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옆에 낯선 종이 한장 눈에 띄어 무심결에 집어들었다
비상 연락망...
거기엔 큰 딸네반 전부의 핸드폰번호가 적혀 있었다
무심결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훑어 내려가다가 눈에 띈 공란 하나를 발견하고
눈길을 멈추게 되었다
이 새암...그리고, 공란.
바로 내 아이의 이름이 아닌가
"엄마~ 우리반에 핸드폰 없는 사람 나 밖에 없는거 알아?"
설마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 딸에게 핸드폰이 없는게 비정상이었나
갑자기 기분이 묘해지면서 버릇처럼 옛날이 떠 오른다
전화번호 숫자가 한 두자리였던 시절.
"정미에게 심부름좀 시켜야겠다" 담임선생님의 특명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제일 낯선 심부름...다름아닌 전화 심부름이었다
내가 어디 전화를 해 봤어야 말이지
수화기를 만져보지도 못한 나에게 그토록 중요한 임무를 맡기시다니.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첫 경험의 순간이자, 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기계를 통해서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함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이건 보통의 사건이 아니다
과연 그 시커먼 기계가 그 일을 충분히 완수하게 해 주려는지,
그 딱딱한 기계속에서 정말 부드러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나 하려는지.
만약에 들려온다면 어떤 소리가 나려는지.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같은 것일까
아침 조회시간에 마이크에서 나는 소리같은 것일까
아님 꿈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바람소리 같은 것일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 그 기계속에 내 목소리를 집어넣을 자신도 없을것 같았다
우체국까지 자신없는 마음과 떨리는 발길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오직 내 마음속에는 이 엄청난 심부름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돌아가야 하는 일념하나로
꽉 차 있었다
"김정미학생~ 전화 연결 되었어요" 한참을 기다린 나에게 이제 피해갈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젠 도망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의 순간이 온 것임이 분명하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저 부름의 소리와 저 까아만 기계에 이젠 정면 도전해야만 한다
"누구세요?"
손이 떨려서 수화기를 재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기계 저편에서 내 귀를 향해 세찬 바람같은 소리를 질러대는데 입까지 굳어져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저~~선생님의 제잔데요..." 이젠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한다
"제자 누구니?" 누군 알아서 뭐 하시려고 나를 자꾸만 물어온다
"저~ 선생님의 제자 김정민데요"
거기까지는 재대로 말을 한 것같다
입속에서만 맴돌뿐 정작 해야할 말들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횡설 수설...
이승과 저승을 잇는 듯한 수화기 저편의 낯선 목소리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 알겠다 선생님께 안부좀 전해주고..." 무엇을 알겠다고 하셨는지...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내 몸은 어느새 물먹은 솜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전화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후부터 전화는 여전히 무서운 것이었다
원래 태생이 기계와는 인연이 없고 적성에도 맞지 않은 터,
내 생긴 방식대로 그저 생방송(?)에만 의지하고 긴 세월 그렇게 지내왔다
공부를 한다고 객지에 나와서도,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갖고서도
나에겐 언제나 눈빛으로 마음나누고, 침 튀기며 대화하는 생방송만이 좋았다
낯선것에 쉽사리 다가가지지 못하는, 나름대로 언제까지나 자유인이 편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미개인의, 몸으로 때우기...
뭐 이런 원시인의 심정으로 그저 불편함같은건 거의 모르고 살았으니 말이다
편리함을 거부해서가 아닌 지금도 아님 미래에도 항상 몇 발자국 뒷서지는 나를 본다
큰 아이 두세살 무렵, 드디어 우리집에도 전화가 신설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물건하나 우리집에 등장했으니 무엇보다도 아이가 야단이다
"여보데요...아...네...여기 때암이네 집인데요..."
"전화기 내려놓지 못해? 고장날라 그만해"
엄마의 호통에 아이 이번엔 신발장으로 간다
"네? 누구라구요?...아...엄마라구요..."
신발을 귀에다 대고 온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한다
그런 새암이가 이렇게 컷습니다
"핸드폰 사 줄까?"
"얼마짜리 사주실려구요?"
'어떤걸 원하는데?"
"전 제일 비싼거 아니면 않 사요"
"제일 비싼게 얼만데?"
"....."
"그럼 우선 엄마꺼라도 줄까?"
"전 세상에서 제일 비싼 핸드폰 아니면 필요없어요"
이야기가 이쯤되면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제가 누굽니까...바로 그 아이 엄마지요
그 아이 마음 제가 모를리가 있나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 년전 집안에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로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헤매고 있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핸드폰을 사양하는 속 깊은 큰딸의 마음입니다
저렇게 나오면 천하의 누구도 그 아이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 무능한 부모 만드는 것 같아 가슴 시리지만
한편으론 우리집 든든한 대들보 큰딸의 깊은 마음에 마음 든든합니다
핸드폰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미꾸라지되어 버리니 피해를 보는것은 정작 다른 사람입니다
바로 동생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핸드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싼 핸드폰 하나도 갖지 못하는 동생"
찬물도 다 순서가 있는법.
"새봄아 장유유서가 무슨 뜻인지 아니?" 기죽어 버리는 가련한 새봄양.
비운의 황태자(?)가 아닌 불쌍한 우리 새봄이
구약성서 시대라면 팥죽 한그릇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장녀명분을 사겠다고 달려들 새봄이.
이러다가 우리 두딸도 엄마처럼 혼수감 품목에 핸드폰이 포함되는 사태가 생기려나.
대물림 될 게 따로 있지.
어느날 동생과 한판 하고 풀 죽어 있는 큰 딸을 부릅니다
그리고 귀에 속삭입니다
"힘내, 아무리 그래도 형 만한 아우없으니..."
그나 저나 세상에서 제일 비싼 핸드폰은 얼마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