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 생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25번째 생일이었던 4월 4일 새벽까지만해도 난 소리바다 메탈 동아리인 'Argos' 회원들과 함께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구석구석을 술을 찾아 헤매었었다. 그리고 먼동이 틀 무렵 회원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 후, 골목 입구에 대기 중이던 젊은 택시기사에게 7만원에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택시에 올라 춘천으로 향했었다.
술에 취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기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레디오에서 흘러나오는 'Budgie'의 'Napoleon Bonapart'를 들으며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눈을 뜬 건 바로 이 곳, 감히 어딘지 짐작조차 허락지 않는 바로 이 연구실이었다.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빛 액체로 가득한 커다란 유리관 속에, 한 마리 관상어처럼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기억들이 바로 어제밤 일처럼 생생하지만 한편으로는 멀고 먼 전생의 일인 것 마냥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오전에서야 연구실을 들락거리는 연구원들―그들은 한결 같이 큰 코를 가진 백인들이었다. 그래서 난 이 곳이 대한민국은 아니라는 사실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끼리의 대화에서 오늘이 5월 1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보름쯤 전부터였다. 이 정체불명의 연구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유리관에 갇혀 있었던 것은. 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그 땐 내 몸이 두어 살 바기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불과 한달 전에 25번째 생일을 맞아 압구정동을 휩쓸고 다녔었던 내가, 보름 전엔 젖먹이 꼬맹이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내 자신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걸.
심지어는 이런 상상까지도 해 봤었다. 하필이면 날 태웠던 그 젊은 택시기사의 수명이 그 날까지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 태우고 달리던 택시가 대형사고를 당했고 원래는 그 사고에서 기사만 죽고 나는 살았어야 하는 건데 무언가 착오가 생겨 나까지 염라전으로 호송되어 가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전생의 과오를 따지려고 사망자 명부를 집어든 염라대왕은 아무리 뒤져봐도 명부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때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후 나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 육신은 썩어 문드러져 버린 후라 어쩔 수 없이 삼신할미를 구슬려 예정에 없었던 아이를 탄생케 한 뒤, 보름만에 10대 중반의 나로 성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 캡슐 안에서의 하루가 밖에서의 1년과 맞먹는 성장속도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일주일쯤 후면 25번째 생일을 맞은 원래의 나 정도로 성장해 있을 테고 그 때쯤이면 이곳에서의 모든 기억을 제거한 후 날 다시 내가 살던 지구로 되돌려 보내줄 거라는 희망적인 상상을 말이다.
물론 나도 그것이 얼마나 정신나간 상상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이 모든 일들을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모든 기억과 상상들을 다각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조합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 미친 상상말고는.
하지만 난 '제이슨'이라고 불리는 한 연구원을 통해 그 해답의 단서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잠겨져 있던 캐비넷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뒤적일 때, 유리관 너머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그 안에 담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저 연구원의 두 눈을 잠시나마 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생애를 통틀어 그토록 어리석은 바램은 전무후무하리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에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기적은 일어났다. 분명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파일의 내용이 생생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그와 나와의 거리는 20여 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내 시력은 양쪽 모두 0.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내게 측면을 보인 채 두 손으로 서류의 양끝을 쥐고 서 있었기 때문에 설령 내 시력이 독수리의 그것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육안으로 서류의 내용을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난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서류를 덮어버리기 전에 난 그의 두 눈을 통해 의혹 투성이인 이 상황을 해석해 낼 수 있는 키워드를 찾아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파일은 우려한 것처럼 빌어먹을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문용어로 도배되어 있었다. 당혹감에 빠진 내가 미처 서류를 살펴보기도 전에 볼일을 다 마친 제이슨은 그것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성의 꼬리처럼 포착된 단어들이 있었다. 그건 'genome'과 'clone'이었다.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혹은 점점 더 증폭되어만 갔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내 육체는 커 가는 의혹과 함께 놀라운 정도로 꾸준히 성장해가고 있었다.
