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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로이런편지가..

진실과거짓 |2006.12.04 09:27
조회 253 |추천 0

진실과거짓.

 

3살 우리아가...
올해초 2006년 1월 8일 오후 3살짜리 아들의 온 몸에
손바닥만한 멍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왔어요.
갑자기 기어다니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아기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았는데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L1(작은림프모구 세포질이 거의 없는 모세포)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청천벽력같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어요...
골수까지 퍼져서 지난 11개월간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 항암제 치료(투여)를 받았고 이젠
골수이식(동종 조혈모 세포이식)수술을 받으면 아기를 살릴수 있어요.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아기가
골수이식수술을 못받으면 생존율 10%, 골수이식수술을 받으면 생존율 90%에요
이곳은 대학병원 중환자실 항암치료 직후 칭얼대던 아기는 겨우 잠이 들었어요.
자기 몸 아픈것이 우선일텐데, 세살 어린것이 못난 엄마인 저를 걱정하고 있었던 거에요.
항암치료때마다 아기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미어져요
소아백혈병을 앓으며 머리카락은 거의다 빠지고 마스크를 쓰고서 11개월간
세상과 떨어져 병상에 누워있는 뼈만남아 가녀린 생명을 이어가는 아기.
우리아기 증상은 백혈병 암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서 혈액을
만드는 기능에 이상이 발생해서 임파선 등을 침범해 생겼다고해요.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4가지 기적중 3가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셨어요.
첫번째 기적은 우리아기 스스로가 해냈다는 거에요. 몸속에서 스스로 병마를 이겨내가고 있다고해요.
지난 11개월동안 3번씩 골수 검사만 30번. 그 힘든 고통을 아기 몸이 참아냈다고해요.
골수 검사비로만 1회당 30만원씩 900만원이 나와 지난 11개월 사이 몇번의 사채를 더 썼어요.
두번째 기적은 아기 백혈구수치 지난 11개월간 120,000 에서 21,000 으로 떨어져
정상수치인 4,000 ~ 11,000에 가까워져 이제 골수이식수술을 받을수 있을정도로 정상에 가까워 졌다고해요.
세번째 기적은 지난 11개월간 아기에게 적합한 골수를 찾아헤멘끝에 아기 골수(조직적합성항원)와
일치하는 골수기증(공여)자 분을 고통스런 기다림끝에 찾았어요. 골수기증서약을 해주신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께서 제 간절한 부탁에 결심을 해주셨고 며칠전 애타게 기다리던 골수기증 약속을 해주셨어요.
골수이식수술 예정일은 12월 5일... 수술비는 8,200만원이 나왔어요
혼자서는 감당할수없는 너무나 큰 수술비용에 머리속이 하얘지고 정신마저 아득해요
이젠 영영 아이를 살릴수 없다는 생각이 제 머리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아기를 살릴수 있는 코앞까지 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었어요...
엄청난 수술비에 수술비 청구서를 손에 꽉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채 그날밤 밤새도록 울었어요. 태어나서 가장 서러운 날이었어요.
그후 매일 밤마다 아들을 껴안고 흐느껴 울어요...

