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화 진실보다 더 깊고, 영원보다 더 먼 사랑이 있다.
자정이 넘어서야 지란은 돌아왔다. 코트만 벗은 채 그대로 잠이 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지란에게선
찬 겨울의 바람 냄새가 묻어났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옷 벗고 편하게 자.”
“이제 온 거야?”
눈을 비비며 나는 하품을 길게 했다. 지란은 한숨을 내쉬며 코트를 벗었다.
“두 탕을 뛰려니 힘드네.”
“그러게, 양다리는 아무나 하나.”
“그 양다리 소리가 자꾸 거슬린다.”
“양다리가 분명하니까 거슬리지.”
나는 일어나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옷을 갈아입었다.
“언니가 왔대.”
“언니?”
화장대 앞에 앉아 콜드크림을 잔뜩 묻히고 메이크업을 지우는 지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큰언니 말야.”
“어?”
나는 놀란 눈으로 침대에 걸터앉으며 거울 속의 지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맘인지, 오늘 왔댄다.”
“가족이니까. 평생 그러고 살 순 없지. 잘 됐네.”
“내일 가 봐야 할 것 같아.”
지란의 큰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친정 식구들과는 인연을 아주 끊고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의 남편은 아들 하나를 둔 이혼남이었다. 연애 때부터 집안에서 반대가 아주 심했었다. 하지만 언니는 꿋꿋하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냈다. 가족의 반대가 강할수록 언니의 사랑도 그만큼 강해졌다. 부모도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 날, 언니는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선 그 길로 친정과는 결별을 한 셈이었다. 그게 바로 육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육 년 만에 친정 나들이를 한 것이다.
“혼자 왔대?”
“아일 데리고 왔다더라. 형부는 안 오구. 못 본 사이에 너무 말랐다고, 작은 언니가 울먹거리더라구.
아부진, 눈도 안 마주치고, 앉아서 끊었던 담배만 피워대시고, 엄만 말없이 울기만 하시구. 이 좋은
날에 우리 집, 완전히 초상 분위기다 얘.”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부모님들두 노여움이 좀 풀어지셨을 거야. 어떻게든 잘 풀어야지.
부모하고 자식인데, 원수처럼 살아지겠니?”
“아, 기분 꿀꿀해. 저녁에 현우 만났는데, 내내 기분이 꽝이었어.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뭐가
즐겁겠니? 툴툴 거리는데두 그냥 보내고 왔어.”
지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속이 왜 안 시끄러울까.
“독하고 모질어 우리 언니. 적어도 나한테는 연락 좀 하고 살았으면 좀 좋아?”
“그 맘인들 오죽하겠니? 모진 사람도 그 속은 새카맣게 탔을 거야. 겉만 모질지, 속은 여린 게
사람이다.”
“어쨌든 맘에 안 들어. 안 씻을 거야?”
“씻어야지.”
“오랜만에 우리 같이 샤워나 할까?”
“좋지.”
이 나이에도 벌거벗고 함께 씻으며, 수다를 떨어도 마냥 좋기만 할까. 알몸으로 그렇게 마주 보고
수다를 떨 때면 오히려 더 상대의 마음이 더 진심으로 다가온다. 유년시절의 그 순수했던 마음까지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지란과 나는 홀딱 벗고 함께 샤워를 하거나 때를 밀어주곤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란이 가방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내 들어 보였다.
“한 잔 어때? 현우랑 술 마실 기분이 아니어서, 몰래 한 병 들고 왔지.”
“비스킷 꺼내 올게.”
“남은 치즈 있어?”
“어, 그것도 내올게. 참, 혜나한테 전화 좀 해봐. 어제부터 도통 연락이 안 돼.”
나는 지란에게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가 비스킷과 치즈를 준비했다. 식탁 위에 세팅을 다 마치자
휴대폰을 들고 지란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전화 안 받는대?”
“무슨 일, 생겼나?”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와인마개를 따며 말했다.
“설마, 그 년하고 머리채 잡고 싸운 건 아니겠지? 아님, 성탄절이라구 똘똘이 아빠하고 같이 있나?”
“별일 아니었음 좋겠다.”