해질 녘 연구실 내 모든 직원들이 퇴근했지만 늘 그렇듯이 '제이슨'은 자정을 한참 넘긴 후인 방금 전에야 연구실을 나섰다. 당장이라도 유리관을 때려부수고 뛰쳐나가 파일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득 차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액은 내 주먹질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허우적대던 나는 물리적인 힘으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은 다이나마이트가 되어 내 심장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머리통이 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 빌어먹을 유리캡슐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뇌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묘책이 있다면 죽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익사를 방지하기 위해 내 안면에는 산소호흡기가 부착된 헬멧이 씌워져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그것을 벗겨내려 발버둥쳐 봤지만 무슨 강력접착제로 붙여놨는지 내 얼굴 살갗만 떨어져 나갈 듯 아파 왔을 뿐이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이 안에 갇힌 채로 지내온 덕분에 거의 운동량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너무나도 가혹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큰 이유이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하의 이 유혼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날 아는 누군가가 기집애처럼 훌쩍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그 또한 지금의 나처럼 배꼽이 빠져라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리곤 감히 내 어깨를 '툭' 치며 동질감을 표출했을 것이다. 결국 나, 유혼도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18살 때 사람을 죽였다. 최초로 밤의 세계를 통일한 전대미문의 위업을 달성했었던 부친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였는데, 놈은 부친에게 깊은 원한 품고 있던 패망조직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자신의 가평 별장으로 부친을 유인했다.
그때 부친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망자(亡者)의 다리로 걸음을 내딛고 말았다는 사실을 직시했었을 것이다. 어차피 뼈를 묻어야 한다면 가급적 화려한 최후를 맞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선 편안한 죽음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렇지만 마지막 한줌의 불꽃마저도 모두 다 살라 버릴 수 있을 만큼 격렬하고도 폼 나는 죽음을 선택하셨다.
아버님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였던 수호 형, 그 두 사람과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중무장한 패망조직원 30여 명과의 혈투가 벌어졌다. 깊은 새벽이었지만 멀리 남이섬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보름 날 밤이었다. 풀섶을 쓰다듬은 가을 바람이 강 비린내를 코끝까지 실어다 주던 고즈넉한 새벽이었다. 푸줏간의 도살자마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할 만큼 영롱한 밤하늘 아래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선택했던 과거의 자신을, 아버님은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한참 후에 수호 형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아버님께서는 주먹 세계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라도 격포 앞 바다에서 있었던 30대 1의 혈투를 회상하시며 전의를 다지셨다고 했다. 그 전투에서 아버님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 몸 이곳 저곳에 칼침을 맞으시고도 갯바위로 달려가 방울을 딸랑거리고 있는 낚시대를 건져 올리셨다고 한다. 겨우 손바닥만한 우럭이었지만 아버님은 세상을 다 건져 올린 것처럼 기뻐하시며 손수 회를 떠 소주 안주로 삼으셨다고 한다. 자신의 등 뒤쪽 뭍에서는 또 다른 테러 부대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일화는 주먹잽이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수호 형 또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부친에 대한 전설들을 전해들으며 그를 닮아가려 무던히 노력했었다고 한다.
30명의 패망 조직원들이 크게 원을 그리며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던 그 때 아버님은 "후딱 끝내고, 격포 앞 바다에서처럼 갓 잡아 올린 우럭은 아니지만 횟집에라도 가서 우럭 회에 소주 한잔하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시간 동안의 혈투 끝에 아버님은 현장에서 숨을 거두셨고 수호형은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내내 별장 안에 몸을 감추고 있던 놈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에야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와, 옆구리를 틀어막은 채, 겨우 한줌 남은 호흡의 끄트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부친께 저승길 노잣돈이나 하라며 천 원짜리 지폐를 던져주었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회칼을 집어 들고는 부친의 옆구리 깊숙이 꽂아 넣었다. 그것도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을 알고도 열 번이나 계속 그 짓을 되풀이해 시신을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건 부친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가를 스스로 입증하는 행위였다.
만약 거기서 끝났다면 놈이 내 손에 죽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난 너무 어렸기에 아버님이 밤의 세계를 휘어잡던 건달이라는 사실조차도 몰랐고 당연히 그 세계에 어떤 비열한 암수가 난무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놈이 후환을 두려워 해 배 다른 두 형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냥 부친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로 돌아가셨을 거라고 추측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나에겐 어머니가 두 분 계셨다. 나를 낳아 주신 친어머니, 그리고 배다른 두 형을 분만한 큰어머니. 쉽게 말해서 난 첩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나와 나이 터울이 많았던 두 형은 어머니와 날 친엄마,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 줬다. 검사가 되어 아버지 같은 깡패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겠다던 큰 형, 영화감독이 되어 아버지처럼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겠다던 작은 형.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한번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어느 야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부친에게 서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덕분에 난 녀석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큰어머님은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르셨던 터라 놈의 마수를 비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싸움을 제일 잘 하는 남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의 투정에 두손 두발을 다 드셨다. 그러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이기는 내가 진정 세상에서 최고로 강한 남자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었다. 돈이 많아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어서,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강한 남자가 진정으로 강한 남자라고, 나 또한 그렇게 자랄 거라며 내게 최면을 걸고는 하셨다.
