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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나가래요,이젠마지막이야기

화병난여자 |2003.03.17 17:19
조회 7,180 |추천 0

병원에 갔습니다. 대학병원...아버님은 입을 다무시고 죽기원하는 사람같이 구셨습니다.

심술장이가되셨죠.당신이 죽는다는 생각만 하시고 어떤것도 필요없는 짜증장이가 되셨죠.

어머니가 옆에 계셔야 할것같았습니다. 그런데 퇴원못하신답니다. 간이 안좋아서,

병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됬습니다.임신 3~4개월째라 대학병원 암병동에서의 생활은 (먹고자고 씻고)

힘들었지만 내가 그집에 들어갔을때 유일하게 식구대접을 해주시던일 임부복사주신일,입덧할때 먹으라고 소라사다주신일,혼은 내셨지만 아들손자 낳다고 기뻐해주신일.이런 생각만나서 살려야된다는 생각만들뿐 어떻게 살든 나몰라라하신일은 힘드셔서 그러셨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해만 갔습니다.

처음엔 막내시누랑 같이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시누들은 아이들도 있고 (다들 제가 임신한줄 모르니...)

이혼하고 집에 같이 살던시누는 아이가 없으니까요,막내시누가 자던날 유난히 밤새 아버님은 침대시트까지 흠뻑젖도록 소변을 보셨고 귀저귀를 채워도 넘더군요.하체가 거의 마비라 엉덩이 들기도 힘든 아버님이라 감각이 없으셨나봅니다.유난히 까탈스러운 시누라 혼자 시트며 환자복이며 7번을 갈아입혔습니다. 아버님 염치없을까봐 오줌마려우면 저 자더라도 깨우세요,괞찮아요.깨는거 미안해서 그냥 싸셨죠? 말하는 제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참 건강한 사람 무너지는게 순식간이더군요.부인이 옆에 있음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인간으로써 23살먹은 며느리랑있을 아버님이 소변치우고 옷갈아입힘을 당하는

아버님이 최대한 수치스런 마음이 안들기 바랐습니다.그래서 없는 변죽에 아빠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부르면 덜 창피하시고 마음 놓이실것같았습니다.아침 7시에 마지막으로 시트를 갈고 잠이 들었는데 시누의 목소리가 절 깨웠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막 뭐라고 하고 있더군요.소변을 또 보셨나봅니다.

시누는 미치겠다며 자신은 엄마오라고 하고 갈테니 저도 가라며 가버리셨습니다.그순간 화도 나고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사람사는게 이런게 아니라고 20여년동안 부모한테 배우고 책에서 배우고 학교

에서 배웠습니다. 우리 아빠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괞찮다고 혼자있는게 편하다고했습니다.

그리고 명랑한척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나랑만 있으니까 좋죠.이제 내맘대로 할꺼에요.아빠 밥 안드심

저도 안먹을꺼구요.아빠 운동안하심 저도 그냥 가버릴꺼에요.병원지겨우니까 빨리 낳아서 우리 나가게요."갑자기 명랑한척 아빠라는 호칭에 저의 시아버지 놀래시더군요.하지만 살릴려면 제가 그분을 다루어야했고 저도 쑥쓰러웠지만 그렇게 했습니다.매일 수다쟁이가 됐습니다. "빨리 낳아서 우리 같이 낚시도 가고 벚꽃구경도 가요.그리고 나가서 김공장 잘되면 저 학교 보내주세요.교수 되서 나중에 교수 시아버지 되면 좋잖아요.아버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습니다.솔직히 살고싶으시답니다. 할일이 아직도 많고 무서우시답니다.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아닌 그냥 전우애가 생겼습니다. 암과 같이 싸우는...23살 나이어린며느리라도 잡고 당신의 무서움을 나누는 아버지가 불쌍해 화장실간다고 나가서 펑펑 울었습니다.

척수 검사를 받을 때 아기처럼 온몸을 오그라뜨리고 제손만 하애지도록 꼭잡고 계셨습니다.아기 같았습니다. 밥도 잘드시고 (토하실때가 많지만)밥드시면 제가 좋아하고 칭찬해드리니 꼬박꼬박 드시고 휠체어에 앉혀서라도 밖에 날씨좋을때 모시고 다니며 수다쟁이가 되어갔습니다. 당신 힘들게 사신이야기,바람피우신 이야기,사업이야기,상식적으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못하는 친구에게 하는 이야기를 다하시고 그럼 저는 맞장구를 치거나 바람피우건 정말 잘못한일이라고 구박도 했습니다.어느날 저녁 병원침대밑 보호자칸에서 잠을자다 깜짝 놀랬습니다. 누군가 제 어깨를 주물렀고 옆을 보니 아버님이셨습니다."왜 소변요?""아니다.너 나땜에 팔아플까봐 하루종일 주물러주고 씻기고 ...."아무말도 할수 없었습니다.임신4개월째라 하혈해가면 아버님을 번쩍번쩍드는 (지금하라고 해도 못해도 그땐 괴력이 생기더군요)병수발이지만 제마음이 더 안정되고 서로 위하고 사랑하는 힘든지 모르는 시기였습니다.당신이 움직일수있는 팔로라도 뻗어 저를 주물러주시는 아버님덕에 그날밤 잠은 포근했습니다.병원에 친척들이

