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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1)

말글눈 |2003.05.22 11:17
조회 758 |추천 0

 

1. 대박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안 한 채 라면을 끓여 막 한 젓가락 뜨는데 벨이 울린다. 문영은 얼른 냄비 뚜껑을 덮고 화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나갔다. 아침부터 누군지 모르지만 영 반갑지 않다. 라면은 끓이자마자 바로 먹어야지 잠깐 한눈만 팔아도 금방 불어터진다.
아침식사를 방해한 사람은 새신랑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은 문영 또래의 사내였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장문영 선생님이십니까?
그런데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우선 명함부터 내민다. 무슨 증권이라는 글자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증권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잠깐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라면은 새로 끓여야 할 것 같다. 문영은 사내를 맞아들여 학생들이 앉는 동그란 의자를 권했다. 그가 화실 안을 신기한 듯이 둘러본다.
여기를 화실이라고 하는가요?
예.
화실은 말만 들었지 처음 구경합니다.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고 계신 모양이죠?
많기는요. 한 열 명 됩니다.
열 명이면 많은 거죠, 뭐. 그건 그렇고 지금 장선생님이 보유하고 계신 시그마정보 주식 5천 주 말입니다.
예…….
혹시 그 주식을 팔 의향이 없으신가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 만하다. 하지만 문영은 지금까지 그 주식을 팔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글쎄요.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어리둥절한데요. 그 주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아니, 5천 주나 되는 주식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계시다니요? 주식이란 적당한 가격에 팔기 위해서 적당 기간 보유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뭐 당장 아쉬울 것도 없고 그래서 말이죠.
주가가 더 오르기를 기다리시는 건가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애당초 공짜로 생긴 주식이라 저금한 셈 치고 내박쳐 둔 거죠.
시그마 박사장 따님을 미대에 합격시켜 주고 선물로 받으신 거죠?
합격을 시켜 주긴요. 지가 잘해서 들어간 거죠. 그런데 그 소식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여기저기 귀동냥을 해서 정보를 분석하는 게 저희들 직업이니까요. 어쨌든 그때 돈이나 다른 선물로 받지 않고 주식으로 받은 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누가 받고 싶어 받았나요. 주식을 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받은 거죠.
딸을 합격시켜 줬다고 해서 주식을 선물한 박사장님 착상도 사실 기발했어요.
박사장님을 잘 아십니까?
개인적으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상장회사니까 그 정도 정보는 챙기고 있어야지요.
증권회사에서 그런 정보까지 챙기고 있다니 어쩐지 으시시해지는데요.
염려 마십시오. 절대로 그런 정보를 악용하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랬다간 회사 인가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지금 시세가 얼마나 나가는지는 알고 계시죠?
며칠 전 신문에서 보니까 2만8천원 나가던데요.
처음 받으실 때는 시세가 아마 만원대였죠?
만이천원인가 그쯤 되었을 겁니다.
그럼, 5천 주니까 오이 십, 오팔 사십, 가만히 앉아서 1억4천을 버셨군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죠. 학생 하나를 대학에 합격시키고 받은 선물이니까 당연한 거죠. 운동선수 하나를 대학에 집어넣는데도 1억씩 드는 세상이니까 당연한 보수 하니겠습니까?
글쎄요.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전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까 주식을 팔 의향이 없냐고 물으셨죠?
예,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죠. 그 주식을 저희들한테 주당 3만원씩에 파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조그만 증권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당 3만원씩 해서 1억5천이면 적은 돈은 아닌데 어떻습니까?
물론 적은 돈은 아니죠. 더구나 저같이 가난한 그림쟁이한테는 말이죠. 그런데 시세보다 2천원씩이나 더 주고 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 이유야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주식을 사고 팔거나 중계를 해 주는 과정에서 이윤을 남기는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주식값이 더 오를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와 반대로 폭락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항상 반반이니까요.
문영은 속으로 웃었다. 가능성 좋아하네. 겨우 2천원 더 얹어 주자고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먼 걸음을 했을 리가 없다. 그 정도 용건이라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거기다 5천주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그 사연까지 자상하게 알고 있다. 모든 걸 다 파악한 다음에 찾아온 것이다. 시그마정보는 지금 한참 잘 나가고 있는 벤처기업이다. 국내 최초로 병원사무 시스템을 개발해서 힛트를 쳤고 지금은 중국의 IT사업에도 참가하고 있는 탄탄한 회사다. 무언가 곡절이 있는 것이다.
제 계산에 의하면 말이죠.
문영은 한번 흥정을 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만이천원짜리 주식이 2만8천원으로 뛰는 데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산술적으로 앞으로 한 일 년만 더 기다리면 5만원으로 뛸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지금 3만원에 팔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장선생님이 증권시장의 생리를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1 더하기 1은 2다 하는 식으로 단순한 게 아니거든요.
