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그냥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붕 떠서 어떤 아득한 숨결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 네, 아주 예전부터 이유리씨를. 아무튼 이제 준비되셨나요?”
“ 뭐가요?”
“ 이제 나와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시작해야하는데?”
난데없이 유리에게 알고 있었다고 말한 제이슨은 다시 한번 태양이 아이스크림을 녹일 듯한 미소를 띠며 유리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흠, 아닌 것 같은데요.”
제이슨은 고개를 갸우뚱 멍하니 붕 뜬 유리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리씨가 지나치게 노력하실 필요는 없어요. 시차 적응도 있고 여러 가지로 힘드실 것 같네요. 크리스마스 0시의 파티는 유리씨의 환영파티였을 뿐이에요. 앞으로 유리씨가 나와 함께할 시간은 많아요.”
제이슨이 손을 탈칵하자 센터 정면에 주차해두었던 은빛 리무진이 다시 달려왔고 도착한 리무진은 스텝 중, 덩치가 큰 남자 한명에 의해 도어가 떡하니 열렸다. 유리는 열려진 도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리무진에 올랐다. 리무진에 오르자 서울에서부터 입고 온 유리의 빨간 코트가 그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카메라 플래쉬는 계속 찬란하게 따라 붙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유리 옆에 가까이 앉은 제이슨은 리무진 바에 준비된 레몬 빛 도는 홍차 한잔을 유리에게 건넸다.
홍차를 건네받으며 유리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리무진에 오를 때까지 유리가 제이슨과 계속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붕 뜨고 정신이 없어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유리는 제이슨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살짝 얼굴을 돌려 아주 쪼금 열린 리무진 차창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얼굴을 식혔다.
리무진 안에는 가로 막힌 앞 칸의 운전기사 외에는 유리와 제이슨 단 둘 뿐이었다. 그나마도 앞 칸에서는 뒷 칸이 보이지 않아 거의 제이슨과 유리 단 둘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으로는 드라마 촬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세트들은 무슨 시트콤인지 기억이 잘나지는 않았지만, 유리에게 익숙해보였다.
“ 홍차 고마워요.”
“ 재료는 모르지만 편안해지죠.”
“ 비행은 어땠어요?”
“ 수면안대 때문에 밤새 깜깜했어요.”
홍차를 건네받은 유리는 얼핏 보이는 제이슨의 조각 같은 시계에서 얼핏 빗겨간 크리스마스 0시를 확인했다. ‘ LA까지 10시간, 도착하자마자 마이너스 16시간.’ 서울에서 출발 전 수현이가 계산해준 시간과는 차이가 많은 시간이었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마스 0시에 시간을 딱 맞추셨어요?”
“ 에어울프는 영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죠!”
“ 그럼, 나를 안다는 것도?”
“ 패쓰워드, 솔라리스도 역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죠!”
제이슨은 유리의 모든 질문에 저음의 똑똑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의 용모만큼 매력 있게 유리에게 말했다. 그래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던 유리는 그만 바보같이 얼굴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제이슨의 처음부터 자기를 알았었다는 말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그가 말하는 영화 제목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럼, 내가 유리씨에 대해서 한번 말해 볼께 요. 성명 이유리 BIRTH 1981. **. **. IN KOREA 포지션 IT 전문가!”
“피! 그건 내 프로필이잖아요. 이벤트 참가하려고 사이트 회원 가입 때 입력한 내 개인정보란 말이에요.”
“글쎄요, 내가 그만큼만 알까요?”
“다 왔네요.”
어느새, 어둠 속 은빛 리무진이 멈추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슨과 함께한 유리는 LA 최고의 호텔 ‘비버리즈힐즈 힐튼’에 도착하였다. 비버리힐즈 힐튼은 매번 아카데미가 열리는 곳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부터는 코닥극장에서 열렸다고 하지만, 호텔의 국제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어둠 속 크리스마스의 불빛들은 하나하나 살아나 더욱 환하다 못해 강렬해지고, 도착한 호텔에는 기다렸던 호텔 도어맨이 리무진 도어을 열어 주었다. 유리는 도어맨에 의해 열린 리무진 카도어를 나와 새하얀 건물의 호텔에 내렸다.
그 다음은 착착이었다. 한 발짝 앞선 제이슨의 걸음걸이에 따라 유리는 호텔 문을 들어선 유리는 엘리베이터를 쭈욱 타고 올라섰다. 쭈욱 타고 올라선 곳은 굉장한 곳이었다. 말로만 듣던 키가 없으면 룸도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를 수 없다는 스위트룸이었다.
“ 와우!”
유리는 나른한 기운에 처음 리무진에서 내렸을 때와 같은 다소 촌스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그런 유리를 제이슨은 귀엽다는 듯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지금은 피곤하시니까 잠시 잠이 드셨다 다시 만나요.”