지란이 자리에 앉자 나는 와인을 그녀의 잔에 채웠다. 그리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출근 하려면 힘들 텐데?”
“언니 땜에 월차 냈어.”
“그럼 집으로 바로 가지, 뭐 하러 왔어?”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붉은 와인은 처음엔 달지만, 끝은 쓰다. 우리들의 사랑처럼. 그러나 내 인생의 마지막은 처음과
같이 아주 달콤하길 원한다.
“아이가 제법 컸겠다. 그때 네 살인가 그랬잖어. 벌써 초등학교 삼사학년쯤은 됐겠네.”
“우리 언니 고집을 누가 말려. 편애할까봐, 아이도 안 낳는다잖아.”
“언니답지 뭐. 그러기가 쉽니? 난, 니네 언니 존경스러워.”
“미련한 거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얘기라면 존경스러울 수 있어. 가족이다 보니 미련하게만 느껴져. 그 좋은 혼처들 다 마다하고, 시끄럽게 결혼했잖아.”
“언니가 좋으면 됐지 뭐. 남들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언니 인생이야.”
"처음엔 언니 보면서 사랑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가, 이젠 언니 때문에 그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아.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데, 안 들어봐도 빤할 것 같어.”
우리는 앉아서 와인을 한 병 다 비웠다. 그리고선 젖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한 침대에 기어
들어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껴안고 잠이 들었다. 사랑이 이런 우정 같은 것이라면.
바닥이 온통 얼어붙어 일찌감치 조깅은 포기하고, 아침부터 부산하게 대청소를 하겠다가 소란을 피
웠다. 그런 와중에 지란은 집에 갈 채비를 마쳤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가.”
지란이 가고 나자 나는 커튼부터 뜯어 내렸다. 침대 시트를 벗겨 내고, 소파의 먼지를 털어냈다.
나는 마치 욕구불만 상태에 있는 것처럼 먼지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세탁기에서 꺼낸 빨랫감들을
탁탁 털어 베란다에 널고, 말끔해진 거실을 둘러보는데 그때 혜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니?”
대뜸 나는 혜나에게 물었다.
“아이가 입원했어. 그제부터 자꾸 열이 나고 그러더니, 장염이래.”
“많이 놀랬겠다. 연락하지 그랬어? 어느 병원이야?”
“올 거 없어.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낼쯤에 퇴원해도 된다 그러네.”
“병희씬?”
“좀 전에 갔어. 그제 저녁에 아이가 까무러치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전화했지. 오늘 아침까지 병실
에 있다, 조금 전에 출근했어.”
“어쨌든 괜찮다니까 다행이네.”
“어.”
그 순간 혜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한 목소리였다.
“괜찮아?”
나는 무어라 위로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 괜찮아. 아이한테.......아이한테 못 할 짓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갈 것 같아. 일주일 휴가를 내긴 했는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어. 별거 상태라
는 거, 아버지가 아셨어.”
“어쩌니?”
“상심이 크시겠지. 내일 퇴원하면 아버지께 다녀와야 할 것 같어. 다녀와서 전화할게.”
“그래. 기운 내. 약해지지 말구. 어?”
“어. 그럴게.”
혜나와 통화를 끝내고 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불행은 연속성이다. 거듭거듭 슬픔만 자꾸 찾아
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심란해진 마음으로 커피를 뽑고, 식탁에 홀로 앉아 분위기까지 잡았
는데, 엠병. 간밤에 마신 와인 탓에 신호가 바로 온다. 후다닥 욕실로 뛰어가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바지를 내렸다. 난감하게도 한참 항문에 힘을 쓰고 있건만,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 왔다. 망할 놈의
타이밍이란 정말 끝내주게 잘 맞는군. 마음이 조급해져 바지를 올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으로
주방까지 걸어가 휴대폰을 들고 욕실로 다시 돌아와 변기 위에 앉았다. 집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가씨.”
“언니,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집에 좀 와야겠어.”
“왜? 무슨 일 있어요?”
“일단 집으로 좀 와.”
나는 보던 일을 시원스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축제가 끝난 다음 날은 적막하다. 그 열기가 식어 도시는 얼음처럼 차갑다. 벙어리장갑을 벗으며 현
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척한 얼굴로 올케가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무슨 일, 있어요?”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으며 묻자 올케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놀라지마 아가씨.”
