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정의 대상
장성우는 밀린 업무를 마저 끝내고 퇴근할 생각으로 남들이 책상 위를 정리할 때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겨울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모래알처럼 세찬 소리를 내며 창문에 부딪쳐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겨울은,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는 겨울은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낮에 기온으로 보아 오늘밤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워질 것 같았는데도 눈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런 겨울 날씨가 지겨워 사람들은 짜증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책상 밑이나 사무실 구석에 감춰 두었던 우산을 찾아들고 퇴근을 했다.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방울에서 이경아의 얼굴이 장성우를 향해 웃고 있었다. 순간 그는 그녀를 보고 싶은 충동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끓어올랐다. 그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때 갑자기 번개가 치고 사무실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천둥소리가 장성우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들고있던 수화기를 얼떨결에 내려놓았다가 그런 자신이 우스워 짧게 웃으며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이경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커피잔에 끓는 물을 붓기 위해 커피보트를 손에 든 채 ‘그 괴상한 전화다’라는 확실한 직감 때문에 전화 받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화벨이 여섯 번 울릴 때 커피보트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제발 그 괴상한 전화가 아니기를 빌면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이경아의 목소리는 두려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통화가 끊어지는 딸깍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 남자였다. 자칭 외로운 남자라고 하는.
“휴-!”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으나 상대방이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자 안도감을 느낀 이경아는 30초 정도 수화기를 든 채 서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가 내쉬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오늘은 제발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경아는 커피를 타서 소파에 가 앉았다. 레코드 가게 안은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가 애절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참 벨이 울려서야 전화를 받는 이경아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갑자기 뒤통수에 얼음처럼 차가운 뭔가가 와 닿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장성우는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서 강민지가 그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며 서 있었던 것이다.
“누구와 통화하려던 중이야?”
당황하는 장성우의 태도에 강민지가 두 손을 양 허리에 얹고 다리를 벌리고 선 채 호기심 많은 눈빛을 하고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그녀는 마치 갚지 않는 돈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가 화를 내기 일보직전의 모습 같았다.
“으응, 친구하고…….”
문방구 주인 몰래 학용품을 집으려다 들킨 초등학생 같은 기분으로 장성우는 아무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그러나 얼떨결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생전 영업부 사무실에는 들어오지 않던 강민지였기에 장성우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으면서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퇴근하는 길에 혹시나 해서 와봤어.”
“그러다가 다른 직원이 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장성우는 사내에서 자신이 강민지와 이렇고 저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일로 인하여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책임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뭐, 어때?”
장성우의 염려와는 달리 강민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서서 그를 쏘아보며 단호하고 다소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그녀의 태도였다. 뭐랄까……, 마치 일부러 싸움을 걸려고 작정한 사람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녀는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강민지의 태도에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장성우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장성우가 강민지와 함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 질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그를 그녀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왜 그래? 이제 내가 싫어졌어? 아니, 날 좋아하기나 하는 거야?”
강민지는 팔짱을 낀 채 초승달처럼 가늘게 뜬눈으로 장성우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심문하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장성우는 강민지에게 내심을 들킨 것 같아 머리칼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뜨끔했지만,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하려고 애를 쓰면서 도리어 기분 나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몰라서 물어?”
강민지는 싸움닭처럼 턱을 치켜들고 잡아먹듯이 장성우를 노려보았다.
“…….”
느닷없이 강민지에게 일격을 당한 장성우는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대답을 못하고 바보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강민지의 질문은 장성우를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처음에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농담으로 얼버무릴 계제도 아니고 임기웅변으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냉담한 태도와 신경질적인 표정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오늘은 말 한 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을 못하는 걸 보면 정말 내가 싫어졌나봐?”
강민지는 던지듯이 말하고 나서 허리를 굽혀 쓰레기통 속에 버려져 있던 빈 종이컵을 주워들고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장성우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의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니까 빈 종이컵은 재떨이 대용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너무 기가 막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그녀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낚아챘다. 더구나 사무실 안은 금연구역이었다.
