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죠? 제가 이런 글 올리면 길이가 상당하다는 거?
이 음악영화를 다시 본다
카핑 베토벤 Copying Beethoven 2005
영화정보 -----------------------------------------------------------------------------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Agnieszka Holland
주연 에드 해리스 Ed Harris ...베토벤 역
다이앤 크루거 Diane Kruger ...안나 홀츠 역
조 앤더슨 Joe Anderson ...칼 베토벤 역
매튜 구드 Matthew Goode ...마틴 바우어 역
각본 스티븐 J. 리벨 Stephen J. Rivele 크리스토퍼 윌킨슨 Christopher Wilkinson
촬영 애쉴리 로우 Ashley Rowe
기획안드레아스 그로쉬 Andreas Grosch 안드레아스 쉬미드 Andreas Schmid 외
제작 크리스토퍼 윌킨슨 Christopher Wilkinson 마이클 테일러 Michael Taylor
시드니 킴멜 Sidney Kimmel 스티븐 J. 리벨 Stephen J. Rivele
미술 캐롤린 아메스 Caroline Amies
의상 제니 테미 Jany Temime
편집 알렉스 매키 Alex Mackie
음악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안토니 라자르키에비치 Anthoni Lazarkiewicz(부가음악 및 안나의 테마)
DVD 정보
화면비 2.3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오디오 DTS 5.1
더빙 영어 자막 한국어, 영어
시간 : 103분
부록: 에드 해리스와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 코멘터리, 오케스트라 메이킹 필름, 삭제장면, 에드 해리스 인터뷰, 다이앤 크루거 인터뷰, TV 스팟, 트레일러, 숙명여대 시사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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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와 사보가, 없어서는 안 될 특이한 직업이 영화로 살아나다
이 영화는 제목과 일치하게 베토벤의 악보를 베끼는 ‘안나 홀츠’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거장 베토벤의 말년을 새롭게 조명한다.
1824년 5월 제9번 교향곡 초연 당시, 그가 우뢰처럼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자 합창단 알토파트 자리에서 걸어 나온 한 여성이 베토벤을 관객들을 향해 돌려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시작된 가상인물이 바로 안나 홀츠고 홀란드 감독은 카피스트라는 설정을 통해 베토벤과 깊은 유대를 나누는 캐릭터로 발전시켰다. 사실이 아니라 팩션(fact+fiction,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펼친 허구의 이야기)이란 말이다.
1820년대 음악의 도시 빈, 음악으로 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과는 달리 청각을 잃어가면서 자괴감에 빠져 성격은 날로 괴팍해지고 고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50대 후반의 악성 베토벤은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의 초연을 앞두고 자신이 그린 악보를 연주용으로 사보(寫譜)하기 위한 유능한 카피스트를 찾던 중이다. 작곡가의 꿈을 안고 시골에서 올라온 음악원 우등 졸업생인 안나 홀츠는 악보 인쇄업자로부터 우연히 베토벤의 카피스트가 되기를 제안받는다. 베토벤이 매우 성질 사납고 괴팍한 심술쟁이인데다가 특히 요즘 들어 심기가 더욱 꼬여있으니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는 사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노인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b단조가 아니라 B장조란 말이야! 알아들어?”
피아노의 건반을 부서져라 두들기면서 조성을 확인시켜 주고는 악보인지 휴지 쪼가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종잇장을 던져버리고선 휭 하니 사라진다. ‘아니 그럼 저 노인네가 말로만 듣던 베토벤?’ 얼떨결에 일을 떠맡고 열심히 악보를 옮겨 적으면서 한편으로 피아노를 직접 쳐가며 여러 번 고쳐 쓰고 확인한 안나는 이윽고 완성된 초고를 들고.. 베토벤의 집으로 간다.
침침한 방 피아노 앞에 상체는 누드인 채 머리를 산발한 노인네가 엎드려서 피아노를 있는 힘껏 두드리면서 입으로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한편으로 악보를 휘갈기는데, 어깨에 받침대를 대고 그 위로 머리 위까지 금속관으로 만든 거대한 보청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조심스럽게 온 목적을 설명하는 안나와 일상 대화는 그런대로 가능한 걸 보니 아직 완전 귀머거리는 아닌 듯 하기도 하고, 입모양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수정해서 가져온 초고를 받아든 베토벤은 피아노로 쳐보며 악보를 검증하는데...
“뭐야.. B 장조로 고치랬더니, B 단조 그대로잖아?”
“제가 생각하는 베토벤은 그런 식으로 작곡할 것 같지 않은데요.”
베토벤의 음악 성향을 거론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교향곡의 피날레는 바로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감히(?) 베토벤을 설득하는 안나.
“뭐야..? 여자가 작곡을 해..? 작곡하는 여자를 조물주가 창조했다고...?
한껏 안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남성우월주의자의 전형을 드러내는 베토벤. 말은 그리하면서도 열심히 피아노로 악보를 검증한다.
“….으음..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맘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거지? ...좋아, 나하고 함께 일해 보지. 밥 먹고 올 테니까 저것 좀 사보해 놔..”