그렇게 말하곤 유리에게 새카만 슈트의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 잠깐만요?”
유리는 웃음이 나왔다.
“ 믿을 수가 없어요. 진짜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나요?”
“ 앞으로 이유리씨와 나, 딱 세 번의 데이트가 있을 거에 요. 아마,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캘리포니아 바다와 같이 펼쳐지겠죠?”
제이슨은 다시 한번 뒤돌아서며 말했다. 어쨌든 그도 한번쯤은 만나고 싶은 그녀였다. 또 역시 나였다.
“ 그럼, 굿나잇, 이유리씨!”
홍차의 레몬 향기는 제이슨이 벌어진 스위트룸에 바로 연결된 호텔 엘리베이터 문을 나선 뒤 유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진동을 하고 유리는 취한 레몬 향기에 잠시 커다란 침대에 덩그러니 몸을 눕혔다.
홍차의 레몬 향기에 취한 유리는 그대로 핸드폰으로 서울의 수현이에게 전화를 날렸다.
“ 나야!”
“어머, 이유리. 너 엄청 떴더라! 어쩜, 실물보다 그렇게 예쁘게 나왔니? 질투가 나서 계속 못 보겠더라.”
핸드폰에 바로 연결된 수현은 유리에게 별 얘기를 다했다. 서울에서는 FTA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표명이 있었고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유리가 도착한 미국 LA 반대 측 동부에서는 한 남자 대학생의 총기 난사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예전엔 모두가 행복해도 유리만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엔 반대였다. 바로 수현이 말하는 유리의 데이트이벤트 뉴스에 올랐던 일들이 타인의 일들과 관계없이 설레고 즐거웠었다.
“어머, 그랬어. 평소에 나 사진 안받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유리 너 누구 놀리니? 유명인이라고 함께 했다고 너도 유명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알았어. 내가 출연하고 내가 못 보아서 그러는 거야. 또 다행스러운 건 제이슨이 재미교포 출신이라서 그런지, 한국말을 엄청 잘하더라고. 용호말대로 앵벌이 출신은 아닌 것 같았어. 너희들 크리스마스는 어땠니?”
유리는 수현의 짜증에 구두를 벗고 침대 위를 한바퀴 굴러 보았다.
“말도 마! 너 떠나고 용호하고 함께 사무실로 다시 내려가 남은 맥주를 다 마셨었어. 그랬더니 크리스마스가 금세 가버리더라. 용호가 그냥 좀 삐졌었거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크리스마스도 몇 시간 안 남았다. 아고 졸려.”
“나도 졸려.”
유리는 수현이와 함께 핸드폰 폴더를 톡 닫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서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유리는 머리가 굉장히 길었다. 너무 길어서 낭떠러지 끝까지 다을 정도였다. 낭떠러지 한없이 먼 위에는 높다란 성이 있었는데 유리는 그 안에서 머리를 풀어 낭떠러지 끝까지 풀어 내렸다. 머리를 풀어 내린 유리는 랄랄라 노래를 불렀고 노랫소리에 왕자님은 서핑을 멈추었다. 서핑을 멈춘 왕자님은 말리부 바다에서 언덕에 올라 높다란 성안에서 흘러내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매혹되어버렸다. 마침내 왕자님은 유리의 기다란 머리를 발견 천천히 성을 향해 올랐다.
‘왕자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침내 왕자님은 성벽 창틀 난간에 손이 다았다. 그리고 잘생긴 왕자님의 얼굴이 유리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만! 유리의 눈물이 왕자님의 눈동자에 떨어졌고 유리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불쑥 마녀가 나타나 유리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 안 돼요, 왕자님!!!”
유리는 한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왕자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 휴우!’
눈을 벌떡 깨어보니 꿈이었다.
웃기는 것은 꿈의 내용이 라푼젤 패러디였다. 어릴 적 유리는 어여쁜 동화 주인공들 중, 라푼젤을 가장 부러워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멋진 왕자님이 엄청 높다란 탑 꼭대기까지 올라와 라푼젤의 손을 유혹하듯 꼬옥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깨어보니 꿈이 패러디라지만 끝이 동화와 비슷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깨어보니 꿈에서 나타난 출연진들의 모습이 웃겼다.
라푼젤이 이유리라는 것도 웃겼지만, 유리의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마녀가 손용호였다. 용호의 얼굴이 못난 건 아니지만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얼굴이 자글자글하도록 마녀치장을 한 용호의 모습은 코미디언 못지않게 코믹했다. 왕자님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잘생겼다는 느낌에 뿌연 것이 그냥 멋진 남자친구같이 느껴졌었다.