“무섭게 왜 이래요 언니?”
그 순간 나는 뭔가 큰 일이 생겼구나 싶은 예감이 들어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할게.”
올케의 손에 끌려 소파에 앉은 나는 가슴이 서서히 떨려 오고 있었다.
“실은 아가씨.”
올케가 망설이자 나는 더욱 두려워졌다.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자 올케가 내 손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많이 안 좋으셔.”
“어디가요?”
“위암이 재발한 지 좀 되셨더랬어.”
느닷없이 한기라도 든 것처럼 몸이 떨려 왔다.
“언제부터에요?”
“두 달쯤 됐어. 간밤에 쓰러지셔서 지금 병원에 계셔.”
“그동안 왜 말 안했어요?”
“어머니께서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 어머니 성격 알잖아 아가씨두. 요즘 오빠가 예민하게 아가씨
한테 그런 것도, 이유가 다 있었던 거야.”
“왜, 매번 나만 바보로 만들어 다들?”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세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올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 엄마,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거야? 우리 엄마부터 시집보내야겠다. 나보
다 자꾸 날씬해지고, 이뻐지면 곤란한데.”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며칠 전의 말을 떠올리며 울고 있었다. 그동안 아파서 그렇게 수척해진 것도
모르고, 다이어트가 무슨 말인가. 나 같은 불효자식이 또 있을까. 어미는 자식의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인지 금세 알아차린다는데, 어찌하여 자식은 그런 어미의 심정을 전혀 알지 못할까.
제 사랑에만 급급하여, 진정한 사랑을 보지도 못하고 산 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나더러 어떻게
엄마를 보라고. 대체 어떻게 보라고.
병원에 도착하고 병실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올케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재촉하
지 않고 서 있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심호흡을 했다.
“언니, 나 괜찮아?”
“괜찮아.”
마음을 진정 시키고 나서야 나는 병실 문을 가만히 열었다.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잠이 든 엄마의 모습
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오빠는 그런 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새벽에 잠깐 깨셨다가 다시 잠이 드셨어. 깨시려면 좀 있어야 할 거야.”
“아침은 어떻게 했어요?”
“아직.”
“오빠랑 같이 식사 하고 와요.”
올케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엄마를 들여다 보다 병실을 나갔다. 나가자마자 나는 울음이 터졌다.
깊게 패인 주름이며, 수척해진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사 바늘이 꽂
힌 엄마의 손등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을 나는 가만히 잡아 보았다.
“왜, 매번 날 나쁜 딸로 만들어? 그러면 엄마 속이 좀 후련하우? 이렇게 앙상하게 마른 것도 모
르고…….나, 살 빠지는 것만 생각하고, 나 아픈 것만 생각하구. 미안해 엄마. 나, 나이 먹는 것만 알
았지, 엄마 나이 먹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살았어. 나 힘든 것만 생각하고 살았지, 엄마 아픈 거 모르
고 살았어.”
엄마는 여전히 평온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한없이 죄스럽기만 했다.
“누가 엄마 마음대로 암세포를 키우래?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우리는 가끔 잊고 산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의 사랑을.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함께
영원할 거라는 착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매번 어리석게도
이성에 대한 사랑만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 사랑이 아니라면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도 있을 내 부모와 내 형제의 사랑을 잊고 산다. 떠난 사랑에 매일 밤
을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그런 나로 인해 내 부모가 걱정과 한숨에 매일 밤을 지새운다는 사실을
너무나 태연하게 잊고 산다. 그 어떤 사랑도 내가 그 사랑의 소중함을 모를 때는, 그 사랑의 존재도
사라진다는 것을 잊고 산다. 어찌하여 모든 사랑을 이렇게 어이없게, 어리석게 떠나보내는 과오를
저지르고 사는가. 진실보다 더 깊고, 영원보다 더 먼 사랑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준 내 가족들의
사랑을 우리는 오늘도 잊고 산다.