제 이름은 김수아라고해요
제 나이 올해 19살 창피하지만 미혼모입니다. 현재 대학 1학년 여대생입니다.
저는 1988년 5월 2일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저는 세살짜리 남자아기를 혼자 낳아 키운 철없는 아기엄마랍니다.
저는 고향을 모른답니다. 제 친엄마로부터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기 때문이죠.
원장 선생님1이 발견하셨는데 고아원 정문앞 초록색 큰 과일 바구니 안에 푹신한 모포로
둘둘말아진채 쪽지와 함께 버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생년월일과 제 이름.
젖도 떼지못한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던 저를 버린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엄마(친엄마)는 열일곱 처녀의 몸으로 아기(저)를 낳아 미혼모라는 사회적 낙인과 무관심
냉대 극심한 가난으로 저를 고아원 앞에 어쩔수 없이 버렸다면서 용서받을수 없는 죄를 지어
정말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쪽지는 끝을 맺었습니다. 10살때 원장 선생님께서 건네준 엄마라는
사람의 쪽지를 읽으며 저는 날 버린것을 정당화 하려한다는 느낌을 받아 오히려 증오심만 커졌습니다.
쪽지를 괜히읽었다 생각이 들었고, 엄마라는 존재를 잊고 살기로 했죠. 고아원에 버려진후
같은 처지의 다른 아이들과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세상에 나만 최고로 불행하고 나만 불쌍한 존재로
생각했던 저는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어요. 나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은
저의 큰 착각이자 오만이었죠.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나보다 안타까운
아이들이 있었어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일가친척이 비행기사고로
한꺼번에 돌아가신 아이도 있었고, 교통사고로 엄마 아빠를 모두 잃은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렇다고해도 날 버린 엄마를 용서할수는 없었어요. 지금은 원망하지 않아요.
그냥 엄마를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처음 우리아기가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때
저는 마치 제가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식당(김밥집)에서 김밥을 말며
보증금 150만원, 5만원 짜리 반지하 월세방에 살면서도 오직 아기만 생각하며 일했어요.
그러던 올해초 1월 8일 이제 막 세살이던 아기가 백혈병 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청천벽력 같았어요, 내 아기가 백혈병이라니, 방긋방긋 잘 웃고 엄마 편하라고
크게 울지도 않던 사랑스러운 내 아기가 백혈병이라니, 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어요.
사랑스런 아기에게 백혈병을 준 하늘을 한없이 원망했어요.
당시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무균실에 한달간 입원해야 한다고해서 무균실에 입원시켰는데
무균실 한달 입원비만 1300만원이 나왔어요. 한달만 입원하고 일반병실로 옮기면 된다는
담당의사 선생님 말씀이 당시엔 제 귀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식당일을 해서 하루 컵라면 하나로 버티며 지난 1년간 한푼두푼 모은
870여만원과 일수로 빌린 430만원으로 아이 입원비를 해결할수있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사채였어요. 아기를 살려야한다는
막막한 심정으로 뭣모르고 쓴 사채... 그때부터 고통스런 날들이 시작됐어요.
가족도 친척도 아무도 없던 제가 유일하게 의지할수 있었던 남편 백정우...
정우오빠마저 1년전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동료를 구하려다
철근에 깔려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옮기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죽은 남편의 이름은 백정우. 정우 오빠(남편)와 저는 고아원에서 같이 자랐어요.
오빠역시 어렸을때 친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로 외롭게 자랐죠.
우리 둘은 공통점이 많았아요. 서로 가족하나없이 외롭게 자랐고
서로에게 옆에서 외로울때 옆에서 많이 위로가 되주었어요.
오빠는 1985년 6월 5일생으로 2005년 건설현장사고로 21살의 어린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빠와는 1994년 제가 7살때 처음 만났어요. 당시 오빠는 10살이었고 고아원에 왔어요.
오빠는 10살에 이혼한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았어요. 오빠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96년 겨울
우리 고아원은 유난히 추웠어요. 아니 그해 겨울이 지독히 추웠죠. 어떤 중년신사 아저씨의
손을 잡고 들어서던 오빠의 모습 유난히 슬퍼보였어요. 그렇게 오빠와 만나게 됐고
오빠는 저를 잘 챙겨주었죠. 그후 오빠의 따뜻한 마음씨에 오빠를 많이 따르게 됐고, 점점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뀌었어요. 세월은 빠르게 흘러 6년후 2002년 저는 15살 오빠는 18살이