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했다. 혹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런 유아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집에 오셨다.
엄마는 아파트 창가에 서서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쌀을 씻다가도, 내게 동화책을 읽어 주다가도 자동차 시동이 꺼지는 소리만 들리면 베란다 쪽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리곤 힘없이 돌아서며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런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 또한 숨을 크게 쉬는 습관을 갖게 됐다.
엄마는 어린 내가 봐도 정말 젊고 아름다웠었다. 어떤 때는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즈음 베란다 쪽에 서 있는 엄마는 정말로 눈이 부셔서 똑바로 올려다 볼 수가 없었다. ^^;;
그런 엄마가 서른도 채 넘기기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모두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언젠가 친구 분과의 통화에서, 늘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삶이 지겨워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무섭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아침 정말로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대로 숨을 거두신 것이다.
엄마 장례식을 치루고 나는 외할머니 손을 잡고 춘천 외가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학교에도 다니게 되었고 이런 저런 학원도 등록했다. 하지만 컴퓨터, 속셈학원엔 거의 나가지 않았고 태권도장에서만 살다시피했다. 나는 다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어 아버지를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겠다고.
태권도장엔 그리 오래 나갈 필요가 없었다. 6개월쯤 다니다 보니 시간 때우기 식의 구태의연한 지도 방식에 염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이상 배울 것도 없었다. 난 이미 태권도 시범단원들이 행사 때마다 선보이는 모든 고난도의 동작들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태권도장을 그만 둔 후에는 쿵푸도장에 나갔다. 하지만 그곳은 두 달도 채우지 못했다. 쿵푸는 너무 조악한 무술이었다. 아니 무술이라기 보다는 무용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는 게 유일한 꿈이었던 내게는 적합한 무술이 아니었다.
그 다음 찾은 곳은 합기도 도장이었다. 태권도의 직선적이고 파워 넘치는 움직임과 접근전에서 만큼은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도의 장점들을 교묘하게 접목시킨 무술이었다. 아직 뼈와 근육이 미숙했던 당시의 내겐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적을 제압하는 기술은 꼭 필요한 항목이었다. 합기도를 통해 나는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때쯤부터 쑥쑥 자라기 시작한 키가 졸업할 무렵엔 180센티를 훌쩍 넘어섰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이제 체력적으로는 성인에 못지 않았다. 아버지와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번 서울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엄마를 그렇게 죽게 만든 데에 대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무산되고 말았다.
어느 날 큰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는데 아버님과 두 형이 세상을 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한참을 흐느끼셨다. 그래서 당신도 미국에서 입국하지도 못하고 계시다고. 어쩌면 나도 위험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사태가 누그러지면 데리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큰어머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버님과 두 형이 죽은 건지, 게다가 큰어머님과 나는 또 왜 숨어살아야 하는 건지 채 여쭤보기도 전에 큰어머님은 수화기를 내려 놓으셨다.
그로부터 2년쯤 후, 큰어머님이 귀국하셨다. 외할머님께 날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허락까지 받아내셨다. 하지만 난 한국에 남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하신 큰어머님은 아버님과 두 형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시고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셨다. 절대로 그들에게 내 존재를 노출시킬만한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말씀을 열 번도 넘게 하셨다. 비록 당신 배 아파서 난 자식은 아니지만 이제 당신께 하나 남은 자식인 나마저 먼저 보낼 수는 없다며 흐느껴 우셨다. 나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큰어머님 손을 꼭 잡아드렸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지 탑승구로 들어서면서도 몇 번이나 날 돌아보며 눈물을 찍어내셨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구하라며 큰어머님 적어주신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이름은 김수호이며 사고 당시 아버님 운전기사겸 보디가드를 맡았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놈은 아버님 대신 조직의 대권을 장악한 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대부분 그의 회유에 넘어갔지만 아버님의 골수분자들은 스스로 조직을 떠나 인천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6개월 넘게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처럼 되살아난 수호 형 역시 인천으로 합류했다. 처음에는 30여명 가까이 됐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님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서서히 시들어 갔고 그렇게 한두 사람씩 이탈한 끝에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1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당시 아버님의 곁에서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길 만큼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버님의 복수를 계획해 왔었다. 보지 않고도 놈의 일거수 일투족을 가늠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아버님을 살해하는 데 앞장섰던 패망 조직원들 중 우두머리 급들은 대부분 놈이 거느리는 수행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굳이 따로 놈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뒤지고 다녀야 하는 내 번거로움을 덜어준 셈이다.