휭 하니 베토벤이 사라져버리자 일단 안도하며 악보 앞에 다가 앉는 안나였다. 9번 교향곡의 초연 당일. 안나는 애인인 젊은 건축가와 일찌감치 객석에 자리잡는다. 그런데 급히 그녀를 찾는 인쇄업자.
“큰일 났어! 마에스트로가 지휘를 못하겠대.”
“염려마세요.. 제게 생각이 있어요..”
안나가 오케스트라 피트의 연주자들 틈에 객석에서 잘 안보이도록 위치를 잡아 바닥에 악보를 놓고 실제로 지휘를 하고 베토벤은 이를 보고 따라가며 지휘하자는 아이디어다. 자신의 음악을 읽어내는 안나를 믿을 수 있기에 의욕을 되찾은 베토벤. 숨막히는 70여 분간의 연주가 끝나고 압도적인 음악 앞에 청중들은 베토벤의 괴팍함은 잊어버린 채 감동의 갈채를 보낸다. 절체절명의 위기는 대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신의 소리를 연주하는 천재 베토벤의 음악을 가슴 깊이 이해하는 안나와 조금씩 마음을 문을 열게 되면서 이제 둘 사이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음악적 교감뿐만 아니라, 사랑 그 이상의 영혼을 교감해 나간다. 많은 나이 차이와 음악적 경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음악 동지가 된다. 그것도 남과 여라는 드높은 장벽이 있었음에도. 더구나 안나는 사랑하는 애인과의 관계까지도 저버릴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스승인 베토벤과 함께 한다.
조카 칼의 자살기도로 더욱 힘들어진 베토벤은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신의 음악인 현악4중주의 작곡에 몰두하고 안나는 끝까지 모두가 외면한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지키며 세상과 화해하게 한다. 결국 낭만음악의 시대를 여는 선구적인 음악인 베토벤 최후의 작품들은 안나의 손에 의해 악보가 만들어져 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최근에 라고 하는 클래식음악에만 있는 특이한 직업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도 있었는데, 이 도 생소한 ‘사보가’(寫譜家)를 내세워 소재로 삼았다. 카피스트(copyist, 사보가)는 요즘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악보를 쉽게 그리기 이전의 시절, 작곡가가 손으로 쓴 초벌 악보를 여러 벌의 연주용 악보로 깨끗이 옮겨 그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문학작품의 교열을 보는 편집자가 그러하듯, 카피스트 역시 작곡의 기본은 물론 작곡가의 의도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가 교향곡처럼 길고 복잡한 구성의 작품을 연주하는 경우, 악기 연주자들은 연주하는 도중에 계속하여 악보를 여러 장 넘겨야 하는 어려움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작곡자와 지휘자만 모든 악기의 악보가 들어있는 두꺼운 총보(總譜, full score)를 보고 연주자들은 자기 악기만 표시되어 잇는 훨씬 적은 페이지의 악보를 본다. 그래서 카피스트는 지휘자를 위한 총보, 각 악기를 위한 파트악보, 출판업자를 위한 모음악보를 골고루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예전에는 악기마다 기본음이 다른 가온보표를 사용했기 때문에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면 악보를 볼 수도 그릴 수도 없었고, 한번 잘못하여 틀리게 기록하는 경우 교정하기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괴로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악보 인쇄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가 그 일을 대신 하기 이전까지 명석한 사보가는 작곡가에게 거의 필수적인 조건에 가까웠다. 아마 음악의 중심이 작곡가에서 연주가와 지휘자로 넘어간 시대의 변화에는 청사진 등 복사(photocopy)의 출현과 악보 출판의 용이함이 작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 에서도 죽어가는 모차르트 옆에서 살리에리가 의 악보를 받아쓰는 명장면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멜로디를 불러주면 작곡법인 대위법상의 대선율을 미리 짐작하여 이렇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살리에리, 숨을 거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자각한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손이 채 악보를 그리기도 전에 입으로 계속 멜로디를 불러나가고, 살리에리가 그것을 따라 부르면서 또 악보에 적고...그 장면 역시 ‘팩션’이었다.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카피스트는 저 위대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바흐의 전기로부터 역시 작곡가였던 큰 형의 악보를 달빛 아래 베끼면서 작곡기법을 배웠다는 일화를 알고 있다. 오늘날에도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들은 화성학 수업시간에 바흐의 코랄을 그대로 베껴오라는(!) 숙제를 내주곤 한다. 사보하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된다는 것인데 이 역시 바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역사적인 공부방법인가 싶다.
@ 명대사 명장면, 음악이 철학과 만나 종교를 묻다
“안녕하세요, 부인”
“훌륭해, 안 그래? 이 고요함...그는 하루 종일 밖에 있어. 동이 트기도 전부터 숲속을 거닐면서...갈렌베르크에 있는 숲 말야. 내 방엔 창문이 없어. 이럴 때만 이 문을 열어놓을 수가 있지!”
“끔찍하겠어요. 종일 문을 닫고 계시면요.”
“이런 순간을 바라며 살아. 이런 평화로운 시간을...”
“실례지만, 왜 이사를 안 하시죠?”
“이사? 베토벤의 바로 옆집이야. 누구보다 그의 작품을 먼저 듣지, 초연도 되기 전에. 모든 빈 사람들이 다 날 부러워해. 7번 교향곡 때부터 여기 살았어. 멋진 곡이야. 새 교향곡이 거의 다 됐지?”