된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죠. 나무아래에서 오빠에게 "오빠를 좋아해" 라고 먼저 고백했죠.
오빠도 살갑게 잘 따르는 내가 귀여웠는지 "나두 널 좋아해" 라고 했죠. 꺄악~ 너무 기쁜나머지
오빠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오빠 목을 꽉 끌어안자 오빠는 당황하면서도 저를 살포시 안아줬죠.
그날이 제 머리속에는 아직도 생생해요. 제 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어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이었으니까요. 그날 이후 서로를 너무나 아껴주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시간은 바다처럼흘러 3년이 흐른 2005년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오빠는 대학 2학년이 됐어요.
서로 사랑을 확인한 우리 둘은 서울의 1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소박한 언약식을 갖고
비록 우리 둘은 너무 가난해 혼인신고도 못했지만 부부로서 살아가기 시작했어요.
당시 오빠는 2002년 고아원을 나와 2004년초 서울의 대학교에 합격해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저를 고아원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대학 기숙사를 나와 오빠는 우리의 아버지와도 같으신
원장 선생님앞에서 저와함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드디어 사랑을 허락 받았어요. 그렇게
힘들게 허락을 받아 2004년 겨울 드디어 우리는 부부로 살아갈수 있게 되었죠, 2005년 오빠는
대학 2학년에 올라갔으며 대학을 다니며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저는 김밥집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낳을때 오빠는 대학 1학년 20세였어요.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 17살때 아기(아들아이)를 낳았어요.
1학기초 임신 사실을 들켜 학교에서 자퇴당할뻔했지만 저의 뉘우침과 고아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후 3학년까지 3년내내 학년 내내 반성문을 한주의 한번 한달에 4장씩 쓰는 벌을 받았죠.
그해 10월 23일 저는 산부인과에서 2.7kg의 아기를 낳았습니다.
태어났을때부터 병색이 완연해서 걱정이었는데 올해초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말았죠.
아기를 낳은후 우리 부부는 오빠는 오전에 강의를 듣고 오후엔 막노동을 하고 밤엔 아기를 돌봤습니다.
저는 낮엔 고교 수업을 듣고 저녁엔 김밥집에서 김밥마는 일을하고, 밤엔 오빠와 아기를
같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우리부부는 우리아기를 위해 우리부부를 위해 열심히 생활해 나갔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던 2005년 11월 10일 오후 3시경. 오빠가 일하는 건설현장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빠가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믿고싶지 않았어요.
건설현장 사고였죠. 오빠는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어요.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중노동인
막노동을 일부러 골라서 했어요. 돈을 더 주니까요. 몸이 약한 우리 아기를 생각한것 같아요.
2002년 10월 26일 ~ 2005년 11월 10일 4년동안 일요일도 없이 일했어요. 그런데 그런 오빠에게
2005년 11월 10일 사고가 나고 말았어요, 같은조로 일하던 동료를 구하고 오빠는 하늘로 갔어요.
2인 1조로 일했는데 공사건물 꼭대기에 묶여있던 1톤의 엄청난 무게의 강철자재가 공사현장
크레인 기사의 실수로 순식간에 공사건물 바로앞으로 떨어져내려 우연히 그 바로앞을 지나가던
동료를 밀쳐 구하고 오빠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엄청난 무게의 강철자재에 몸 전체가 깔리고 말았습니다.
크레인 기사가 크레인으로 즉시 강철자재를 들어올려 119 구급차가 오빠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곧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오빠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건 '미안해' 세글자 였어요. 그것이 끝이었어요. 오빠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저는 움직이지 않는 오빠를 끌어안고 미친듯이 오열했습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지도 모른채
'미친듯이... 미친듯이... 오빠가 우리 오빠가 죽다니... 그럴리 없어... 그럴리 없어...'
하지만 아무리 되뇌어 봐도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은 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습니다.
오빠의 온몸이 피투성이여도 저는 상관없이 오빠를 끌어안았어요.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요.
오빠의 몸이 차갑게 식자 오빠가 정말 죽었다는것을 깨달았어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 오빠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아기와 제곁을 떠난거였어요.