놈은 1년에 한번씩 먼저 떠나보낸 아들의 뼛가루를 뿌린 격포 앞 바다를 찾았다. 수행원은 고작해야 10여명뿐이었기에 그때가 아버님의 원수를 갚기에 최적의 기회라고 그들은 분석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틀 후였고 아버님의 추종자들은 그 날을 D-DAY로 삼고 있었다. 동행하겠다는 나를 수호형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섭섭하다거나 야속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놈에게 투항했다면 평생 부귀영화가 보장되었을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목숨을 잃을 게 뻔한,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을 대신 떠맡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죽으러 가면서까지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어머님의 죽음 이후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한 나의 맹세는 그 날 깨지고 말았다. 그들의 아지트에서 돌아서 나오던 나는 참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10여 년을 굶주린 야수처럼 살아왔던 나는 내 먹이감을 그들에게 넘겨줄 수가 없었다. 나는 막 바로 터미널로 향했다.
'부안'에 도착한 나는 우선 시내에 여관방을 잡은 뒤 기동력 증가를 위해서 모터 싸이클을 한 대 마련했고 시장에 들러 사시미라 불리는 횟칼을 두 개 구입했다. 그리곤 거의 하루 종일을 격포 해변 가를 탐색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인근 어느 초라한 슬레트 집 뒤뜰에서 발견한 쇠파이프와 각목을 미리 봐둔 해안 가 바위산에 숨겨 두었다. 모래사장과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이윽고 그 날이 왔다. 꼭두새벽부터 난 횟칼을 품에 넣고 격포로 이동했다. 바위산 위에 몸을 은폐시킨 채 잠시 후에 벌어질 결전의 장면들을 머리 속으로 그려봤다. 십여 명의 수행원들이 동행한다고 했던가? 기습공격을 단행한다면 맨 주먹으로도 서너 명쯤은 순식간에 굴복시킬 수 있는 나였다. 문제는 그 후 여섯 명의 합공을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춘천의 밤거리를 방황하며 다수와의 싸움을 실습해 왔던 터라 자신 있었다. 그리고 행여 일이 잘못되어 그들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그게 무에 대순가? 어차피 두 형들과 함께 오래 전에 죽음을 당했어야 할 목숨이 아니던가. 놈과 함께 가는 황천길이라면 천번 만번도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리라.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때까지 놈의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정보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어쩌면 이쪽으로 향하는 중간 어디선가 그들이 먼저 덮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의 성패를 떠나서 수호 형을 비롯한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우리 집안 일로 인하여 그들이 다치거나 혹은 살인자가 되어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원치 않았다.
그 때였다.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모두 세 대였다. 차량들은 해안 가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 나란히 멈춰 섰다. 먼 거리였지만, 중간 차량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 사내의 얼굴에 내 시선이 고정됐다. 한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난 감각적으로 놈을 알아본 것이다. 온 몸의 피가 머리 끝으로 역류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평상심을 찾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바위산 등성이 너머 바닷물 속으로 살며시 입수했다.
놈들이 느긋한 걸음으로 바닷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머지 사내들이 놈을 호위하듯 한 대형이었다. 놈이 바닷가에 당도하면 난 물 위로 튀어 올라 녀석의 심장에 횟칼을 쑤셔 넣을 것이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라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최후를 맞이할 테지. 놈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가급적이면 도주를 할 생각이었다.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놈이 거의 근접했을 때 난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신 후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닷물이 놈의 구두 끝을 찰랑거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놈은 걸음을 멈췄다. 나와는 불과 두어 걸음 차이였다.
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상현아, 이 못난 애비가 왔다. 널 이 차가운 곳에 떠다니게 만든 못난 애비가 왔어……」
어느새 놈의 눈가는 물기로 젖어 있었다. 남의 자식들을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 도살자도 자기 자식 죽음은 마음이 아리단 말인가? 구역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저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녀석의 목젖을 끊어 놓기 위해 물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도로 쪽에 굉음을 내며 몇 대의 차량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멎어 섰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수호 형 일행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비호처럼 달려와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놈의 수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잘 훈련된 호위병답게 놈을 주위로 겹겹이 진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닷물 속에 암살자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놈의 목젖을 가르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훨씬 쉬었다. 녀석은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한 채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반 족장 정도 놈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수하 하나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녀석도 곧 피분수를 뿜어대는 배를 움켜쥔 채 모래사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 때 한 녀석이 "회장님!"이라고 외치며 사시미를 치켜들고는 나를 향해 질주해 왔다. 덩지는 산만했지만 내 나이 또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엣 된 얼굴이었다. 놈을 대신한 칼받이 용으로 사육된 것으로 여겨졌다. 차마 녀석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었다. 횟칼이 들려진 녀석의 오른 팔을 비껴낸 후 수도로 뒷목을 내려쳤다. 녀석은 바닷물에 얼굴을 쳐 박고 말았다.