“잘 되고 있어요, 감사해요.”
“계속 잘 하시게 해.”
영화 속에서도 실제로도 성질 사나운 베토벤은 찬물을 뒤집어쓴 뒤에 작곡을 했다. 아래층으로 찬물이 흘러내리니 아래층 주민은 천장을 두드리고 욕하곤 했다. 옆집에 살고 있던 노파 역시 창이 작아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집에 살면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문을 닫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노파의 마지막 말이 감동이다. 곡을 발표하기도 전에 세상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위대한 음악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
한편 영화 에서는 '신'에 대한 대사가 아주 많이 나온다. 역시 그렇다. 음악의 창조가 신의 영역에 있는 소리를 훔쳐와 인간에게 주는 것이라면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무엇이 다르랴. ‘고독이 내 종교야’라고 외치지만 베토벤은 신에 대한 애증을 가진 인물이다. 신이 자신에게 고함을 치는 바람에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베토벤은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스스로를 미움 받는 자식이라 여긴다. 베토벤의 음악은 살아 생전에도 음악가들의 교본이라고 불릴 만큼 인정받았지만 나폴레옹 전쟁 후 그의 후원자들은 이전처럼 해주기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베토벤의 말년은 빈한해졌다. 세상은 그를 향해 파문당한 이단아이며 짐승이라 불렀고 귀족에 붙어사는 꼰대위선자에 거칠고 무례한 노인네라며 비웃었다.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적인 고통의 징벌이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각을 잃어버린 베토벤은 세상의 쓴소리는 듣지 못하는 채 음악으로 신의 언어를 표현해내는 일에만 열중했다. 베토벤에게 신은 원망의 대상인 동시에 끊임없는 추구의 대상이기도 했다.
“신과 나는 동굴 속에서 으르렁대는 두 마리 곰이지. 잘 때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자는.”
“신은 보통 사람들의 귀엔 속삭이지만, 내 귀엔 고함을 치며 말하지. 그래서 귀가 먼 거라구.”
그런데 자신만 빼고 모두 자신이 만든 신의 음악을 듣는다니! 그는 묻는다. "이게 신의 사랑인가?"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초연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여 도우소서."
9번 교향곡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영화는 베토벤의 최후를 따라가며 안나의 눈을 통해 신과 베토벤 사이의 애증관계를 그려낸다.
“당신의 음악은 참으로 외로운 종교 같군요.”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게 말을 붙이는 신의 숨결이야. 음악은 신의 언어야. 우리 음악가들은 인간들 중에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우린 신의 목소리를 들어. 신의 입술을 읽고, 우린 신의 자식들이 태어나게 하지. 신을 찬양하는 자식들, 그게 음악가야, 안나 홀츠. 그렇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신의 세계를 이 세상이 알게 하는 일이라?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베토벤은 스스로를 음악을 통해 세상에 신을 계시하는 성직자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신의 언어이며, 음악가는 바로 그러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라는 표현. 그래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영혼에 들려주는 음악가의 존재는 곧 신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된다. 문학, 미술, 무용, 건축 등 예술을 구현해내는 예술가들 모두 베토벤의 관점에 의하면 신과 인간 간의 교량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가상의 인물 마틴 바우어를 통해 ‘다리’에 대한 철학을 내비친다.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를 만들어나가는 예술가들이 날이 갈수록 영혼이 결여된 채 기교에만 의존해가는 현실을 비판하고자, 베토벤의 손을 빌어 안나의 연인인 마틴의 다리 설계 모형을 혹평과 더불어 부수어 버린다. 신의 언어와 인간의 영혼을 연결 짓는 것으로 예술이라는 다리가 제 역할을 다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시공을 초월한 전우주적 신의 세계로 인간을 이끌어가야 하는 정신적 촉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요구받는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이자, 이 현재로부터 다가올 미래를 이어주기도 하는 다리로서 한 차원 높은 예술의 세계로 승화되어야 한다. 에서 이 상징은 후기 현악4중주다. 극중 베토벤이 최후의 열정을 담아 작곡하고 있는 현악 4중주 대푸가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당장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보다 미래에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음악. 이야말로 진정 다리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는 음악가인 것이다. 안나에게 최후로 구술하고 있는 현악 4중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베토벤은 이와 같은 이념 아래 신과의 일체감을 이룬다. 음악에 의한 승천, 그리고 신적 존재와의 일체화... 이것이 곧 그의 음악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있는 참 자유의 신적인 경지다.
철학자 니체는 라는 혁명적인 저서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철학은 100년이 지난 뒤에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까지 유럽인들이 믿어오던 맹목적인 신을 죽이고, 존재론적 상황에서 다시 신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실존적 조우를 제시했다. 그는 이단자인 동시에 예언자가 되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는 음악에서 고전의 시대와 낭만의 시대 사이에서 기존의 작곡법에 있어 마치 니체와 같은 역할을 해냈다. 영화 중에서, 사람들은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에 열광하였지만,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듣고는 등을 돌린다. 신으로부터 직접 음악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소리에 귀가 멀고 만 베토벤의 후기 음악을, 동시대인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베토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신이 내 머리 속을 음악으로 가득 채워놓고서는 나를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 머리 속에서는 항상 천상의 음악이 흐르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어.”