하늘에 있는 오빠에게...

'오빠!!
자기가 세상을 떠난지 1년이 지났어.
그사이 자기 아들은 5살이 되었고 난치병이라는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어.
미안해. 난 못된 엄마인가봐, 아기를 잘 키우지 못했어 난 빵점 엄마야
자긴 나만의 잘생긴 왕자님이었는데..
나만 바라봐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의 남자였는데..
나만 바라봐주는 법없이도 살아갈 착한남자였는데..
힘들고 외로울때 옆에서 많이 위로가 되주고 힘이 되줄수있는 그런 남자였는데..
사고나기전 전날밤 오빠가 나에게 했던말 기억나?
"우리 수아 웨딩드레스 꼭! 입혀줄게"
"난 턱시도 입고 넌 웨딩드레스 입고 남들처럼 멋진 결혼식 올리자" 했었는데..
눈물이 자꾸 흘러, 1년이 지났어도 어제일처럼 생생해.
마음이 너무 아파, 가슴이 아파서 슬퍼. 가슴이 슬퍼 아파.
오빤 정말 착한 남자였어.. 못된 나 밖에 모르는 바보같은 남자였어.
하지만 나 역시 오빠밖에 모르는 바보야
오빤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으니까...
오빠... 사랑해...'

살고있는 1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 6개월째 월세마저 밀려있답니다.
아기 병원비, 입원비, 항암치료비, 항암제값, 골수검사비등에 빚을져서까지 모두 돈을
쏟아부으니 월세 낼돈도 아까웠어요. 10만원이면 아기 항암제 하나 더 먹일수 있는데
하고 생각이 드니, 차마 월세에 10원도 쓰기가 겁났어요.
11개월전부터 빚더미에 올라앉은 상태였는데 아기 병원비에 한푼이라도 보태기려고
6개월전에 여기저기서 빌렸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나봐요. 6개월 전부터 빚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 버리더니 이젠 월 10만원의 월세도 못내 거리로 나앉게 되고 말았어요.
아침에 월세방에 잠시 들렀는데 집주인 아저씨가 당장 방을 비워달라고 하시네요.
밀린 월세 6개월치 60만원을 주던가 백혈병인지 뭐시긴지 걸렸다는 애하고
함께 거리로 나앉던가 하랍니다. 제가 식당에서 김밥말아 하루 10시간 일하고
한달에 버는돈은 50만원 입니다. 우리 두식구에겐 50만원이 한달 수입의 전부에요.
그것도 월급이 아닌 일당으로 계산해서 받기 때문에 아기 항암치료나
골수검사 때문에 병원가서 하루라도 빠지면 꼭 2만원씩 뺍니다. 지난 11개월간
50만원을 정확하게 받아본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지난 11개월간은 한달에 40여만원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낮에도 5일이상은 아기 항암치료라든가 항암제 복용등 엄마로서 챙겨줘야
할일이 너무나 많았어요, 사실 40여만원으론 아기 항암치료비나 300여만원이
넘어가는 가운데 값비싼 항암제, 입원비, 병원비를 한달에 한번씩 어린 제겐 힘
때문에 요즘에도 계속 빚을 내서 쓰고 있습니다.
악순환이죠. 빚이 빚을 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해도
'조금만 더 이 악물면 아기를 살릴수 있어'
'아기만 살릴수 있다면 산더미같은 빚더미에 나앉는다고해도 상관없어' 이것이
현재 저의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러다보니 결국 월세는 한참 뒷전이 되었고
매달 꼬박꼬박 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기 병간호 때문에
지난 11개월간 병원과 직장(식당)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메일주소는 아기 백혈병 항암치료제인 글리벡을 구하려고 모든 인터넷
검색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검색하다가 우연히 알게됐어요... 정말 죄송해요
매달 치료비만(입원비, 병원비, 골수, 검사비, 식비) 300여만원을 병원에 내는데
제가 식당에서 일해서 버는돈 50만원으론 한참 모자라기에 결국 앞으로도 계속 빚에 빚을내는
생활을 해야만 했어요, 결국 손대서는 안될 사채를 쓰고 말았어요.
치료비를 안내면 바로 치료거부로 이어졌어요, 여기저기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총 원금은 2,500만원이에요, 하지만 사채업자들이 적용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살인적인
이자율 때문에 제가 갚아야 할 총 두배가 넘는 6,000여만원이 넘어버렸어요.
한달전부터는 사채업자들이 폭력배 3 ~ 4명과 같이와서는 아기가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 중환자실까지 찾아와 협박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찾아와서는 빌린돈 6,000여만원을 갚으라며 욕설을 퍼붓고 집기를 부수고
매일 1시간동안 소란을 피우고 갑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일을 당할지 몰라
너무나 무섭지만 우리아기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일하는 식당에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돈을 갚으라며 욕설을 퍼부었어요.
이어 음담패설을 늘어놓더니 자기들이 운영하는 업소(단란주점)에 나와 몸을 팔아 돈을 갚으라며
차마 입에 담지못할 욕설을 1시간동안 퍼붓고 갔어요. 하루도 빼지않고 매일 찾아와서는
온갖 협박과 기물파손을 일삼아 마지막 일자리였던 이곳 식당마저 해고당할 처지에요.
매일 벌어지는 이런 생지옥같은 상황에 점점 지쳐가요, 이 세상에 저 혼자라는 사실이 한없이 외롭기만해요.