뿌연 왕자님의 얼굴이 유리의 눈동자에서 사라지며 유리는 새카만 밤의 어둠이 아닌 밝은 태양을 발견했다. 밝은 태양을 발견하는 순간 유리는 자신이 서울이 아닌 LA에 있다는 것을 진짜로 실감하였다. 환상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함성이 나왔다. 깨어나서 룸을 둘러보니 유리가 들어온 스위트룸은 비버리힐튼의 스위트룸 중에서도 거의 최고였던 것이다. 할리웃 스타들의 전용 숙소로 손꼽히는 것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스위트룸이 왕실을 방문케 할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쓸데없이 화려한 것들처럼 촌스럽지 않아, 오히려 그것이 유리에겐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체리 원목의 캘리포니아 특유의 스탈일 가구, 부드러운 색채의 룸 시스템, 창이라기 보단 벽면을 가득 매운 유리벽, 유리벽을 가득 매운 캘리포니아 하늘. 모든 것의 조화가 마냥 멋지기 만한 마르크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벽면을 가득 매운 유리벽이 캔버스라면, 유리벽을 가득 매운 캘리포니아 로데오드라이브의 하늘은 캔버스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유리는 마르크샤갈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주는 리듬에 방방 뛰며 날씬하게 몸을 앞뒤로 흔들어 보았다. 아마, 아쉬운 꿈속의 하늘도 이랬던 것 같았다.
‘라푼젤, 마르크샤갈’
유리는 즐거운 단어들을 마구 연상하며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곤 즐거운 기분에 진짜 지겨울 만큼 쉬었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마침, 태양이 정오를 맞이하고, 유리는 시트 한 장만 걸친 채 딸랑 일어나, 드레스룸 도어를 잡아당겼다. 습관적으로다.
샤워 전에는 옷가지들을 모두 벗어 소파에 집어 던졌다. 그래서 소파에는 유리의 빨간 코트며 서울에서부터 입고 온 옷가지들이 하나하나 풀어헤친 조각처럼 쫄쫄 흩어져있다. 누가보기에는 다시 입을 것 같아서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유리는 샤워를 마치면 욕실에서 바로 나와 습관적으로 드레스 룸 도어를 잡아당긴다. 왜냐하면, 멋진 옷들은 항상 즐겁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입고 온 빨간 코트도 즐거운 옷 중에 하나였다. 출근길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위해 입고 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 진짜 더블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이다. 시차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수현이 말대로 서울과 LA의 시차는 마이너스 16시간이다. 그래서 LA에서의 시간이 서울보다 16시간 늦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 유리가 크리스마스를 두 번 맞이한 것이다. 지금 쯤 수현이와 용호는 크리스마스가 종료되었을 것이다.
“ Oh, my god!!”
드레스룸 도어 너머 펼쳐진 풍경은, 그것은 라푼젤과 마르크샤갈 못지 않은 너무나 섹시한 한 폭의 씬이었다. 감각적인 드레스룸의 옷장에 실크로 감싼 옷걸이에, 실크로 감싼 옷걸이에 새하얀 원피스. 더욱이 새하얀 원피스는 원피스의 간결한 라인만으로도 완벽하게 편안할 정도로 순수해 보일 정도였다.
유리는 원피스에 플래티늄 옷핀으로 고정된 메시지도 재빨리 읽어보았다.
---Dress it, For your date!
from agency
메시지에 따라 원피스를 입어보고 유리는 깜짝 놀랐다.
‘ 근데? 어쩜 이렇게 딱 맞지??’
유리에게 원피스가 피팅을 한 것처럼 너무나도 딱 맞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기분에 유리는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가 자신에게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가 될 것만 같았다. 시간만 더블이 아닐 것 같았다.
원피스의 순결한 느낌에 따라 유리는 머리를 부글부글 살짝 세팅하며 화장을 맞추었다. 언제 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친절하게 진열한 메이크업 도구의 순서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위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친절한 누군가는 메이크업의 순서 뿐만아니라 색조와 반짝반짝 빛까지 맞추어주었다. 아이섀도, 입술을 위한 투명한 틴트까지 모두가 완벽하게 맞추어주었다. 에이젼시 누군가일 것 같았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신거울 앞에 선 유리는 완전 날라 갈 것만 같았다. 평소 일에 지쳐 이런 일들도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지 유리는 완전 날라 갈 것만 같은 기분에 전화기 보튼을 눌렀다. 완벽한 의상, 완벽한 화장, 완벽한 기분. 유리는 털썩 국제전화로 1588-**** 오늘의 운세를 보았다.
‘오늘밤 멋진 남자와 저녁 먹는다.’
‘그럼 그렇지!’
유리가 아주 낭만적 상상에 빠져있을 때, 호텔 스위트룸 도어벨이 울렸다.
“띵똥!”
벨소리와 함께 호텔 스위트룸 도어로 달려가자, 아주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유리의 얼굴을 가로 막았다.
“ 제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