“누구라도 보면 어떻게 하려고…….”
여태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강민지의 엉뚱한 행동에 장성우는 떫은감을 한 입 베어 문 사람처럼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이보다 더 짜증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보긴 누가 봐? 그리고 누가 보면 어때.”
강민지가 다시 담배를 집으려고 하자 장성우는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목젖까지 거듭 치밀어 올라오는 욕설을 가까스로 목구멍으로 삼켰다.
장성우는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그 열불을 밖으로 내뿜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간 그녀와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만일 싸움을 할 경우 그녀의 현재 감정으로 봐서는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 같아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아니, 싸우더라도 여기서는 싫었다. 어쩌면 아직 퇴근하지 않은 타부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가 삽시간에 퍼질 게 뻔했다. 그건 장성우가 원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우리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장성우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애써 참으며 분위기를 바꿀 의도로 사뭇 애원하는 목소리로 강민지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난 사람처럼 그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원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이 아닌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몹시 당혹스러워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무슨 낭패를 당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얄팍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성우는 강민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녀를 살짝 안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눈을 치켜 뜨고 있던 그녀는 그의 입술이 자신이 입술에 닿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을 빨면서도 그는 성욕 같은 것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해…….”
장성우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말했다. 너무나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다른 적절한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해……, 정말이야?”
강민지는 장성우가 한 말을 되씹더니 짐짓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에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그녀한테 처음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지 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장성우는 말을 하고 나서 강민지의 눈과 마주칠 경우 그녀가 자기 마음 속을 훤히 꿰뚫어 볼까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만약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언젠가는 영화배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뱉은, 너무 완벽한 장성우의 거짓말은 진정으로 강민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장성우의 거짓말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금방 강민지의 얼굴에 그가 느낄 만큼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그녀는 그 동안 그를 만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장성우는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강민지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건물을 나와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택시를 잡아탈 때까지도 운 좋게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머리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털며 택시 뒷좌석에 앉은 장성우에게 기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삼성 전철역으로 가 주세요.”
“아니에요. 망우리 금란교회 앞으로 가 주세요.”
대뜸 강민지가 장성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늘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삼성동의 일식집 동해에 가서 생선회를 먹으며 소주를 마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망우리로 가자는 그녀의 말에 그는 당황하면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그의 원룸이 있는 동네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왜?”
오늘, 예전과 같지 않게 예사롭지 않은 강민지의 태도에 아무래도 곤혹스런 일이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든 장성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번에 그녀의 방문을 허락했던 걸 후회했다.
“성우 씨 원룸에 가고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강민지의 말을 듣는 순간 장성우의 머릿속이 정전이 된 것처럼 깜깜해져버렸다. 역시 그의 짐작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학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칠판에 쓰여진 난해한 문제를 나와서 풀라는 지적을 당한 학생처럼 고뇌의 빛이 가득히 차 올랐다.
원룸 한쪽 벽면에 이경아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되어 있는데, 그걸 강민지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성우는 거절할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선뜻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뜸을 들인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왜, 가면 안 돼?”
난감한 표정을 하고서 차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장성우의 옆얼굴을 가자미눈처럼 가늘게 뜬눈으로 쳐다보며 강민지가 물었다.
“지금은 말고 다음에 가자.”
장성우는 놀이공원에 놀러 가자고 졸라대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왜?”
강민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묻고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집안이 개판이야.”