혈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시미로 무장했던 놈의 수하들은, 쇠파이프로 무장한 수호 형 일행들의 발 밑에 깔려 피를 토하거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놈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지만 난 놈이 부친께 했었던 것처럼 몇 번이고 확인사살을 거친 뒤 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다. 놈의 가족들조차 놈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놈은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수호형은 부하 하나를 지목한 후, 인근 민가에서 모터보트를 물색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놈의 호위대 중, 가평 별장에서 부친에게 쇠파이프와 각목, 횟칼을 휘둘러 댔던 놈들만을 따로 추려낸 후, 부하들을 시켜 멱을 따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네 놈이었다.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밤하늘 곳곳을 꿰뚫었다. 수하 몇이 도로 위에 세워둔 승합차에서 미리 준비해 온 쇳덩이와 쇠사슬을 운반해 왔다. 잠시 후 바위산 뒤편에서 보트의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부하들은 놈과 수행원들의 시신을 쇳덩이에 매달아 보트에 옮겨 실었다. 두어 구의 시신을 실은 보트는 바다 중심으로 백여 미터쯤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 시신을 수장시키는 것을 반복했다.
수호형은 증인인멸 차원에서 나머지 놈들도 모두 수장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는 그들의 생명까지 빼앗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수호형은 그들을 살려주는 댓가로 그 날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그런 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지만 분명히 난 사람을 죽였고 그로 인해 죄과를 치르게 된다고 해도 억울할 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오랜 원한은 해소되었다. '분노'라는 연료를 먹으며 '복수'라는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와도 같았던 내 삶은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 앞에서 이런 저런 악상을 떠올렸던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누가 보아도 한 눈에 공부벌레였음을 알아볼 정도로 순진하게 생긴 제이슨은 오늘도 동이 트자마자 출근해 이런저런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해치웠다. 그리곤 창가에 걸터앉아 헤즐럿 커피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왠지 그라면 이 미스테리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종종 그는 내게 동정 어린 시선을 던지곤 했었다.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지만 자신의 처지가 그럴 수 없으니 용서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제이슨은 연구원들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친구였다. 내가 하는 말을 서툴지만 수석연구원들에게 통역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내 헬멧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마이크는 연구실 구석구석에 부착된 스피커를 통해 연구원들에게 전달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헬멧에 설치된 소형 스피커를 통해 난 그들의 메시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아직 스피커 시스템을 켜 놓지 않은 상태였다. 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혹여 내 목소리가 나를 에워 쌓고 있는 용액을 뚫고 나간다손 치더라도 완전히 밀폐된 유리관을 통과해 주길 바란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가 다가왔다.
「지큼…… 초를 부르셔씀니카?」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와 난 스피커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도 분명히 서로에게 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이감에 감탄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른 연구원들이 속속 들이 닥칠 테니 말이다. 그 전에 제이슨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추측은 그 다음 일이었다.
「제이슨. 여긴 어딘가요? 내가 지금 죽은 건가요?」
그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모든 연구원들에게 나와의 개인적인 대화는 금기시되어 있었기에 내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건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슨. 부탁입니다. 지금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내가 왜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겁니까?」
혼란과 갈등이 그의 안면에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실을 둘러본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킨 미쿡임니타. 미스터 유는 분명히 살아 이크효」
이미 짐작하고 있던 대로였다. 연구원들은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또 언젠가 한 연구원이 플로리다로 낚시를 떠난다는 얘기를 동료 연구원에게 자랑 삼아 떠들어대던 걸 엿들은 적이 있었다.
「미국 어디죠?」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생명콩학 연쿠소입니타. 사설 연쿠소지만 청푸의 막대한 치원을 받아 운영되코 이쵸」
분명치 않은 발음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겁니까? 납치라도 된 건가요?」
아주 민감한 사항인지 제이슨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크런 컨 아닙니타」
제이슨은 두 손을 허공에 휘저어 댔다. 그리곤 매우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저히 말해서는 안 될 심리적 압박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늘어져라 길게 숨을 내쉰 그가 결심이 섰다는 듯 말을 이었다.
