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이분법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내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이 말들은 대체로 거짓이다. 하지만 이분법이 존재하는 세상은 그 어떤 세상보다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뭔가 확실하다는 것. 뭔가 정확해진다는 것. 흑과 백 사이에서 회색을 찾는 우매함 보다는 흑과 백 중에서 택일 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고 손쉬운... 이분법의 세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요즘 우리 나라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편리한 이분법의 세계가 도래했음을 느낀다. 가난한 자는 죽고... 있는 자는 행복하며 가난은 세습되고 부는 축적된다. 거지가 부자가 되는 번거로움도 부자가 거지가 되는 안타까움도 없는...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 살다 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불확실한 변화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수용할 수 있는 불변의 미학. 참 좋은 시절이다.
발전사관이라는 것이 있다. 역사는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이론인데... 내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이 말 역시 거짓이다. 그래서 요즘 신문에 많이 나오는 민주주의의 후퇴니 역사의 후퇴이니 하는 말들을 신용하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전인지 후퇴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대를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대개의 경우는 잘못된 점을 수정하고 보완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다. 헌데, 만약 그 잘못된 점이나 수정 보완해야할 부분이 상대적으로 너무 많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모든 것을 '0'으로 되돌리는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분명 쉽지 않은 일일테지만... 언젠가 우리는 이 '0'을 선택해야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시대는 변해도 민중은... 백성은... 국민은 변하지 않는다. 소수의 혀에 휘둘려 다수의 혀를 짓밟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정부도 과거 이승만 정부때처럼... '0'의 심판 앞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이윤추구의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배울만큼 배웠다고 자만하기 보다는 촌부의 푸념에 공감하고 동감할 수 있는 그런 정부가... 그런 지도자가 되어주길 바랄뿐이다.
참~ 좋은 시절의... 푸념이었다.
Anthony Goicolea
Hungry ©1996
20x24 B&W Photo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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