마지막 잎새의 베어만을 떠올렸다. 희망을 잃은 존시에게 희망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벽에 마지막
잎새를 매일 그려 넣었던 베어만. 오빠와 올케의 그런 진심이 통했을까. 삼일 만에 엄마는 다시 건강
해졌다. 건강해졌다는 말은, 말 그대로 건강해졌을 뿐 완치가 된 것은 아니다. 다행히 수술은 피할
수 있었고,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식의요법과 가벼운 운동을 엄격하게 지키면 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 온 엄마의 표정이 아이처럼 해맑았다. 병원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할 만도 했다.
“너는 이제 니네 집 가.”
엄마는 성가신 듯 한 목소리로 말하며 코트를 벗었다. 나는 엄마가 코트를 벗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나만 자꾸 왕따 시킬 거야?”
“너보믄 내가 병이 다시 도질 것 같어. 그리고 나, 쉽게 안 죽어. 내 이름이 뭐냐? 최 강자 아니냐?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 죽을 거야. 이 정도쯤은 누구나 다 겪고 사는 일이야. 내 걱정 말고, 니
걱정이나 해.”
“강자씨, 그러니까 이름처럼 강하게 살아 보라구. 이름값도 못 해.”
힘없이 엄마는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를 부축하며 똑바로 눕히고, 이불을 끌어
당겼다.
“최 강자 아직 안 죽었어.”
“알어, 안 죽었어.”
“산이 그리워서도 병원에 못 있겠더라.”
“낼부터 내가 엄마 모시고 산에 갈게.”
“됐어, 그럴 거 없어. 니 올케 있는데 니가 뭐 하러? 그저 감기 몸살 앓은 거야. 유난 떨지 마. 어여,
가. 나 한숨 자야겠다.”
눈을 감는 엄마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오자 올케가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점심 먹고 가.”
“언니, 고마워요. 언니한테 매일 빚만 지고 사는 것 같어.”
“아가씨두. 내가 남이야?”
“나중에 이 빚, 어떻게 다 갚을까 몰라. 우리 엄마, 좀 까탈스러운 거 모르는 거 아닌데, 그래두 언니
가 좀 참아줘요. 내가 나중에 언니한테 잘할게.”
“그 마음만으로 충분해. 나도 부모님 계시는데 그 마음 모를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점심은 다음에 와서 먹을게요. 삼일 째 집에 안 갔더니, 가 봐야 할 것 같어. 삼일 만에 이렇게
지치는데, 언닌 오죽하겠수?”
나는 지치고 고단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땐, 땅거미
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불을 켰다.
시간이 벌써 여섯 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찾아 들고, 혜나에게 전화를 넣었다. 다행히도
혜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추리닝으로 옷을 갈아입고, 그녀의 집으로 넘어 갔다.
“똘똘이는?”
“조금 전에 잠들었어.”
“일찍 자네?”
“낮잠을 안 재웠더니 일찍 곯아떨어지네. 저녁 먹자.”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가 식탁 앞에 앉았다. 보글보글 막 끓인 된장찌개가 허기진 배를 더욱 부추겼다.
“어머닌 괜찮으셔?”
“일단 고비는 넘기셨지. 항암치료는 안 받아도 된다니까, 엄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셔.”
“그러게. 그게 사람 잡지.”
수저를 들어 찌개의 맛을 본 나는 밥을 한 술 뜨며 물었다.
“아버진 뭐라 셔?”
“아무 말도 안 하셔. 그래서 더 불안해.”
“널 믿으신다는 거지.”
“그래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잖어.”
“똘똘이 아빤?”
“조금만 기다려 달래드라.”
혜나는 어이없는 헛웃음을 보이며 수저를 들었다.
“그래서?”
“대답 안 했어. 아무 생각이 없어졌나봐. 이젠 노엽지도 않고, 원망스럽지도 않아. 그저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란이었다.
“나, 혜나 집에 있어.”
그리고선 끊었다.
“온대?”
“어.”
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자 나는 손 사레를 쳤다.
“됐어, 그냥 먹어. 너, 다시 합치고 싶어 했잖아.”
“그랬어. 근데, 그것도 이젠 모르겠어. 몇 개월 동안 같은 문제로 시달렸더니, 진절머리가 났나 봐.
이런 상황이 싫증 나.”
“그때그때, 니 맘 가는대로 해.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그럴려구.”
“너, 준하 기억하지?”
