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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14. <외뢰인>

스토커 |2007.03.23 10:51
조회 532 |추천 0

의뢰인

  오승구는 사무실로 찾아온 박철승을 반갑게 예의를 갖추며 맞이했지만 그의 얼굴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박철승은 남의 궂은 일이나 험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의 농가에서 축사를 돌보고 있으면 딱 어울릴 법한, 그에게서는 뚝배기 된장국처럼 고향 냄새가 풍겼다.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찾아뵈어야지요.”

  오승구는 악수를 나누면서도 박철승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 못마땅한 기색이 완연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런 오승구의 마음을 꿰뚫어 본 박철승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내심을 들키자 당황해진 오승구는 커다란 동작으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은 했지만 미심쩍은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거래처 인쇄소인 김승현 사장의 소개로 일을 의뢰한 이상 박철승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일이므로 아무에게나 일을 의뢰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박철승은 왕년의 형사 출신으로 김 사장의 고향친구였던 것이다.

  “제가 해드려야 할 일이 무슨 일입니까?”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소파에 마주 앉으면서 박철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나쁜 기분을 버리지 못한 목소리였다.

  “지금 제 뒤를 누군가 미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까 합니다.”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짐작이라도 가는 데가 있으십니까?”

  박철승이 오승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글쎄요……?”

  오승구는 도저히 짐작을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곧이곧대로 말해 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될 일이 아닌가.

  오승구는 이경아와의 관계와 그 동안 두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박철승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까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박철승을 소개해준 김 사장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입을 벙긋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모두 까벌리게 된 것이다.

  박철승은 큰 상자 속에 작은 상자가 있고, 그 작은 상자 속에 또 다른 작은 상자가 계속해서 들어있는 상자 속을 열어 보는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잠자코 오승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설명을 끝낸 후 박철승의 질문에 대답하는 식의 보충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오승구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무덤에 갈 때까지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언약을 단단히 하고, 거기에 따르는 착수금을 편지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일 처리하는 건 저에게 누워서 떡 먹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그런 일은 빵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아주 쉬운 일이었다. 박철승은 자신 있는 듯 여유 만만한 웃음을 머금고 식은 커피를 냉수 들이키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자기한테 잡히는 순간에 그 사람은 박살이 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아까 저와 한 약속,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 오승구는 다시 한 번 다짐을 주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박철승이었다.

  “사장님께서는 저의 고객이십니다. 저는 고객의 비밀을 지켜드리는 것과,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착수금이 담긴 편지봉투를 가죽잠바 안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무실을 나가는 박철승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오승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그는 그런 일을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게 됨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장성우는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나 몹시 피곤한 탓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정신 없이 일했기 때문에 몸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뒤늦게 간신히 자장면으로 때운 그였다. 이런 일이 벌써 며칠 째 계속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이경아에게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일이 쉽게 끝날 줄만 알았는데 오승구와 이경아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보낸 사진이 효과를 못 본 것은 물론이고, 날이 흐르면 흐를수록 장성우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감에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장성우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이 들어 먹힐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오승구와 이경아가 끝까지 헤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 어떤 방법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납치해 멀리 도망가지 않는 이상, 그를 죽이지 않는 이상, 뾰족한 방법이 없는 장성우의 얼굴은 끝없는 절망으로 물들었다.


  가로수 뒤에 몸을 감추고 레코드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이경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박철승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먹이를 앞에 둔 강아지처럼 입을 벌린 채 군침을 흘렸다. 바람난 남편을 미행하면서 현장을 덮치는 일은 지겹도록 해봤지만, 이번처럼 바람난 남자의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또한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박철승의 머릿속에 비디오 테이프를 집어넣은 것처럼 벌거벗은 오승구가 벌거벗은 이경아를 껴안고 침대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뒹구는 장면이 담긴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복도 많은 사람이지……, 질투를 하면서 그는 자신도 그녀 같은 미녀와 한 번만이라도 자 볼 수 있다면 원도 없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엽이 고장난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박철승의 눈은 이경아에게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운만 따라 준다면 오늘 안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일 테고, 하여튼 그는 이번 일이 쉽게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성거리며 이경아를 지켜본다는 건 무리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었다. 현재로서는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그녀를 지켜보던 박철승은 레코드 가게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를 찾기 위해 도로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안성맞춤으로 맞은 편 건물 2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건물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깨끗한 건물이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바로 그 커피숍에서 장성우가 창가에 앉아 박철승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였지만 30분이나 넘게 레코드 가게 안을 기웃거리는 박철승이 왜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는지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를 잡기 위해 오승구가 사람을 고용했다는 것을.