그는 자신이 음악을 작곡하거나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단지 악보에 기입하기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예술적 창조행위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나’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내’가 음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나’를 통해서 흘러나올 뿐이다. 클래식음악의 엄숙주의자들은 이런 표현을 통해 음악을 절대화시키고, ‘절대음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어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이며 완결적 행위가 되는 음악. 아마 우리가 오늘날 ‘딴따라’라고 부르는 실용음악 또는 대중음악이 싸구려 취급을 받는 이유가 신의 이름을 덧씌운 절대음악과의 대비를 통해서 나왔을 것으로 믿어진다.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술철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현상계로 현현시키게 하는 하나의 ‘통로’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예술작품이 개성이 없는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신은 스스로의 완벽성을 위해 여러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여러 측면을 계시함으로써 그들이 생산하는 작품의 다양성을 통해 스스로 창조행위를 즐긴다.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신의 계시로서 완결된 작품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자아낸다.
현대에 와서 현상학과 심리학이 학문의 큰 흐름이 되고, 이들 학문을 통해 다른 학문들이 재조명되면서 관념론적인 절대음악의 신화는 무너져갔다. 21세기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개인주의적인 차원으로 수렴되며 우주적인 예술을 거론하는 거대담론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영화 속에서 시골 음악원의 작곡과 우등생이었던 안나는 위대한 베토벤에게 자신이 쓴 곡을 평가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막상 돌아온 평은 가혹하다.
“나를 카피하고 있군. 제 2의 베토벤은 필요 없어. 구조에 얽매여선 안돼.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
치욕감을 느끼고 베토벤의 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외침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음악은 고정되어 있는 다리가 아니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야!”
베토벤에게 구조는 그저 음악의 재료에 불과했고, 내면의 소리는 음악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내용을 위해 형식은 희생이나 복종을 받아들여야 했다. 실제로 음악적 흐름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 작품들과 피아노 소나타들은 2악장과 3악장 사이의 휴지가 없이 바로 이어서 연주되도록 지시한 경우가 많다. 피아노 협주곡 “황제”에서도 2악장과 3악장은 마치 악장 구분이 없는 것처럼 바로 이어진다.
음악 자체에 깃들어있는 내면적 흐름에 따라 형식도 변하고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듣는 사람의 내면에서 부활하여 생동하는 소리. 듣는 사람마다 같을 수도 없고, 개성에 따른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베토벤은 정신적으로도 이미 낭만주의와 질풍노도의 시대를 선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배운 대로’는 최상급이지만 ‘나름대로’는 하위급인 한국 음악도들을 보면 베토벤의 이 질책은 ‘학원공부’, ‘과외학습’에 길들여진 한국식교육이 초기에는 효과적이지만 나중에는 결국 벽에 부딪치는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음악가들이 해외유학 가서 이렇게 만들어진 벽을 허물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재정립하는 일은 죽음과 부활의 힘든 과정이라고 한다. 제2의 베토벤은 필요 없다는 대사는 그래서인지 한국의 음악교육에 던지는 쓴소리처럼 들린다.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 모든 이에게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듣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음악의 사제 베토벤...하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신과 화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폭풍소리가 들려. 날 데리러 오는군...아침이야.“
그의 인생은 이 짧은 대사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아침처럼 고요하게 마쳐졌다.
@ 천재를 연주한 비밀의 여인, 신은 베토벤의 귀를 멀게 했고 대신 그녀를 선물했다!
이 소제목은 이 영화의 홍보자료에 쓰였던 메인 홍보문구다. 과연 그랬을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말년의 베토벤은 청각을 잃고 괴팍해졌으며, 고독과 궁핍을 견디며 10년 만에 다시 내놓는 9번째 교향곡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베토벤은 이미 1800년에 들어가면서 청각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해 1802년 유명한 하일리겐쉬타트의 유서를 쓴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1824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베토벤은 그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안나가 베토벤의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베토벤은 웃옷을 벗은 상태로 보청기 또는 집음기(集音器) 역할을 하는 괴상한 형태의 금속관을 머리에 쓰고 피아노에도 설치한 상태로 안나를 맞는다. 영화는 그와 같은 마지막 상태에 상상력을 가해 여성 카피스트를 그려넣는다. 영화는 여성감독의 작품답게 주인공 안나가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카피스트로 일하는 것조차 수많은 성희롱과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곤경을 잘 담아내어 페미니스트적 느낌을 담아낸다. 또한 그녀를 섣불리 베토벤의 연인으로 규정하지도 않고 음악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예술적 교감을 중심으로 음악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는데, 이 또한 영화의 미덕이라 할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사는 감독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듯 하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라도 해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안나 홀츠, 넌 나를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거잖아. 지금 나를 떠날 순 있어도 영원히 내게서 자유롭지는 못할 거야.”