문안을 왔고 전보다 웃음이 생기신 아버님 얼굴을 보며 다들 좋아하셨고 저도 천덕꾸러기 사고치고 들어온 집안 수치가 아닌 장손며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버님이 붙들고 저아이땜에 산다며 마음이 즐거우니 통증도 없다며 칭찬을 하시는 바람에 식구들이 오시면 일부러 나가있고 말았습니다.주눅들어있다

칭찬이 쏟아지니 더 어색했습니다.숨기던 임신사실도 방사선실에 검사받으러 아버님을 보내는데 혼자 가기 싫다고 옆에 있어달라니 곤란했습니다. 방사선실에 가면 아기가 기형아가 될까봐 어쩔수 없이

"아빠 나 아기 가졌어요.아기 볼때까지 낳아야지요.밖에서 기달릴테니 잘받고 나와요."아버님 충격받으셨나봐요.놀라시는 눈빛이시더군요.검사받고 나온 시아버지께 꾸중들었어요."애 가진애가 미련하게

중환자실에서 라면 쪼가리나 먹고 힘쓰고 그럼 식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밥이라도 싸다주라그러고

여기 다른사람한테 교대라고 해달라고 말하고 쉬어가면서 하지 너 왜 그렇게 미련하냐..."

"애기가 할아버지랑 있고 싶데요...."아버지"몇개월이냐?" "4개월 이제 5개월 들어가요"아버지 "뭘 먹었어야 배가 나오지 매일 라면만 먹고 돈아끼지 말고 밥 사먹었어야지!넌 애기 잘못되면 혼날꺼야...옆에 가서 휴대폰좀 빌려오고 넌 물좀 떠와라"아버지가 휴대폰으로 동생댁에 전화를 거셨나봐요.3시간후 제무릎위엔 셋째시누가 터미날에서 받아온 (아버님 동생분이 부치신)생선초밥이 놓여있었습니다. 2인분

시누는 아버님이 시킨초밥을 제가 먹자 의아해했고 아버님은 임신사실을 알리며 앞으로 밥을 싸다주고

교대도 해주라며 아프시기전 위엄을 찾아 이야기 하시니 병이 다낳으신것 같아서 좋았습니다.혼내시더라도 건강하시길 기도했습니다. 아기가 있다는 사실은 아버님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었고 "고놈 어떤놈이 들었나 궁금하네...딸낳으면 좋은데 아들일꺼 같다"고 하셨습니다.그렇게 매일 매일 정답게 아버지와 전 오히려 친정아빠와 제 사이보다 좋아졌고 암 말기에 다가서는데도 진통제 없이 지낼정도로 아버진 즐겁게 지내셨습니다. 의사가 매일 와서 진짜 통증없으세요?하며 고개를 가로 젓고 가시며 진통이 심하면 바로 연락달라고 하며 내려가셨습니다.남편이 하는 김공장이 힘들어지고 거기에서 24시간 상주하며 직원들 밥이며 청소할 사람이 필요했고 돌아가신다고 가망이 없게 되자 막내시누며 큰시누며 어머니며 다 오시더군요.그래서 전 아버님께 "자주 올께요.밥 잘먹고있어요.나 올때까지 살 많이 찌워서 있어야 돼요."아버님은 힘없이 웃으며 "알았어!언제라도 전화 하면 빨리와"하셨습니다. 고아원에 자식을 놓고 가는 심정이 이럴까요.사랑하는 부인과 딸들 셋이서 같이 하니 이젠  힘도 안들겠지요.하지만 같이 있고 싶었어요.대변도 소변도 치우던 사람이 치워야 덜 수치스러울텐데 울면서 나왔습니다.김공장에서 직원들 밥을 해가며 배는 더 불러왔고 공장에 들어온지 1달후 작은 시아버지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가망이 없어 약초요법을 써야하는데 제가 와야 그걸 할 용기가 생기신다고 당신 똥꼬집 꺽을 사람은 저라며 데려오라 하셨답니다.알았다고 하고 병원에 가니 아버님의 생명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정신도 혼미했고 헛소리도 하시고 금방 밥먹고도 안드셨다고 아기가 되어있었습니다. 아기가뱃속에서 7~8개월째 아버지는