「탕신은 실험체임니타. 탕신은 납치된 케 아니코…… 창초태었씀니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그가 무언가 단어를 혼동하여 사용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런 나를 이해하겠다는 듯 그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탕신은 탕신이 아닙니타. 오리지날이 아니라 클론입니타」
「클론? 내가 복제인간이라는 뜻인가요?」
「크러씁니타. 탕신은 오리지날로부터 추출한 DNA로 창초된 폭체인칸입니타」
그의 한국어 실력은 단어를 혼동할 만큼 어설픈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꼭 필요한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선별해 사용하고 있었다.
「처희는 세계 최초로 성인을 크대로 복제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연구충입니다. 미스터 유가 바로 크 첫 번채 실험태상이며 실험은 키대보다 훨씬 터 성콩촉이었씁니타」
예전에 신문에서 복제양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최근엔 원숭이 남매도 복제에 성공했다고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 인간을 복제해 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고 혀를 차기도 했었다. 그 날 저녁 같은 과 친구(학번은 한 학번 늦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녀석이었다) 녀석과의 술자리에서, 인간 복제에 대한 얘기가 화두로 등장했고 우리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함께 했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아니라고? 내가 단지 나의 세포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천번 만번 양보해도 제이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왜 하필 그 실험대상이 나였어야 하는 건가? 왜 하필 미국인도 아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득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를 선택했단 말인가? 그럴 확률은 70억 분의 1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는 건가?
「왜…… 왜 하필 나였지? 당신들은 어떻게 날 선택할 수 있었냐구!」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 칵 쿡에서 치원차를 모칩해씀니타. DNA를 채취해 보내 춘타면 컨 탕 천 풀을 치급해 주겠다코 약속했쵸. 세계 칵 쿡에서 10,000캐카 넘는 DNA 셈플이 포내쳐 와씀니타. 크 중에 미스터 유의 DNA가 처희틀이 원하턴 초컨콰 카창 찰 마차 털어쳤씀니타」
「다, 당신들이 원하던 조건이라는 건 뭔가?」
「처희틀은 이펀 실험에서 세 카치 목촉을 탈성하코차 해씀니타. 성숙퇴코 푼화퇸 인칸의 젖샘세포로푸터 모튼 유천청포가 틀어있는 핵만을 빼내어, 핵이 체거퇸 타른 난소세포로 이식하는 팡펍으로 인칸을 폭체해 내는 컷이었습니다. 이 켱우, 또 타른 제 3의 태리모 차쿵에서 성창토록 하는 케 포통이치만 초희는 크러한 충칸 콰청을 커치치 않코, 치큼 미스터 유카 켸신 캡슐 안에서 인칸의 팔육 콰청을 수 팩패로 탄축시켜 성창토록 하는 획키촉인 이론을 캉쿠해 냈습니타. 크 컷이 가능한지를 입증하는 것이 첫 펀째 목촉이었죠. 그리고 복제된 인간에게 오리지널의 기억을 이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두 펀채 목적이었코, 유천차 패치를 탈리함으로써 풀치평을 치유할 수 있는카 하는 컷이 처희들의 마치막 목촉이어쬬」
「불치병? 그럼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건가?」
내 반문에 제이슨은 납득할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모르셔씀니카? 미스터 유는 루게릭 평에 컬려 이썼씀니타」
루게릭 병이라면 세계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고 있다는 바로 그 질환이었다. 그리고 천재 기타리스트 '제이슨 베커' 역시 같은 병으로 시달리다가 요절했다. 온 몸의 근육이 마비되어 뒤틀린다던 저주받은 질병. 내가 그 질병에 걸렸다니.
「초희는 칵 쿡에서 채취탠 DNA를 푼석한 켤콰 칵 종 풀치평에 컬려 있는 사람들의 DNA만을 따로 푼류해 내씀니타. 약 500여 캐의 DNA가 칵 총 풀치평 인차를 내포하코 이썼쵸. 초희틀은 이미 연쿠한 켤콰를 토태로 DNA를 초착해 풀치평 인차들을 체거해 낸 후 폭체 실험해 착수해씀니타. 하치만 태푸푼의 DNA가 태아로 팔촌태기 천에 추컸코, 태아로 팔촌탠 나머치토 급속토의 성창콰청에 척응하치 못한 채, 추컸씀니타. 유일한 생촌차가 미스터 유쵸」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발 아무라도 날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만 해 준다면 평생 그의 노예가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제이슨의 얘기를 듣고 나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25번째 생일을 맞았던 그 날, 택시 안에서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후에 벌에 쏘인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 빌어먹을 택시기사가 이들이 말하는 각 국의 DNA 추출 지원자 중 하나이리라. 만약이지만 행여라도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제일 먼저 연구소를 통째로 날려버리리라. 그리고 귀국해서 내 운명을 이렇게 뒤틀어 놓은 그 망할 기사 놈을 찾아내, 가차없이 멱을 따버릴 것이다.
