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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와는 제 작년 바자회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주도 나처럼 취업에 관해서 내숭을 떨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자신을 숨기는 유형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매일같이, 정기적으로 만나고 대하고 부대껴도 절대 속엣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역정이 났다.
외로운 날에는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을 찾아다녀 보기도 했지만 시큰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의 단짝친구, 대학교 시절에 함께 자취했었던 친구들까지도 샅샅이 뒤졌다.
왜 그들과 어느 순간 연락이 끊어졌는지 재고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속엣것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이 없다면 충분히 고독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이주만한 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들보다 이른 직장생활은 불행한 면이 없지 않았다.
또래의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세속적으로 바뀌었고 오래 만나도 결코 친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늘었다.
말실수를 하지 않으며 체면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티낼 수 없는 고충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눈이 시어졌다.
어딜 가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충고하기 좋아했고 냉담했다.
스트레스는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었다.
아니, 근본이었다.
사람은 스트레스로 성숙한다.
―이것 봐라?
―요 앞 바자회에서 샀어.
비주얼한 외모를 가진 이주.
이주라면 휴미나 아름처럼 내가 가진 남자들은 잔인하게 채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주는 평범하고 무난한 남자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이주는 대학시절 홍보모델을 했었다.
성적이 바닥인 이주가 학교 모델이라니 기가 찬 노릇이었지만 마스크가 좋으니 어찌한가.
이주는 소싯적부터 남자애 여럿을 울리고 다녔다.
이주는 그런 외모‘에 힘입어 홈쇼핑에서 명품을 팔고 있었다.
물론 직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았고 학업과 병행해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이주는 홈쇼핑 쇼호스트를 하면서 ‘지리멸렬하다’, ‘입이 아프다’, ‘티브이에 나와서 부담스럽다’, ‘내년에는 꼭 다른 일을 할 거다’, ‘올해는 꼭 이일을 집어 치운다’고 입으로는 수도 없이 말하면서도 정작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얼마 주고 샀게?
―만원?
나는 속으로 만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
―얘. 내가 설마 만원 주고 샀겠니? 만원은 백화점 아울렛에 가서도 좋은 거 살 수 있는 가격이야. 내가 누구니? 이 천 원 깎았지.
이주와 내가 학생일 때는 과외해서 모은 돈을 쥐고 중고 명품관을 순회하곤 했다.
나는 그때 골랐던 상표 떨어진 루이 비똥 가방을 줄기차게 매고 다녔다.
바자회에 나오는 물건이라는 것이라곤 궁색할 수밖에 없다.
백화점에 번지르르하게 진열된 옷가지나 신발, 가방같은 것과는 비교자체가 불허하다.
하물며 아울렛에 뒤죽박죽 쌓아놓은 물건들과도 비교는 불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자회에 오는 것은 정말 쓸 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물건을 팔러 나온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나온 물건의 장점을 말하기에 급급하다.
유명 메이커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고 실용성이나 낮은 가격을 내세우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장점을 잘 알고 있다면 구태여 왜 물건을 팔려고 애쓰는 것일까.
―낡았기 때문이야. 버리기엔 아깝고.
이주가 뇌까렸다.
나는 수경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낡음’이란 것이 굉장히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낡았다, 그리고 아깝다. 이 말이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남자들도 이런 바자회에 내놓으면 얼마나 좋아.
이주가 히죽히죽 웃었다.
이주의 표정은 해맑은 반면 웃음소리는 비열했다.
나는 태준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주에게 태준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수선스럽게 물건들의 장점을 내세우며 고객들을 유혹하는 이주의 모습은 때에 따라 빛나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낡은 가방, 낡은 옷가지들을 뒤적거리며 쓸 만한 물건이 있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옷을 만질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은 마치 약간 시든 귤을 만지는 것과 비슷했다.
신맛을 많이 잃고 달콤해진 귤.
귤이 달아지는 것은 스트레스호르몬이었다.
귤을 적당히 괴롭히면 스트레스호르몬이라는 것이 나와 귤을 달게 한다.
나는 걸음걸이를 빨리 해 바자회장을 한 바퀴 휙 돌았다.
주마간산.
스트레스호르몬이 가득 흐르고 있는 옷가지, 모자, 구두. 나는 그만 군침이 돌았다.
젖어오는 입안을 견디지 못해 화장실로 기어들어가 마른 오줌을 누었다.
이주는 내 속엣것을, 비밀을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