베토벤의 음악적 삶을 영상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데 있어 역시 이 영화와 같이 ‘여성’을 그 길잡이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그의 삶에 끼치고 있는 영향은 상반된 그림으로 그려진다. 한순간의 어긋남이 크나큰 오해와 거의 평생에 걸친 증오와 미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 영원한 사랑을 절절하리만치 맹세했던 만큼, 이에 따른 배신감도 그만큼 깊었을 것이다. 반면, 의 작곡가 지망생 안나 홀츠는 베토벤의 말년에 잠시나마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주는 존재다. 처음 악보를 필사하는 순간, 그보다도 더욱 베토벤 음악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안나 홀츠. 순간, 베토벤은 모차르트와도 같은 몽상에 빠진다. 자신에게 진혼곡을 주문한 미지의 사나이를 죽음의 사자로 여긴 모차르트처럼, 자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알리고자 신이 안배한 사자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자신의 머리를 음악으로 가득 채운 신, 그러나 자신의 귀를 멀게 해버린 가혹한 신, 그러나 안나를 보내 그의 음악을 그려내며 교감을 나누게 함으로써 그를 위로하는 신...베토벤은 안나를 ‘신의 비서’라고 부르며 그가 무시해 마지않던 여인을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며 인정한다.
하지만, 안나는 베토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신의 하녀’가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본래 갈망했던 것은 또 하나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로서의 자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은 안나에게 이상적 스승이기도 했다. 그래서 홀로 자신만의 음악 작업에 몰두해 있는 그녀 곁에 스치듯 보이는 달걀 껍데기는 그녀가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감독의 트릭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깨끗한 사과 하나는, 아직은 음악적 미지의 영역에 미처 들어서지 못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고도 하겠다. 더구나, 공동 작업을 거듭할수록 베토벤의 음악에 종속되어져가는 안나다. 그래서 제2의 베토벤이 되려고 자신의 음악을 카피하지 말라고 베토벤에게 혼난다. 개인적 욕망과 신이 부여한 역할이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주어진 안나의 역할은 ‘청출어람 청어람’ 보다는 신의 대리인 베토벤이 이 지상에서 신이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의 고통을 위로하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지. 그렇지 않아. 내 머릿속은 소리로 가득 차 있어. 멈추는 일이 없지.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그리곤 어떻게 됐나? 나를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게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어. 내 곡들을 듣는 즐거움을. 그게 신의 사랑인가? 친구가 할 짓이냔 말야!" - 제9번 교향곡 초연 직전 대기실에서 베토벤이 안나에게
때로 감정이 격앙될 정도로 솔직하게 오가는 그녀와의 대화 및 미묘한 긴장 속에서 함께 이루어가는 음악 작업을 통해 베토벤은 깨달아간다. 안나는 그의 음악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고자 신이 내려 보낸 음악의 사자임을...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녀가 그를 이끌어가기조차 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서로의 손끝이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양, 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의 손짓이 움직인다. 이 영화 속에서 그리는 초연 장면, 안나의 그림자 지휘를 따라 베토벤이 교향곡을 지휘하는 시간만큼은 그가 그녀의 지휘를 받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이끌림이 아니다. 먼저 악보로 형상화된 ‘환희’는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별개가 아니다. 탄생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역사적인 초연의 현장에서 음악이 이루어내는 영혼의 교감과 그에 따른 절정은 그들이 그 순간 구현해내는 곡의 핵심이기도 한 ‘환희’와 이어진 것이다. 신은 베토벤에게 청각을 빼앗아갔지만 그가 쓴 곡의 환희를 안나를 통해 체감하게 했던 것이다. 신은 베토벤의 친구였다.
"안나 홀츠, 자네가 내게 어떤 의미인줄 아나? 난 지난 몇 년간 두려움 속에 살았어. 외롭고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말야. 그런데 신이 자네를 보냈지. 내 메모를 악절을 통해 자네에게 풀어놓았어. 자네는 내 해방의 열쇠였어." - 제9번 교향곡 초연을 마치고 끝까지 자신에게 남아있는 안나에게
베토벤이 신과 사람들 사이에서 음악이라는 언어로 그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듯, 여기서의 안나 역시 베토벤과 신과의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이어주는 일종의 또 다른 다리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에서는 제9번 교향곡을 ‘자유’라는 상징 아래 수렴시킨다. 주정뱅이 아버지의 구타를 피해 숨은 한밤중의 숲속 연못, 그 위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어린 베토벤이 느꼈던 그 해방감과 자유는 마침내 반세기 가까운 시공을 넘어 제9번 교향곡으로 인류에게 돌아왔다. 신은 에서 신의 소리를 사람들이 내면의 영혼으로 받아들여 각자의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생동하고 작용하게 하기 위한 그 거대한 작업에 안나를 정신적인 쉼터이며 창조작업의 협조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여 베토벤에게 보낸 것이었다.
자부심 대단한 베토벤이 스스로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그토록 그녀를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과의 직접 소통이 힘들어진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신과 간접적으로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리’로서의 존재. 게다가, 그러한 소통에 의해 새로이 이루어가는 음악은 베토벤 자신의 진정한 자유로도 이어지고 있기에, 안나는 베토벤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해방의 열쇠가 되고 있다. 애초 그녀에게 내려진 재능의 의미는 사실 이것이 아니었을까? 정작 당사자는 신의 대리인인 줄도 모르고선 행한 사자로서의 역할... 베토벤의 요청으로 그의 몸에 세례라도 베풀 듯 세심히 씻겨주고 있는 안나의 모습은 관람자로 하여금 느끼라는 감독의 암시가 숨어있는 그림이다.