토네이도 같은 혼돈에 신음하는 나를 바라보며 제이슨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 때였다. 출입문이 열리면서 '아서'라는 이름을 가진 수석 연구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제이슨은 재빨리 창가 쪽으로 달려간 뒤 커피 잔을 집어 들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아서'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손등으로 눈시울을 훔쳐냈다.
머리 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지만, 난 저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통제해 가며 평상시에 보여왔던 정도의 발작만을 되풀이했다. 서너 번쯤 연구원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난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제와 같은 질문을 퍼부어 댔다. 여기가 어딘지, 왜 내가 유리관 안에 갇혀 있어야 되는지, 언제쯤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인지 등등. 물론 그들은 내 질문에 일언반구도 없이 '피식' 웃으며 스피커의 스위치를 오프시켰다. 언제나처럼 난 그들에게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실험체에 불과했다.
난 그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제이슨과 단 둘이 남게 되는 그 순간을. 최대한 그의 양심과 동정심을 자극해 나를 이 유리 캡슐 안에서 탈출시켜 줄 것을 호소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늘 자정 때까지 혼자 남아 연구에 골몰해왔던 제이슨이 오늘은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정시에 퇴근을 했다. 회식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실험실은 그 자체로 내게는 거역할 수 없는 고문이었다. 짙은 어둠과 늘어진 적막감은 도살자의 해머와 비수가 되어 내 골과 심장을 끊임없이 내려치고 난도질해댔다. 한참을 신음을 토해대다가 먼동이 터 올 무렵이 돼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서울―춘천간 국도 위를 가공할 소음과 함께 쇄도해 가는 물체가 있었다. 육중한 근육질의 사내를 연상케 하는 적갈색의 하야부사였다. 녀석은 마치 1,300cc의 배기량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시속200km로 마주쳐 오는 바람을 가르며 오밀조밀한 곡선로를 유연하게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놈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혼이었다. 흙 빛 가죽점퍼에 검은 색 건빵바지, 레이싱 용 부츠 대신 국방부에서 지급된 사병용 군화를 신은 그의 질주는 광대의 외줄타기 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따스한 봄볕 아래 단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가평을 지나자마자 산등성이를 따라 심한 커브길이 펼쳐졌다. 저만큼 앞에서 질주하고 있던 검은 색 '포르쉐 GT3'의 제동 등이 깜빡댔지만 혼의 하야부사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곡선로를 진입해 어느새 포르쉐의 뒤꽁무니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올~~ 좀 밟는데……?」
포르쉐의 핸들을 잡고 있던 고수머리의 사내가 룸미러를 흘끔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험상궂은 인상과 전라도 지방의 억양이 베어있는 말투, 걷어 부친 오른쪽 팔뚝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장미문신으로 보아 누구나 대번에 주먹잡이임을 짐작할 수 있을 그런 사내였다.
반대편 차선으로 마주쳐 오던 2.5t 탑차를 흘려보낸 뒤, 하야부사의 엔진은 분주하게 기름을 뿜어댔다. 곡선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혼은 차체를 왼편으로 약간 기울였고 하야부사는 중앙선을 넘어 포르쉐의 왼편을 스치고 나갔다.
「저런 싸가~~지를 봤나? 감히 나으 면전에다가 똥방뎅이를 들이대?」
사내의 오른 발이 엑셀 페달을 짓밟았다. 포르쉐의 계기판 눈금이 200km/h로 치솟아 올라가며 사납게 전면으로 쏟아져 나갔다.
「난 레이싱 중에는 절대 그 어떤 새끼도 내 앞을 지나가는 꼴을 못 보는 놈이여. 근디 감히 두 발 달린 딸딸이로 날 추월하겠다고야……? 턱도 없는 소리지라!」
벌써 저만큼 뒤쪽으로 쳐져 있어야 할 포르쉐의 엔진음이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자 혼이 고개를 돌렸다. 검게 코팅이 된 운전석의 유리창 너머로 가멸차게 웃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적의가 번뜩이고 있는 사내의 두 눈을 발견한 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세상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스스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가며 극심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바로 저 사내처럼…….