  장성우는 자신이 아주 위험한 살얼음판 위로 걷게 되었다는 섬뜩함에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자신을 보호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장성우는 아무래도 일진이 좋지 않아 오늘은 일찍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카운터에서 커피값을 지불하고 나서 문을 밀치려던 장성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팔을 뻗어 손으로 문을 밀치려는 순간 먼저 문이 저절로 열려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앞에 정면으로 마주친 남자의 얼굴과 마주치고서였다.

  레코드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남자가 틀림없었다. 처음에 당황해 머뭇거리던 장성우는 얼른 표정을 감추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혹시나 자신을 남자가 눈치채지 않았나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지만 남자는 커피숍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급하게 건물을 빠져나와 마음의 여유를 찾은 장성우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감돌았다. 그 남자가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성거릴 줄 모르는 자기를 잡기 위해 커피숍 창가에 앉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에, 신이 도와주는 것 같은 즐거운 마음도 들었다.

  커피숍에서 나온 장성우는 지하철역내로 들어가 다시 반대편 출구로 나왔으나  그 남자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장성우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아무래도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세월만 보내면서 머뭇거리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되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가장 효과적인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마구잡이 뒤엉킨 혼잡스러운 도로만큼이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장성우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 이경아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으면 모를까, 아무리 첫사랑의 여자라고 하더라도,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유부남과 배맞아 놀아나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마저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경아에게 홀딱 빠져 올가미에 걸린 토끼처럼 도망치거나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된 장성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불쑥 장성우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 우연히 을지로 3가 지하철 역내에 있는 화장실에서 만난 홍경래가 ‘내가 있잖아’라고 큰소리치며 파고 들어왔다.

  그래, 그거야. 오승구가 나를 잡기 위해 사람을 고용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되는 거야. 이는 이, 눈은 눈으로 대적할 수밖에. 내 힘으로 안되면 다른 힘이라도 빌릴 수밖에. 온갖 못된 짓을 하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놈이지만 장성우는 이번만큼은 홍경래를 믿어보기로 했다. 홍경래는 자기 자신에게 이익을 안겨다주는 일은 절대 사양하지 않고 밀어붙일 위인이었다.

  그러니까, 열흘 전이었다. 충무로에 있는 대리점에서 일을 마치고 2호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을지로 3가까지 걸어가 지하철역내의 화장실을 지나칠 때, 장성우는 그런 곳에서 홍경래를 우연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성우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줄곧 같은 학급이었던 홍경래는 그에게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만나서는 안될 작자였다. 그런 작자가 화장실에서 마악 나오는 길이었고, 그는 화장실 앞을 마악 지나치는 길이었다.

  당시 교내에서 싸움깨나 한다는 놈들 중에서 일곱 명이 모여 ‘칠성파’라는 폭력서클을 조직했는데, 그들은 공부는 물론이고 머리를 써야하는 일은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공부와 상관없이 단순한 머리를 굴린 적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급우들의 용돈을 갈취하기 위해서였다.

  칠성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홍경래에게 샌님인 장성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찍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많은 용돈을 갖다 상납해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작자를 고향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그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기습적으로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야, 이거 성우 아냐!”

  “…….”

  장성우는 너무 얼떨떨한 현실 앞에서 입을 벌리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홍경래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사람 마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볼 정도로 큰소리로 반가워하면서 그의 두 손을 맞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초등학교 때부터 또래아이들보다 몸집이 컸던 홍경래답게 지금도 장성우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보였고, 이마엔 칼자국 같은 것이 남아있어 아무리 8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를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장성우는 중학교 때처럼 찍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홍경래가 잡아끄는 대로 가까운 커피숍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성우 너,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금방 널 알아볼 수 있었던 거야.”

  “너도 그래. 모습이 옛날 그대로야.”

  장성우의 목소리엔 홍경래를 경계하는 듯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어디야? 그렇지 않아도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애들한테 네 소식을 들은 적은 있었어.”

  “무슨, 애들이 쓸데없이 과장해서 떠들고 다닌 거지. 그런데 너는?”

  홍경래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여유를 찾게 된 장성우는 지금도 그가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죽잠바와 청바지 차림인 그에게서는 여전히 깡패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나야, 개 버릇 남 주니 배운 게 도둑질인데.”

  그리고 홍경래는 사채업자들과 손을 잡고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고 나서 자신의 명함을 한 장 꺼내서 장성우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주)미래사’라는 매우 그럴듯한 회사명과 ‘상무 홍경래’라는 직책과 이름이 전화번호와 함께 적혀 있었다. 그 나이에 상무라니, 해결사만 아니라면 그는 무진장 출세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너는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전화해.”

  그렇게 말을 하면서 홍경래는 자신의 직업을 매우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날 장성우는 커피숍에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약 20분 가량을 홍경래와 얘기하다 헤어졌던 것이다.

  홍경래의 말대로 그의 도움을 받을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장성우는 이렇게 빨리 그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줄 몰랐다. 그런 자신이 우스워 그는 피식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지갑 속에 넣어두었던 그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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