@ 불멸의 연인 속편? 개리 올드만 VS 에드 해리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영화적 재미는 덜하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중간의 9번 교향곡 장면이 무려 25분 가까이 계속 되는데다 그 이후 안나의 애인에 관련된 에피소드나 현악 4중주 이야기에서는 현저히 긴장감이 떨어지는 나레이션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결론을 내려버리는 도 불만스럽지만 이 영화 역시 클라이맥스가 중간에 배치되고 이후 맥빠진 느낌이라는 데서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이 역시 종료 10분전 거나한 액션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식 영화문법에 익숙해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미덕은 제법 괜찮다. 18세기 빈의 풍경이 충실하게 재연되었다는 것이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빈이라는 도시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냐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예술가의 중심지 뉴욕처럼 18C의 비엔나는 음악가를 위해서, 음악가를 의해 존재했다고 과하지 않을 만큼 음악과 예술이 숨쉬는 도시였다. 실제 영화 촬영 장소이기도 했던 비엔나는 아직까지 베토벤이 머물러 음악 작업을 했던 공간이나, 당시 시대를 대변하는 네오바로크 스타일의 건물들이 즐비해있으며 이백여 년이 지난 문화와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어 마치 그 시대에는 전위적이고 광기의 작곡가였지만 후세에 최고의 칭송을 받는 ‘베토벤’ 모습의 양면성을 띄고 있는 듯하다. 로마시대의 식민지였던 소포론에서 아름다운 첨탑들과 12세기에 건축된 교회와 유대 회당으로 이어지는 포석 도로로 가득한 비엔나를 안나 홀츠가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제9번 교향곡 초연 장면에서는 시대 악기를 대여해서 실제로 연주했으며 화면에 비쳐지는 수 백 벌의 악보는 모두 당시 방식에 의해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시리즈, 등 의상을 담당했던 유명 의상 감독 지미 테미는 100벌의 이브닝 드레스를 포함하여 모든 의상과 직물들을 런던에서 직접 제작, 공수해왔다.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배우와 스탭들은 “촬영 기간동안 18세기 빈에 머무는 듯했다”고 증언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정확히 60개의 원두를 이용해 그만의 커피를 정해진 시간에 만들어 마셨으며,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였고, 밤 9시가 되면 괴테나 쉴러를 읽으며 잠자리에 들었다는 베토벤. 그의 광기와 편집증적인 성격을 만들기 위해서 전문적인 고증이 필요했다. 베토벤의 성격을 대변하듯이 더러운 접시들과 여기저기 뿌려진 종이들, 악기들과 두 대의 피아노, 그리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물건들로 어지럽힌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된 아파트는 그런 충분한 고증을 통해 재현되었다.
, , 등으로 제법 알려진 거장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클래식 애호가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토벤의 음악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섬세한 연출을 선보인다. 1995년에 개봉한 과 12년의 시차를 두고 이 뒤를 잇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의 죽음으로 끝나는 에 이어, 베토벤이 죽은 뒤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기에 훨씬 앞서 개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속편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 더 정확한 용어를 쓰자면 은 의 프리퀄(Prequel)에 해당된다. 영화나 소설, 만화 등에서.. 원래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또는 원래의 이야기가 있었던 시점보다 이후를 다룬 속편은 시퀄Sequel이라고 한다. 반대로 원래의 이야기에 앞서는 내용을 다룬 속편이 프리퀄이다. 3부작 이후 새로 만들어진 3부작이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인 다스 베이더의 이야기를 그린 것, 007 시리즈에서 21번째 이 제임스 본드가 왜 사랑에 대해 시니컬한가를 보여준 것이 프리퀄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두 편의 영화에서 중심인물을 이루는 베토벤 말고도 조카인 칼에 대한 이야기가 동일한 선상에서 등장하고 있다. 음악적 동지였던 안나가 죽음에 이른 베토벤 곁을 끝까지 지켜주고 있는 과는 달리 에서는 쓸쓸하게 베토벤이 숨을 거둔다. 그러나 같은 작가가 만든 일관된 스토리가 아니니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두 영화의 베토벤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안나 홀츠라는 캐릭터보다도 주연배우 에드 해리스의 완벽한 변신이다. 에드 해리스는 , , 에 이어 또 한 번 예술가로 등장한다. 의 해병사령관 인상이 너무 강하다고? 이 영화를 보고나면 그런 생각을 접게 된다.