어쨌든 내 식으로 계산을 하자면 그렇다는 얘깁니다. 전 증권의 증 자도 모르는 사람이고 재테크니 뭐니 하는 데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평범한 그림쟁이에 불과하거든요.
문영의 짐작이 맞았다. 사내는 인심을 쓴다는 듯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3만천원 어떻습니까?
문영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이번 학기만 끝내고는 화실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주식을 처분해서 오피스텔 같은 것을 하나 마련해 자신의 작품에만 전념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임자가 제 발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당장 주식값을 3천원이나 올려 놓는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글쎄요. 시세보다 3천원이나 더 주신다니까 고맙긴 한데요. 미안하지만 아직 그 주식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계속 시세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한 1년 더 기다려 볼 생각인데요.
장선생님이 주식시장의 생리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시그마정보 주식은 이제 상한가를 쳤습니다. 중국 아이티사업에 진출할 때가 피크였지요. 중국에서 흑자를 내면 조금 더 오를 수도 있지만 아주 미미할 겁니다. 그 대신 만약 적자라도 내는 날이면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죠. 전문가도 아닌 분이 왜 그런 위험부담을 안아야 합니까?
어차피 공짜로 생긴 건데 그 정도 위험부담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기다려 봐서 시세가 더 오르면 더 좋구요.
칼자루는 처음부터 이쪽에서 쥐고 있다. 주식의 주 자도 모르지만 문영은 이 사내가 무언가 대단히 아쉬워서 찾아왔다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사내도 문영이 쉽게 응하지 않을 거라는 눈치를 챈 모양이다. 인심을 쓴다는 듯이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좋습니다. 그럼, 3만2천원으로 하죠. 그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벌써 시세보다 4천원이나 뛰었는데 조금 더 기다리면 또 오르지 않을까요?
문영은 반은 농담삼아 한 말인데 주식값은 천원 단위로 껑충 껑충 뛰어 오르더니 결국은 주당 3만5천원이 되었다. 문영은 지금까지 이런 흥정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흥정은커녕 시장에 나가 반찬거리를 사면서도 백원 한 닢 깎아 본 적이 없다. 살림을 하는 주부라면 모를까 장사꾼과 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처럼 구차한 일도 없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간단하게 끝내고 시간을 절약하는 쪽이 더 이익이라는 게 문영의 생각이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군요.
사내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치면서 투덜거렸다. 진땀을 흘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다급한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문영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우리 시장바닥의 장사꾼들처럼 이렇게 밀고 당기지 말고 화끈하게 끝냅시다. 주당 4만원 어때요?
행여나 싶으면서도 장난삼아 마지막 배짱을 한번 부려 본 것인데 그것이 먹혔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사내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구석으로 가더니 길게 통화를 했다. 힐끗 힐끗 눈치를 보면서 연신 이마 닦는 걸 보면 정말 심각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안 되겠는데요.
통화를 끝내고 온 사내가 무척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럽게 말한다.
4만원은 절대 안 되고 주당 3만6천원이 마지노선이랍니다. 그 이상을 원하신다면 우리도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내의 진지한 표정으로 봐서 단순한 엄포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일이다. 문영은 인심을 쓴다는 듯이 기분 좋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3만 6천원으로 하죠.
사내가 무슨 소린지 입속으로 중얼 중얼하면서 계약서를 꺼내 펼쳐 놓는다. 문영은 조금 안 됐다 싶어서 다정하게 말을 붙여 보았다.
전 증권이나 사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이렇게까지 무리를 할 땐 인수합병이라든가 경영권방어라든가 뭐 그런 사정이 있는 것 아닙니까?
사내는 화를 참느라고 애쓰는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박사장이 곤경에 빠졌나요?
거기에 대해서도 노 코멘틉니다.
하긴 시그마정보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문영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 하나가 미대에 합격을 하고 그것이 대박을 터뜨려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운도 좋았지만 증권에 대한 무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3만원을 준다고 했을 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훌러덩 넘겨 버렸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했던 것은 아니다. 순전히 증권에 대한 무지가 무모한 배짱을 만들어 냈고 결과적으로 대박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계좌에 1억8천만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나자 더 이상 무심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단 십 백 천 만… 하면서 동그라미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맨처음 한 일은 화실에 있는 학생들의 이젤과 의자들을 냅다 걷어차면서 마음껏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대박이다 대박! 이제부터는 거지같이 너희들 안 가르치고도 먹고살게 되었어! 내일부터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면서 살 거다! 진짜 예술가의 길을 간다 이거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어?
그러나 대박이 터졌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화실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당장 학부모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어디가 부러졌다면 또 모를까 시험이 불과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에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학생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어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뭘로 알고 이러는 거에요 지금?