단 한번 그들과 대화를 가져 본 일도 없고, 단 한번 그들과 시선을 마주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난 늘 그들의 타겟이 되고 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난 결코 알 수가 없다〉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경적소리가 혼의 시선을 사내에게서 거둬 전면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직선로에 들어선 붉은 색 티뷰론이 상향 등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미, 미쳤어……」
다혜의 언니는 나팔관이 좁아 착상이 되지 않는다는 병원 측의 진단을 받았다. 그 후, 5번이나 인공수정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엔 아이를 갖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의 남편은, 오히려 영원히 서로만을 사랑할 수 있어 잘 됐다는 말로 그녀를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우울증은 더욱더 심각해져만 갔다.
그런 그녀가 결혼한 지 만 5년 만에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늘 안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봐 왔던 다혜는 왈칵 울음부터 터뜨렸다. 5년 동안이나 웃음을 잃은 채 살아왔던 언니가 다시 환한 미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몰랐다.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내일 수업도 제낀 채 서울행을 서두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150km를 넘나드는 과속운전을 하고 있었다.
급커브 길을 빠져 나오자마자 리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채 100미터도 안 되는 지점에서 덩지 큰 오토바이 하나가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레이크 페달을 짓밟으며 경적을 눌러댔다.
반대편 차선으로 등장한 티뷰론을 발견한 포르쉐의 사내가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혼을 노려봤다. '이래도 감히 날 앞지를 수 있겠냐'는 자만에 찬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을 마주 응수하는 혼의 입가에는 여전히 엷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주먹을 휘두른 적도 있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왜 아무런 해꼬지도 한 적이 없는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지를 꼭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손잡이를 바짝 말아 쥐자, 하야부사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내 말투, 표정……, 심지어는 내 몸짓 하나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었다〉
하야부사가 뒤쪽으로 쳐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속도를 끌어올리자 사내가 경악스런 표정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티뷰론의 운전자가 하야부사를 피하기 위해 중앙선 너머의 자신에게로 덮쳐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친구는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게 추월당했던 게 그의 호승심을 자극했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그것 또한 나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이어가 거대한 비명을 지르며 차체가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조금쯤 열려진 창 틈으로 역한 냄새가 스며 들어와 다혜의 후각을 자극했다. 고무 타는 냄새였다. 어느새 하야부사는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급브레이크를 조작한 덕분에 티뷰론의 속도가 많이 둔화되어 있었지만 조금도 감속되지 않은 바이크의 무시무시한 움직임을 고려할 때, 대형사고를 피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 외에 달리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들의 상실감은 각자의 아집에서 파생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아닐까 추측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브레이크 밟는 것을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용납하기 힘든 각자의 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르쉐가 제동 등을 깜빡이는 순간, 티뷰론이 혼의 망막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순간 하야부사의 차체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5미터도 채 되지 않을 포르쉐와 티뷰론 사이의 빈 공간을 꿰뚫고 나갔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 가드레일을 비껴내며 차체의 중심을 잡았다. 인간의 반사신경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연속동작들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혼의 얼굴에는 그 어떤 긴장감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일상처럼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되풀이하듯, 그렇게 평화롭게만 비춰졌다.
산과 산을 애무하듯, 굽이쳐 흐르고 있는 소양강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물길을 따라 흐르듯, 강변도로 위로 많은 차량들이 술과 마약과 방탕에 취한 한량처럼 흐느적거리며 허상에 지나지 않는 지도 모를 각자의 꿈을 찾아 조심스럽게 항해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환락의 밤이 서서히 도시를 적셔 가고 있었다. 수많은 잠재적 탕아들을 한가득 품에 안기 위해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는 한물 간 늙은 창녀처럼.
혼의 하야부사는 소양 강변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은 혼에게, 지구를 파멸키 위해 수억만 광년 떨어진 외계에서 공간 이동해 온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시켰다. 그의 하야부사가 도로 좌측에 홀로 우뚝 서 있는 14층 짜리 건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804호 앞에 멈춰선 혼이 키를 꽂아 잠금 장치를 해제시켰다. 30여 평의 원룸 중앙에는 길다랗게 생긴 수족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색으로 채색된 열대어들이 주인을 반기듯 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군화를 벗어 젖힌 혼이 답례를 하듯, 오른 손으로 어항을 두어 번 다독거렸다.
베란다 쪽은 유리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유유히 흐르고 있는 소양강을 품고 있는 유리벽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족관 위에 올려진 리모콘을 집어 든 혼은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출력 1200W의 스피커를 통해 어쿠스틱 기타의 맑고 투명한, 그러나 매우 음울한 분위기의 아르페지오가 울려 퍼졌다. 'Symphony X'의 'A Lesson Before Dy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