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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의 전설이라면...[11편]

로렐라이 |2003.05.05 12:55
조회 282 |추천 0

병원에서 저녁까지 해결한 은수는 곧바로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시커먼 어둠과 숨소리마저 다 들릴듯한 고요한 정적이 집안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소리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정화는 아마도 많이 늦을 모양이었다.
은수는 거실의 불을 다 켠후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 한병을 꺼내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낮에 민하로부터 받은 선물을 뜯기 시작했는데 포장지 위에 꽃은 없었다.
포장지에 대각선으로 누워있던 그 백합은 시들기 전에 떼어내선 병원 탈의실 한켠에
꽂아두고 나왔던 것이다.
금색 종이를 다 벗겨낸 은수는 그안에서 자기가 평소에 즐겨 피우던 담배를 투박하고
어설프게 그려넣은 네모난 상자가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뭘 이런걸 만들었담!!'
그리고 뚜껑을 열고 그안에 가득담긴 은단이랑 은단껌을 보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한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이 들어찬 그것들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녀는 그중에 은단껌 하나를 꺼낼려고 하다 정사각형으로 얌전히 접힌 연두색 쪽지가 눈에
들오자 그것부터 먼저 펼쳐 보았다.


이세상엔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늪지대가 있는데 그곳에 한번 빠지게 되면
절대 살아선 나올수가 없답니다...
살아 나올수 있는 방법은 오직하나....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랑을 이루는 수밖에 없대요... 되도록 아름답게....
근데 어쩌다 내가 지금 그 사랑의 늪에 빠지고 말았어요...
날 이 늪에서  살려낼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당신밖에 없는데...
어때요? 내가 내민손을 잡아줄수 있나요?


그리고...
웬만하면 담배 끊던지...아니면 줄여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사랑하는 당신만큼은...
건강하게 아주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니까....

담배 생각 날때마다 이상자 열어봐요...

                                              -민하-

 

 

은수는 파란색 볼펜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그 짧은 편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한 선물이었고 또 이런건 남자보다는 주로 여자가 자기 남편이나
애인에게 선물하는 종류일텐데 그녀는 그 모든걸 떠나서 그 쪽지하나에 감동하려 했다.
유치하고 좀 웃기긴 하나

메말랐던 가슴에 따뜻한 비가 내려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이런 선물을 받는다면...그것도 괜찮은 이성에게서 이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는다면 그순간 만큼은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것이다.
은수는 은단껌 하나를 꺼내 씹어볼까 하다가 그냥 뚜껑을 덮었다.
쪽지에 적힌것처럼 단지 담배생각이 날때마다 열어볼 작정이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다시 피우기 시작한 이 담배를 정말 영원히 끊을수 있을련지....
그녀는 남은 쥬스를 마저 마신후 다시 옷을 챙겨입고 아무도 없는 집을 나섰다.
무작정 민하에게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은수는 수술실 입구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던 민하를 떠올리며 그냥 그렇게 돌려보냈던게 
못내 맘에 걸렸다.
그래서 결국 아파트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점에 들렀고 중간 크기의 통에다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담아 포장을 부탁해서 카페까지 차를 몰고갔다.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카페이름... <블루노트>
은수는 카페 근처에 주차를 한후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신나는 음악이 흐르는 작은 무대위에 그전엔 보지 못했던 어떤 밴드가 자리해
있었고 그앞에서 하늘색 남방에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민하가 그 반주에 맞춰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이 그녀의 시선에 잡혔다.
그는 Let's twist again을 부르고 있었다.
은수는 잠깐 멈춰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편해보이는 구석자리의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카페의 무대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며 노래하는 민하 때문에 더 좁게 느껴지는 저공간...
그리고 그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민하는 노래하느라 은수가 카페안에 들어온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바로 이어서 조지마이클
의 Kissing a fool을 불렀다.
은수는 달콤하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그 팝송을 들으며 노래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민하를 새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된건 그 카페 분위기도 한몫 했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
이라도 뭔가에 몰입해 있을때 만큼은 빛이나게 마련인것이다.......
한편 은수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민하는 어느새 노래를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얼음을 띄운 물잔을 들고 계산대 뒤로 보이는 커튼속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대신 밴드의 연
주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저 초라하고 작은 무대에서.... 이렇게 몇명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앉혀놓고도 마치
자신의 모든걸 쏟아붓듯 열정적으로 노래를 마친 민하를 보며 그 어떤 유명한 가수에게도 
찾아볼수 없었던 강렬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쓰러져 가는 여린 식물들 조차 생기를 찾을듯 신선하고 촉촉한 그 목소리라니...
그녀는 대화할땐 미처 몰랐던 민하의 또다른 목소리를 그의 노래에서 찾아낸듯 했다. 
그리고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나타날까지 그저 기다릴
생각이었다.

민하가 수술실 앞에서 그랬던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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