에드 해리스는 캐스팅되고 나서 1년간 미국의 유명 음대 교수에게 직접 피아노와 지휘를 배우는 열의를 보였다. 심지어 9번 교향곡 초연 장면 촬영 당시 50번이 넘는 테이크에도 불구하고 그는 흐트러짐이 없이 광기의 투혼을 펼쳤다.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이 컷을 외쳤지만 에드 해리스에게 몰입된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고 곡 전체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당시 촬영장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이들조차 감동의 박수를 보냈고, 관객석에 앉아있던 극 중 마틴 역의 매튜 구드는 연기와 음악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의 제작자이자 각본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윌킨슨은 “지금 내 눈 앞엔 베토벤이 서있다. 도대체 ‘에드 해리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1년여 시간에 집중력을 발휘해 공부한 그의 지휘는 50번이 넘는 테이크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이 없이 투혼을 펼쳤다. 18세기 비운의 천재였던 ‘베토벤’이 ‘에드 해리스’를 통해 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주연배우 에드 해리스와 개리 올드만의 연기를 보자. 개리 올드만의 편집증으로 가득 찬 베토벤에 비해 에드 해리스의 베토벤은 여유가 있고, 유머도 있다. 널리 알려진 오선노트 표지에 그려진 이미지로 보아도 에드 해리스 쪽이 더 가까운 느낌이다. 청각장애와도 이미 사반세기의 세월을 함께 해서인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생활에 달관한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이 되었다. 괴팍함 자체는 그대로이지만 무언가에 집착해서 자신의 인생을 다 몰아넣어 버리는 ‘올인’은 에서는 강도가 덜한 편이다. 피아노 연주에 들인 노력만으로는 올드만 쪽이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데 제9번 교향곡에서 보여주는 지휘 솜씨는 해리스 역시 강마에를 울릴 만큼 노련하다. 물론 드라마에 비하면 훨씬 공을 들인 훌륭한 편집이 뒤를 받치고 있긴 하지만.
에드 해리스의 연기에 비해 안나 홀츠 역의 다이안 크루거는 아쉬운 편이다. 물론 시골에서 음악원을 갓 졸업하고 올라온 촌뜨기라는 캐릭터상 이해되는 부분 없지 않으나 해리스의 열연에 비하면 언밸런스다. 다이안 크루거는 원래 런던 로얄 발레 아카데미를 다녔던 발레리나 지망생이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무용의 꿈을 접고 모델의 길을 선택한 배우다. 엘리트모델 대회에 입상하고 파리 패션계로 진출하여 크리스찬 디오르, 입 생 로랑, 아르마니 등의 패션쇼에서 런웨이에 출연했고 유명 패션잡지 엘르 표지모델로도 진출하여 잘 나가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2001년 란 영화의 단역으로 데뷔했다. 아마 한국 팬들의 기억에는 2004년 의 헬레네 역으로 인식되엇을 것 같다. 영화를 즐겨보는 팬이라면 니콜라스 케이지의 1,2편에서 아비게일 역으로 나온 다이안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에드 해리스도 악당인 미치 윌킨슨 역으로 나온다는 것. 팀 하나 더. 같은 2005년 개봉되었고, 같은 이름인 안나라는 소프라노로 다이안 크루거가 나온 또 다른 클래식 음악영화가 있으니 바로 (Joyeux Noel)인데, 이 영화에는 프랑스군 중위 역으로 그녀의 남편 기욤 카네가 출연했다.
한편 이 영화에는 우디 알렌 연출작 에 나왔던 영국의 훈남 매튜 구드가 세속적인 건축가 청년 마틴 바우어 역으로 나왔고 안나 홀츠를 돌봐주던 원장 수녀 역으로는 셰익스피어 해석의 대가인 배우이자 감독 케네스 브래나의 아내인 배우 엠마 톰슨의 엄마가 출연하고 있다.
@ 카핑 베토벤 VS 베토벤 바이러스
2008년 한국의 TV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의 드라마 는 다소 과 유사한 스토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청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 주인공 남자냐 도우미 여주인공이냐만 다를 뿐, 천사표 여성의 도움을 받아 지휘를 하는 주인공에게서 음악에 대한 애절함이나, 우여곡절과 고생 끝에 초연을 한다는 기쁨 등이 골고루 펼쳐져 있다.
김명민은 여러 작품을 보며 강마에의 말투를 연구했다고 하는데, 그 작품 중 하나가 이라 말했다. 에드 해리스 역시 에서 다른 사람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음색과 액센트를 사용한다. 시니컬한 강마에의 말투를 기억한다면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를 더할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서 베토벤과 강마에가 교향곡 ‘합창’의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재미있다.
에서 강마에가 얼마나 베토벤과 닮았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다. 고난을 이기고 인간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는 작품이라 창단 취지에 가장 잘 맞는다면서 교향곡 “합창”을 창단공연에 올리고자 하는 석란 시향. 전공자인 단원들은 가뜩이나 강마에의 독설과 독단에 모욕을 느끼고 있던 참에 아마추어 출신 연구단원들이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자 폭발하고 만다. 오디션을 통해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강마에의 독설과 연구단원들의 존재는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을 터. 엎친데 덮친다고 시향 단원들 뿐만 아니라 합창단까지 펑크를 낸다. 그나마 믿었던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그러자 자존심을 잠깐 내려놓고 사과를 하려 했던 강마에도 돌연 태도를 바꾼다.