“준하? 니 첫 사랑?”
“지란이한테서 얘기 들었지? 아파트 앞에서 소동 부렸던 남자.”
“어. 요즘 그 남자 만나는 거 맞지?”
“준하 친구였어. 나도 금방 알아보지 못했어.”
“뭐?”
반찬을 집던 혜나의 손이 멈췄다.
“차 세현이라구 들어 봤니?”
“차 세현? 글쎄. 난, 준하 친구들을 별로 본 적이 없잖니.”
“인연이란 게 참, 우습다. 까맣게 잊고 있던 준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준하 소식은 들었어?”
“미국서 산대. 노랑머리랑.”
“국제결혼이야?”
“그런가봐.”
“준하는 결혼 안 하고 살 줄 알았더니. 걘 좀 독특했잖어. 중이 아니라면, 카사노바로 사는 줄
알았지. 여자관계가 좀 복잡하긴 했잖어.”
그때 현관문을 열고 지란이 들어왔다.
“아, 배고파.”
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자 지란이 먼저 주방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앉어. 내가 챙길게. 혜나 넌, 언제 왔어?”
“오후에.”
“어머닌?”
“괜찮으셔.”
공기에 밥을 담아 수저와 젓가락을 챙겨 들고 와 식탁 앞에 앉으며 지란이 혜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똘똘이는?”
“걔도 괜찮아. 지금은 자구.”
“우리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친군가 보다. 불행이 어찌 같이 올까 몰라.”
지란이 가볍게 말하며 수저를 들었다.
“큰언닌?”
“이혼하겠대.”
지란의 말에 나와 혜나는 놀란 눈으로 지란을 보았다. 지란은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밥을 떠 입 안
가득 집어넣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러라 했어. 무릎 꿇고 울며불며 비는데 어떡해?”
“아버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묻자 지란이 뜨거운 찌개를 뜨며 말했다.
“요즘엔 이혼이 무슨 흉이냐? 당장 짐 싸들고 들어 와. 그러시더라구. 작은 언니랑 나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우리 아부지 노망 나셨나 싶어서 말야. 이혼은 서로 얘기가 된 상태였나 봐. 중요한 건, 언니
가 애를 돌려보내지 못하겠다는 거야.”
“언니가 낳은 애도 아니잖어.”
나의 말에 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키운 정도 정이랜다. 나도 애 엄마라 그런지 언니 맘 알겠다.”
“애를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집하구 위자료까지 넘겨주기로 했나 봐.”
지란에 말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 자식을 돈 주고 팔겠다는 거야? 어쩜, 그런 몰상식한 인간이 다 있다니?”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 남의 일 구경 하듯 하고 왔어. 언니 고집을 누가
꺾어? 아이 없음 죽겠다는데. 아버진 거기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씀 없으셔. 엄만, 죽어도 안 될 말
이라고 하시지만.”
“그게 부모 사랑이라는 거다. 언니도 여자이기 전에, 한 아이의 엄마니까.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어. 요즘 세상이 그렇잖어. 자식들을 무슨 짐처럼 여겨서, 서로 맡지 않겠다고 버리듯 하는데
그래도 언닌 정말 존경스럽다.”
혜나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일까. 내게 아이가 아직
없어서 그런지 나는 괜히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게 부모님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끝까지
보듬어 안고, 당장에 다리가 아파 쓰러질 지경인데도 무겁다 하여 내려놓지 않는 게 자식에 대한
사랑인 것 같어. 내가 부모가 되고서도 그 사랑을 잘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더라. 지금도 다 안다
고 할 순 없지만, 내 아이가 자라고 어느새 내 키보다 훌쩍 커버리면, 그땐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되겠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 그거 정말 맞는
말이야. 낳지 않았다고 부모가 아닌 건 아니잖아. 보듬고, 안고, 쓰다듬고, 때리면서 키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혜나의 말에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우리들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침묵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말
하지 않아도 안다. 그 시간이 짧은 반성의 시간이 되겠지만, 이런 날이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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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진도가 좀 나가서 일찍 올립니다.
다음 편은 14일쯤이나 올라 갈 것 같네요.
여전히 날씨가 많이 추워요. 모두 감기 단속 잘하시구, 내일도 홧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