장성우는 언뜻 적당한 핑계를 생각해내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척 궁색한 핑계였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장성우에게 그 정도의 거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강민지였다.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냉기마저 감도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것처럼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
강민지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아 장성우는 입을 꼭 다물고 슬그머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덧 택시는 비에 흠뻑 젖은 잠실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왜 이러 지? 이게 아닌데……. 장성우는 강민지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쩔쩔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렇게까지 쩔쩔매는 자신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데리고 원룸으로 들어가서는 절대적으로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장성우는 곰곰이 이런 저런 궁리를 해봤지만 불행하게도 신통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야단 맞을까봐 엄마 눈치를 살피는 장난꾸러기처럼 옆에 앉은 강민지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얼굴에 드러낸 표정으로 봐서는 절대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장성우가 강민지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궁지에 내몰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답답하고 짜증스럽고 불안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라도 피워야 할 것 같아 빗방울이 들이치지 않을 정도로 차창을 약간 내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차안에서 피우지 말고 참았다 나중에 피워.”
강민지가 담배를 피우려는 장성우의 옆구리를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이미 그녀에게 기선을 제압 당한 그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어 불을 붙이려다 말고 마지못해 담배를 다시 갑 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현 처지가 속된 말로 ‘엿 같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마침내 택시는 망우리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금란교회 맞은 편에 있는 육교 밑에 멈춰 섰다. 육교 밑에는 장거리를 뛰기 위한 경기도 택시들이 한 줄로 길게 주차하고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낼게.”
강민지가 먼저 핸드백을 열고 돈을 꺼내려고 하자 장성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제지하며 짜증이 섞인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내가 낼게.”
강민지가 장성우의 손을 뿌리치며 돈을 꺼내들었다. 그는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낼게.”
“아냐. 내가 낼게.”
탁구공을 주고받듯 택시비를 서로 자신이 내겠다고 팽팽히 맞섰지만 장성우는 도저히 강민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택시비를 지불하는 동안 먼저 택시에서 내린 그는 자신이 앞으로 당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에라,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식의 자포자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없는 이상 정면 대결로 부딪혀 볼 수밖에……. 그렇게 라도 일단 결심을 하고 나자 집으로 걸어가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담담해질 수 있었다.
그새 비는 그쳤지만 도로변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이 바람에 흩날려 장성우의 얼굴을 차갑게 때렸다.
“성우 씨!”
앞으로 벌어질 상황 때문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앞장서서 언덕길을 묵묵히 걸어 올라가는 장성우를 강민지가 불러 세웠다.
“왜?”
걸음을 멈춘 장성우가 다소 불안한 눈길로 강민지를 쳐다보았다.
“나하고 같이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싫어?”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보고 선 상태에서 강민지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
강민지의 말을 못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을 하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는 것 같아 뭐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자 장성우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음에 가기로 해.”
장성우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갑작스럽게 마음이 바뀐 강민지는 말을 꺼내면서도 섭섭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미안해. 아까도 말했지만 집안이 너무 지저분해서 그래.”
마음의 여유를 찾은 장성우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강민지의 마음이 다시 변할까봐 재빨리 몸을 휙 돌려 올라오던 길을 내려가면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한바탕 격정을 치른 것처럼 몸에 기운이 쭉 빠진 장성우는 배고픔을 느꼈다. 그제야 그는 오늘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실 정도의 시간 여유조차 없을 만큼 벅찬 일과 때문에 점심을 굶었다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입맛이 달아나 강민지의 의견을 물은 뒤 통닭 한 마리와 맥주를 마시면 그럭저럭 요기는 될 것 같아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손님이 없는 호프집은 조명마저 어두워 썰렁한 기분을 느끼게 했지만, 지친 몸으로 집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진 장성우는 통닭과 맥주를 주문하고 강민지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근심이 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장성우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으며 강민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무척 조심스러워하며 물었다.
“……, 집에서 결혼하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서 강민지가 다섯 박자쯤 쉰 다음 말했다.
“결혼?”
별안간 결혼이라니,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강민지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 장성우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며 놀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
강민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갈증을 느끼는 듯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장성우는 오늘 그녀가 자신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동안 강민지와의 만남은 오직 원천적 본능을 즐기기 위해서 만났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결혼한다는 얘기를 꺼내니까, 왠지 모르게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면서 배신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그녀를 사랑했다는 게 아닌가.