자식들이 다보는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배불러서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전 시댁식구들 뺀 모든집안에 장손며느리로 칭찬을 받았고 친척들의 칭찬에 못마땅한 시어머니나 시누들도 그뒤로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고산 선물이었습니다.아버지가 돌아가신뒤 김공장은 부도나고 수없이 걸려오는 빛쟁이들 전화와 집에 붙은 압류 법소송 법원에 머리털나고 그렇게 뛰어다닌적 처음이었습니다. 신랑은 먹고는 살아야니까 가스배달을 했고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시고 시동생은 군인이고 아이낳기 전날까지 법원,  동사무소,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 은행, 대부계,검찰청.압류붙인사람,1200만원정도 나온 세금감면 신청하러시청 ,매일 뛰어다녔습니다. 남편 버는 데로 또 없으면 없는데로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작은 빛잔치를 끝냈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 6개월동안 시청을 다니며 졸라 세금 감면도 받았습니다.하지만 부도 수표로 압류붙인 사채업자와는 전화로 싸움도 하고 했지만 집에 압류를 풀지 못했고 은행에서 붙인 압류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금까지 20만원정도씩 다달이 이자만 꺼나왔습니다.둘째는 아들 아버님을 쏙닮은 아이로 낳았고 어머니도 둘째손자는 어느정도 이뻐해주시더군요.

시누들도 거의 집에 오지 않고 자신들의 길로 갔습니다.큰시누와 셋째시누는 유학을 갔고 막내시누는

재혼을 둘째는 서울근처에서 지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은 집에선 어머니 우리식구 시동생 그렇게 4년이 흘렀습니다.4년동안 아무것도 가진것없이 빛까지 갚으며 아이 40여만원씩주고 맡기고(어머니가 아이6개월때 아기 못보신다고 서울로 가셨거든요.)남편은 가스배달,유통업 배달,저는 새벽 어시장 경리 ,사무실 경리 ,힘들게 살며 싸움도 많이 하고 그러다 어머니가 아이 돌지나서 내려오셨습니다.

서울서 사시는것도 힘드셨나봅니다.둘다 놀이방 보내 저녁6시에 오는데요,당신 교회다니는데 방해되고

아이들 보기 싫다고 몸아프시다고 혼자 이집에서 살고싶어하신다고하셨답니다.

저희 빛갚고 사느라 당장 아파트 아니 월세방 얻을 돈도 안됩니다.더구나 대출이라는 대출은 다끌어다 무리하게 제가 장사를 시작했고 요즘 경기가 안좋아 힘듭니다. 가게에 하꼬방하나 딸려있는데 여기서

애들 둘 데리고 살아야 하나 봅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생활비 걷어서드리고 우린 여기서 살아야 하나 봅니다. 아직도 어머니 마음속엔 제가 며느리가 아닌가 봅니다.신랑하고 이혼할 정도로 싸웠습니다.이번엔 솔찍히 옛날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제가슴에 고스란히 한이 싸였었나봅니다.다 포기하고 싶습니다.군대제대하고 돈벌던 두살아래 시동생 생활비 한번 안보태고 같이 살아도 한마디 안했습니다.1년정도 집에서 폐인같이 놀때도 불평한마디 안했습니다. 놀다놀다 올해 대학간다고 달마다 돈부쳐달라고 하고 지금 학교 갔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안했습니다. 참았습니다. 난 며느리니까 그런데 어머니까 나가서 살으라니 대책없이 나가서 살으라니 여지껏 참고 산거 다 후회되고 빛갚지 말고 주택부금이나 부어 내아이들 살집 마련할것을 하는 후회와 진작에 이혼할껏이라는 후회 여러가지 후회와 한만 생깁니다. 나가래니 나가야겠지요.아버님 유언이 철없는 니 시어머니 시동생 부탁한다. 사랑 받을려고 생각지도 말고 니가 베풀어라 했는데 이럴줄 아셨나 봅니다.내나이 28살 인생의 황금기를 시댁에서 울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웃을라면 먼거같습니다. 남편도 불쌍합니다. 같이 고생하고 살았으니까요.그런데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생활이 너무 싫고 이혼하고 절이나 들어갔으면 돈도 명예도 사랑도 싫습니다. 아무도 배려해주지 않은 제 젊음이 불쌍해서 조용하고 마음이 편하다면 아무곳이나 가고싶습니다.많은 위로의 리플들 고맙구요.왜 참았냐구요.네 저도 제가 병신같아서 지금 화병이 날꺼 같구요.솔직히 자식땜에 자식이라고 인정받게 할려구 참았구 해마다 신랑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철드는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솔직히 시누가 넷이니 이런 구구절절하고 자세한 글 보면 우리집안 이야기인줄

아시겠지요.솔직히 아셨으면 좋겠네요.앞뒤 두서없이 올린글 읽어주시고 같이 동감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마음이 불안하고 충동적인 생각만 들었는데 이렇게 나마 글을 써보니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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