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꽃배달회사에 근무하는 현구에게 부탁해 매일 그녀에게 수레국화를 한다발씩 보냈다. 꽃가게에서 구하기는 힘들지만 선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꽃말이 행복이라고 했다. 선혜는 행복하고 싶다고 했다. 현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적극 돕고 싶다며 전라도 익산의 어느 꽃농원에서 재배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갔단다.
사람들이 이제 그녀와 나의 관계를 눈치챘을 것이다. 난 그동안 그녀 생각을 조금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불편할까봐 그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두었고, 심지어 그녀가 아플때조차 함께 있지 못했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내 인생을 걸 것이다. 단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내 귀에도 그녀와의 연애가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그녀 역시 이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총장님 둘째 딸인 유리는 어릴때부터 알던 동생인지라 미국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는데 내가 대사관에 친구가 있어서 비자 문제를 좀 도와줬더니 소문이 와전되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유리 문제는 한 사람에게 말하고 나니 그 다음날 알아서 그 소문은 전역에 다 퍼져서 굳이 내가 해명하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 역시 말이 많은 동네라니까.
선혜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셔틀버스에서도,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쳐도 눈조차 마주치려고 들지 않았다. 차실장님이 총무과에 들렀기에 커피를 대접한다며 직원휴게실로 모셔갔다.
“과장님이 왜 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겠는데요. 정선생 지금 고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는 또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거 아닌가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꽃을 본체만체하더니 요즘은 꽃이 오면 꽃병에 꽂아서 직원들 책상에 놓아주더라구요. 정선생이 왜 과장님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소문난다고 조심하라고 할땐 그렇게 서운해 하더니 막상 소문나니까 또 시큰둥한건 뭔지..여튼 여자들 변덕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퇴근시간마다 어학당 앞에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날 본체만체 셔틀버스에 올랐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내가 그렇게 보기 싫다면 후문으로 나가서 셔틀버스 타러 가도 될텐데 꼭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정문을 지나서 갔다.
주희를 만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주희 역시 나에게 적대적이었다. 아파트 앞 포장마차로 갔다. 주희는 나와 마주앉기도 싫은 듯 옆으로 삐딱하니 앉았다.
“휘진씨 이제 선혜 그만 놔주면 좋겠어요. 선혜 지난 몇 달 너무나 힘들어했어요. 먹지도 자지도 못했어요.”
“문혁씨가 찾아왔더군요.”
주희는 들고 있던 소주잔을 놓았다.
“선혜 응급실 실려가던 날 링거맞을 동안 제가 문혁씨한테 얘기 했거든요. 전 사실 문혁씨와 선혜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예요. 문혁씨는 진심으로 선혜를 아끼는 사람이거든요.”
“압니다. 주희씨가 나를 싫어하는거. 난 유산된 애가 문혁의 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주희는 벌떡 일어났다.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길 들어봐요. 퇴원수속하러 병원으로 갔을 때 병실 밖에서 주희씨와 문혁씨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혜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주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선혜를 의심하나요? 다른 사람도 아닌 선혜를.. 전 지금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문혁씨가 과도하게 선혜를 아낀다는 것도 인정해요. 하지만 민휘진씨, 이건 아니라고 봐요.”
“네, 다 제 잘못입니다. 그래서 주희씨 도움을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도움인지는 몰라도 전 돕기 싫어요.”
난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선혜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를 주희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진로를 바꿔 행정고시를 보게 된 것도, 선혜가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은 것도 다 선혜를 만나기 위함이었음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전 지금 혼란스러워요. 제가 기억하는 선혜 옆의 고학생은....저희는 그때 그 사람을 고학생이라고 불렀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뿔테 안경에 긴 머리였는데..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요.”
“맞아요. 그땐 공부한다고 머릴 길렀으니까. 안경도 지금과는 달랐고.”
“믿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좋아한 선혜한테 어떻게 그리도 잔인해 질 수가 있는지..물론 배신감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일단 선혜한테 사실 확인부터 해야하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전 선혜와 정말 헤어져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선혜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법적으로는 부부니까 그런 관계라도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선혜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희는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선혜에게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혜는 제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