타가 공인할만한 거야.

그거면 됐지 소유를 팔라는 건 또 뭐야?

안돼! 재물을 빼앗기고 영생을 얻어봤자 뭐해!

당장 내 부와 명예가 사라지면 어쩌란 말야.

게다가 나는 당장 뭐를 먹고 살라고?'

 

부자는 근심하다가 돌아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하여 던지는 예수의 한 마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 등장하는 부자처럼 문자적 의미에서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의도였을까.

얼핏 보기엔 그렇지만 필자는 부자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그의 소유가 얼마가

되며 그의 직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높은지를 묻지 않으셨다.

그가 물은 것은 

 

"네가 계명을 잘 지켰느냐?"

 

였다. 예수는 애초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무형(無形)의 부(富)'를 꿰뚫어보셨던 것이다.

즉 그의 안에 자리잡고 있던 율법주의에 의한 자기 확신을

먼저 꿰보려 하셨던 것이다. 

역시나 그는 율법의 요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완전함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뿌듯하고 풍요로웠다.

그가 가진 돈이나 명예만큼,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신의 모습은 

또 다른 부(富)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것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네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라."

 

이 한 마디에 그가 가지고 있던 유형의 부,

무형의 부는 사라져버렸다.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는 자부심은 

가진 재물을 포기하라는 말씀에 산산조각난 것이다.

그럼 무엇으로 영생을 얻는단 말인가?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를 따르라"

 

예수는 배와 그물과, 직업과 부모와 자녀를 모두 버린

열 두 제자처럼 부자 관원도 그리할 것을 명하셨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길 자체가 이미 영생을 얻는 길이며, 

그 길이 곧 목적임을 암암리에 드러내셨다.

즉 예수를 따르는 궁극의 목표는 영생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것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부자 관원은 영생만을 원했다.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기쁨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따르기 원했다. 

게다가 그는 율법의 행위로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그에게

그 부러움의 조건을 버리는 것은 무모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예수를 따르게 되면 첨가되는

'덤'같은 것으로 비하할 순 없다. 절대로.

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를테면 믿음이란 것이 '공식' 비슷한 것으로 전락한다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려 했던 것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 믿음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단순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게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기쁨을 맛보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기쁨과 권세의 극치가 영생이다.

그 극치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것이 아니다.

부와 명예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그보다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을 탐닉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둘을 가지면 셋을 가지려는 게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들에게 예수는

그저 영생만 던져주면 되는 값 싼 존재다. 

때문에 예수 이름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복음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자 관원처럼 영생지상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예수 따르는 기쁨을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를 믿는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이 땅에서 잘 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앞서는가.

스스로를 날마다 돌아보지 않는다면

자신의 모습에 자아도취된 부자 관원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예수 믿는 기쁨은 온데 간데 없고

잘나고 잘난 인간 하나가 그 자리를

떡하니 꿰차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자가 되려 하는 자마다, 성공하려 하는 자마다 

먼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자기에 대하여서는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부요치 못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떠오른다.

곡식이 차고 넘쳐 보관할 창고가 없어

더 큰 창고를 지어야겠다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부자에게

 

"오늘 밤 네 영혼을 찾아간다면 그 곡식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예수. 예수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신다.

그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자기사랑, 자기자랑을 아신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죄와 욕망 또한 잘 아신다.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말씀하신다.

 

다만, 귀 있는 자만이 그 하시는 말씀을 들을진저.

 

추천수2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