“사과요? 못하겠습니다!! 왜냐? 이건 진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을 창피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연주할 음악 앞에, 작곡가 앞에, 관객들 앞에 여러분이 당당히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음악을 들은 한사람 한사람이 이 힘든 세상에 작은 위로라도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이 시향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꿈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꿈을 같이 꿨으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에서 고난이 끝난다면 너무 쉽다고 생각했을까. 단원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이제는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다. 공연장 회관으로 수재민들이 몰려들고 열받은 그들이 트럭에서 악기 내리는 작업을 방해하다 급기야 악기가 망가지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그 와중에서 강마에는 수재민 대표에게 한방 맞고 팔을 다친다. 어라, 두루미의 귀가 안 들리는 상황인데 이번엔 강마에의 팔까지? 갈수록 태산인 상태에서 혼자가 된 강마에가 베토벤에게 고함을 친다.
“보고 계시죠? 객석이 반도 안 찼습니다.. 지금 공연 20분전.. 그나마 미뤄놔서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리허설은 커녕 합창단도 없습니다...그래요. 당신이 이 곡 쓰느라 고생한 거 알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그것도 귀먹은 상태에서 작곡했죠? 그래서 너도 지금,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겁니까? 이 정도 시련쯤은 당해봐야 내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시험하는 거에요? 징크스니 뭐네 무시하려 해도 이건 좀 심하잖아! 그것도 이번엔 별의별 일들이 다 뻥뻥!!"
의외로 공연 직전 강마에가 수재민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모든 문제를 풀어낸다.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은 조금은 슬픈 이야기이며,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불우했던 시절,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던 가난했던 소년은 음악을 만나고 행복해졌다.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이. 그 빛을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정말입니다.. 꿈인지 환상인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난 그때 그곳에서 오케스트라를 봤습니다.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먼 훗날의 나도 봤습니다...구원이었죠. 위로였고.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이 대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합창소리가 울려퍼진다. 비록 집을 잃고 차가운 예술회관에 몸을 누인 이재민들에게는 당장 한 장의 담요, 한 봉지의 라면이 더 절박할 지 모르지만 음악은 절망에 찌들어있는 삶에게 희망과 행복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강마에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 그것이 강마에의 교향곡 “합창”인 것이다.
@ 명품영화에 어울리는 최고의 음악들
영화의 오프닝에 깔리는 베토벤의 대푸가 Bb장조는 그의 말기 작품으로 고전주의 음악의 법칙을 깬 혁신적인 명곡이라 일컬어진다. 위독한 베토벤을 만나러 가는 안나 홀츠의 불안한 심경 속 자연의 모든 소리를 음표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천재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면에 사용되어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토벤이 마지막 신의 곁에 가기 전 옮겨 쓰는 신의 음성이라고,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의 음악으로 표현된다. 안나 홀츠가 병상에 있는 베토벤을 대신해 악보에 옮겨 적었으며 사제지간의 사랑을 넘어선 위대한 운명을 표현해내고 있다. 음악사적으로는 그 난해함과 오묘함 때문에 베토벤 작품 가운데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고 불린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후기 현악4중주 작품들이 매우 중요한 의미로 선언되어진다. 현악4중주 14번 c#단조, 9번 C장조 “라주모프스키”, 15번 a단조, 16번 F장조, 대푸가 Bb장조 작품 133 등 총 5개의 작품이 영화 전편에 걸쳐 나오는데, 헝가리 출신의 타카치 4중주단(Takacs Quartet)이 연주를 맡았다. 한국에서 이 영화의 개봉 이전인 2006년 6월 25일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공연을 한 타카치 현악 4중주단은 2002년부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전곡(17곡)을 녹음하며 각종 음반 상(賞)을 독식하고 있다. 2002년 베토벤 중기 현악 4중주 음반은 그라모폰상, 2004년 초기 4중주 녹음은 일본 레코드 아카데미상, 최근 발매된 후기 4중주 음반은 그라모폰 상과 BBC뮤직매거진의 ‘올해의 실내악 음반’을 휩쓸었다. 이들은 197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가보르 타카치 주도로 카로이 슈란츠, 가보르 오르마이, 안드라슈 페이에르가 모여 만들어졌고, 77년 프랑스의 에비앙 국제 콩쿠르를 시작으로 포츠머스와 보르도,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악4중주단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베토벤이 항상 공감하고 애독했던 독일의 위대한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장시 를 가사로 한 합창이 4악장에 붙여진 교향곡이며, 네 사람의 독창과 대합창이 교향곡에 사용된 최초의 음악인 교향곡 제9번은 무려 이 영화에서 25분이나 연주된다. 곡 전체의 길이가 74분 가량이니 1/3을 들을 수 있다. 헝가리 합창음악을 주도해온 명지휘자 페터 에르데이(Peter Erdei)가 이끄는 케치케메티(Kecskemeti) 합창단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오케스트라가 영화에 출연했지만 영화에서 실제 더빙된 음악은 다른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자랑인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로얄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 방송합창단이었다. 솔리스트로는 소프라노 루치아 폽, 알토 카롤린 왓킨슨, 테너 페터 슈라이어, 베이스 로버트 홀이 연주한 데카 음반의 사운드가 덧입혀졌다.
영화에 나온 또 하나의 교향곡인 7번 A장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한 버전이다.
그밖에 피아노 소나타 5번 c단조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32번 c단조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연주하고 있고, 바이올린 소나타 7번 c단조는 전설적인 러시아의 콤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레프 오보린이 반주를 맞추고 있다,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C장조 변주곡의 피아노는 스티븐 코바체비치가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