장성우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마땅히 강민지의 결혼을 축하하고, 그녀를 떨쳐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춤을 출 정도로 좋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내뱉은 결혼이라는 말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뭐랄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 주기엔 아까운 그런 고약한 심보는 아니었다.
“누구……하고?”
필터까지 타 내려온 담뱃불을 유리로 된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묻는 장성우의 목소리엔 약간의 떨림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는 갈증을 느끼는지 거품이 다 빠져 버린 맥주를 벌컥거리며 냉수 마시듯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석 잔을 연거푸 마신 그는 술기운이 올라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아빠하고 친한 친구 아들이 있는데 그 사람하고 하래.”
순식간에 강민지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곧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뭐 하는 친군데?”
빈 잔에 금방 찰랑찰랑 넘치도록 맥주를 채운 장성우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성우 씨는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그게 중요해?”
그래도 관심을 가지고 한 말이었는데, 강민지는 화가 난 듯 눈썹을 한 번 치켜세우고 장성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경질적으로 변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장성우는 마시려던 맥주 잔을 그대로 손에 든 채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강민지는 퉁퉁 부은 입술을 다물었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고, 장성우는 계속해서 맥주를 천천히 마시면서 한숨처럼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필터까지 타 내려온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우리 결혼해.”
갑자기 입을 연 강민지가 ‘결혼’이란 단어에 마침표를 찍듯 단호하게 힘을 주며 말했다.
“결혼?”
대뜸 결혼하자는 강민지의 말에 또 한 번 깜짝 놀란 장성우는 믿어지지 않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처연하고 절실함이 배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결코 가볍게 간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우린 결혼할 수 없어’라고 지금에 와서 진실을 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악화되어 있었다.
산 너머 산이라고, 가까스로 한시름 놓았구나 싶었더니 강민지는 서서히 목을 조이듯 장성우를 긍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일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를 난처한 지경에 빠져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혼란스러워진 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에게 난감해 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섰다.
장성우는 일단 대답할 시간을 얻기 위해 금방 담뱃불을 껐으면서도 다시 담배로 손을 뻗었다. 마치 짓궂은 남자아이로부터 ‘여자들은 아기를 어디로 낳아요?’라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처녀 선생님처럼, 그는 좀더 냉정히 생각해 본 다음에 적당한 구실을 찾아 대답해야 했다.
“그래, 우리 언제 결혼할까? 내일이라도 당장 할까?”
계속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수만 없어 담배연기를 몇 번 길게 내뿜고 난 장성우는 절실한 심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강민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는 진실이 아니면서 진실인 것처럼, 속은 어떻든 겉으로는 되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직 이 자리를 모면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고 말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연 장성우의 ‘결혼하자’는 말 한 마디에 강민지는 답답하고 무겁고 우울하고 그래서 짜증이 나고 이런 것들이 뒤섞여 가중된 불안감이 잠깐 타올랐다 꺼지는 성냥불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다.
사실 강민지는 자신이 무모하게 장성우를 다그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쉽게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하겠다’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강민지는 결혼을 서두는 부모의 강요에 위기감을 느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장성우를 만나면서 오늘처럼 그와의 관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아니 설혹 있었다 해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당장 결혼하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기쁨으로 부드럽게 허물어져 내렸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를 봐서 우리 아빠한테 인사드리러 가자.”
“지금 당장 아빠 친구 아들과 결혼하라고 한다면서?”
“내가 알아서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
강민지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표정도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장성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은 꺼진 셈이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이러다가 정말로 강민지와 결혼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결심을 해야 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이별의 그림자가 자신과 그녀 사이로 다가왔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호프집에서 나온 장성우는 강민지를 데리고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싶은 열망에 빠진 두 사람은 객실에 들어서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허겁지겁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금방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랑해.”
강민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장성우를 껴안았다.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가 온몸으로 느껴지자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길 같은 욕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