그런 약한 생각이 들때마다 저는 아기를 생각해요.
사랑하는 아기,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 사랑하는 내 아기...
고사리 같은 손과 가느다란 팔에 주사자국이 가득 덮여 있는 모습을 볼때면 조용히 구석에서 울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료보험을 적용받으려고 발이닳도록 뛰었지만 의료보험적용은 결국 거부당했어요.
의료보험이 적용되면 수술비 치료비 모두 조금이라도 부담이 덜어질 텐데, 우리아기 병은
의료보험요건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맞는 골수를 찾았는데도 수술을 못하고 있으니
가슴이 타 들어갑니다. 마지막 빚을얻어 골수기증자비용으로 800만원을 내야했어요.
지난 11개월간 전국을 찾아헤멘끝에 힘겹게 공여(기증)자를 찾아 맞는 골수를 찾았지만
더 이상 호소할곳이 도움을 요청할곳이 없었어요,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막혀버리고 만거에요.
물한모금 입에대지 않고 일주일을 굶은채 얇은 옷을 걸친게 전부인 저는 지금의
겨울추위 조차 느낄수가 없어요, 맞는 골수를 찾은지 오늘로 벌써 한달이란 시간이 지났어요
수술조차 들어가지 못한채 대학병원측에선 수술비 수납을 안한다는 이유로 수술예정일을 계속 미루고 있어요.
원래 11월 10일이었는데 15일에서 25일로... 25일에서 다시 12월 5일로...
잡힌 수술예정일은 12월 5일이에요. 병원사무국장님이 말씀해주시고 가셨는데
5일까지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할경우 다시 수술이 연기될수밖에 없다고해요
그렇게 되면 아기 골수이식 수술 성공률은 현저히 낮아지게돼요. 담당의사 선생님 말씀이 더이상
수술을 미루면 아기 생명이 위험하다고해요. 아기의 생존율 10%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다고해요.
"더이상 미루면 아기 생명이 위험하니 꼭 수술해보자" 하시며 반드시 수술받아야함을 다짐 또 다짐받고 가셨어요.
우리아기는 방긋방긋 잘웃고 제가 "미안해" 라고 말하면 말도 못하면서 환하게 웃는
사랑스런 우리아가... 의사 선생님들께서는 아기천사라고 부르신답니다.

항암치료실 앞에서 아들아이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을 들으며
입술을 질끈 깨문채 참으려 했지만 끝내 흐느껴 울고말았어요.. 흑... 흑...
제 몸을 바쳐 한달후 오늘 꼭! 갚을게요.
날이 갈수록 미약해져가는 아기 숨소리를 듣고있으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요
아이계좌에요... 신한은행 110-202-639695
아이의 꿈을 희망을 미래를 이대로 포기할수는 없어요.
희망이라는 따스한 햇살을 비춰주시면 안될까요?
하루에도 7 ~ 8번씩 까무러치는 아들아이를 살려주세요.
희망이라는 이름의 밝은미래도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 아가만 살릴수 있다면 제 자신을... 제 모든걸 버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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