만약 우리 아이가 시험에 떨어지면 책임질 거에요? 책임질 거냐구요? 누구 맘대로 그만둬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여차 하면 떼로 덤벼들어 반쯤 죽여 놓을 기세였다.
제가 무책임하게 그만두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보다도 훨씬 더 실력있고 경험도 많은 선배한테 인계인수를 한다니까요.
우리 애가 무슨 물건이에요 인계인수를 하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그냥 인계인수만 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 삼개월분 교습비까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어요?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네요. 그 동안 착실하게 잘 가르치다가 무슨 변덕이 나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 봐요. 들어 봐서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우리도 양보할 수 있으니까.
문영은 그만 거기서 말문이 막히고 만다. 주식으로 대박이 터졌다고 했다가는 안 그래도 약이 올라 있는 여자들한테 진짜 집단폭행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만둔다고 하기 전에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 불찰이다. 도로 주워 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학생들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럼, 없던 일로 하고 교습을 계속하기로 하죠.
열한 명의 학생들 가운데 두 명은 더럽고 치사해서 그만둔다며 그날로 보따리를 쌌다. 교습을 계속한다고 해도 이제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영은 큰 실수를 한 셈이다. 결국은 말을 안 꺼낸 것만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독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지겨울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게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천직으로 알고 한번도 불만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하루 아침에 그렇게 뒤집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나 싶어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흥이 날 리가 없다. 자나 깨나 머리 속에서 맴도는 것은 통장에 들어있는 돈 생각뿐이었다. 오피스텔을 사야겠다는 구상도 많이 바뀌었다. 깊은 산골에 아담한 오두막을 한 채 장만하고, 좋은 자동차를 한 대 사서 전국 일주도 해 보고, 좋은 여자를 만나면 결혼도 하고, 작품에만 열중해 국전에서 대상도 타고… 이런 장미빛 공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들이 그런 사연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잠시나마 자신들을 배신했던 미술강사에 대한 구박은 노골적이고 매서웠다. 아이들은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문영에 대한 일체의 인사를 생략해 버렸다. 오며 가며 인사도 안 하는 것은 물론 눈이 마주쳐도 빤히 바라볼 뿐 고개를 끄덕이는 법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본전은 뽑자는 듯 문영을 들들 볶아 댔다. 잠깐 엉덩이를 붙이는 꼴도 보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게 해 놓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고 하면 금방 이것 좀 봐 주세요, 여기 좀 봐 주세요 하면서 불러 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3개월이다. 3개월만 참으면 다 끝난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9월로 접어든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다음 중국집에서 양장피와 한 병에 8만원이나 하는 마오타이를 시켜다 놓고 느긋하게 한잔 하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부부 사이로 보이는 50대 남녀였다. 남자는 머리도 적당하게 벗겨지고 배도 적당하게 나오고 얼굴에는 화색이 돌아 넉넉하고 인심 좋아 보였고, 여자 역시 체구는 작고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고생을 모르고 곱게 나이먹은 모습이었다.
장문영선생 맞죠? 드디어 만났군요.
남자는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문영의 손을 꽉 쥐고 흔들었다.
장선생을 진작에 만났어야 하는데 그 동안에는 인연이 닿질 않아 가지고 말이죠.
별로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문영은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했다. 남자는 할 얘기가 급한 것 같았다.
시그마 박사장 아시죠? 내가 그 친구하고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어제 어떤 초상집에 갔다가 그 친구를 만났더니 장선생 얘기를 해 줍디다. 귀가 번쩍 띌 수밖에 없는 게 내 딸도 지금 고3인데 미대를 가겠다고 저 야단이지 뭡니까. 그래서 미대교수한테 개인지도를 받고 있는데 이 교수란 놈이 돈만 잔뜩 받아 처먹으면서 지도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다니 이래 가지고야 어디 가망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부랴부랴 찾아뵌 겁니다. 박사장 딸을 합격시킨 그 실력으로 내 딸도 합격만 시켜 주시오. 박사장이 5천 주를 냈다니까 나는 그 곱절 만 주를 내지요. 주당 만 칠천원짜리 주식 만 주를 말입니다.
문영은 멍하니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칠천원짜리 만 주면 자그마치 1억7천만원이다. 이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저러나 잘하면 대박이 또 한번 터질 모양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문영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앞으로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이구 그런 말씀 마십쇼. 이게 무슨 운동선수 양성하는 것도 아니고 미대 실기는 포인트만 찍어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두 달이면 충분하다고 들었습니다.
여자도 사정을 했다.
떨어져도 원망 안 할 테니까 일단 받아만 주세요. 시험이 코앞에 닥쳤는데 하루 하루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아요.
떨어져도 원망을 안 한다는 대목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운이 좋아 합격만 시킨다면 또 한 번 대박이 터질 판이다. 문영은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우선 따님을 보내십시오. 소질이 있는지 한번 테스트를 해 보고 결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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