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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22)

말글눈 |2003.05.31 01:05
조회 316 |추천 0

22. 추적자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픈데 어디 들어가서 뭐 좀 마시죠.
동호가 이형사한테 제안한다.
그럴까?
두 사람은 호프집에 들어가 생맥주를 시킨다. 하루종일 신애의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신애를 본 사람이 없는지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형사야 업무니까 그렇다지만 동호는 애가 타서 두 눈이 쾡하니 들어갈 지경이다. 사실 가장 중요한 목격자는 동호 자신이다. 밤 9시가 넘어서 신애를 택시에 태워 주고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신애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그때 여관에서 온몸이 나른할 지경으로 정사를 치르고 나오는 길이었다. 동호는 이형사한테 카페 앞에서 헤어진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여관이나 카페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형사가 동호에게 신애의 집에 전화를 걸어 보라고 시킨다.
무슨 일이 생겼으면 벌써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겠죠, 뭐.
그래도 모르니까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게 좋아.
동호는 휴대폰을 건다. 혹시 집으로 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 같은 게 걸려오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없었다는데요.
거 참 환장할 노릇이네. 돈을 노린 유괴라면 벌써 전화를 걸고도 남을 시간인데.
돈을 노린 유괴가 아닌 모양이죠.
그럼, 그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어떤 젊은이가 납치를 했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구요. 또 신애 걔가 좀 엉뚱한 데가 있거든요. 갑자기 변덕이 나 가지고 어디 바닷가 같은 데로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있지요.
바닷가라면 그 좋은 별장 놔 두고 왜 다른 데를 찾아가? 또 어디로 훌쩍 여행 좀 다녀오겠다고 하면 말릴 부모들도 아니잖아? 핸드폰도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동호는 한숨을 쉰다.
이건 분명히 면식범의 소행이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애가 택시에서 내리자 어디 가서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끌고 갔을 거야. 그러니까 근처에서 아무도 비명 같은 걸 들은 사람이 없지.
신애 주변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요. 신애가 아는 사람은 제가 모조리 다 알아요. 그리고 오늘 다 만나 봤어요. 이건 사고라구요. 가만 있자…….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왜?
한 사람이 빠졌어요.
그게 누군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신애 고등학교 때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쳤던 화가예요. 하지만 그 사람이 뭐하러 신애를 데려갔겠어요?
나이가 얼마나 됐는데?
잘은 모르지만 40은 넘었어요.
가족은?
아 참, 그러고 보니 그 사람 독신이네요.
독신?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단 말이야?
예,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산다니까요. 옛날 애인한테 배신을 당하고 독신을 결심했단 얘길 신애한테서 언뜻 들은 것 같아요.
그럼, 그 남자가 신애를 남몰래 좋아할 수도 있는 일 아니야?
에이, 말도 안 돼요. 나이가 스무 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요. 아무리 엽기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자기 딸 같은 애한테 무슨 그런…….
하여튼 만나는 보자구.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모르죠. 하지만 화실이 어딘지는 알 수 있어요. 신애 부모님이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신문기사식으로 표현하자면, 수사는 급물살을 탄다. 이형사와 동호는 당장 문영의 화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화실에는 이미 건강 보조식품을 파는 회사가 들어와 있었다.
며칠 안 됐어요. 전세금이 빠지는 대로 입급시켜 달라며 계좌번호를 적어 주고 가더니 소식이 없네요.
집주인의 말을 듣더니 이형사가 다급하게 묻는다.
그게 장문영 그 사람 계좌번홉니까?
아뇨. 김 뭐라더라… 친구 계좌라고 그랬어요.
김대수. 흔한 이름은 아니다. 이형사와 동호는 경찰서로 돌아와 김대수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문영과 같은 미대를 나오고 나이까지 같은 김대수가 금방 튀어나온다. 이쯤 되면 급물살 정도가 아니라 일사천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설계사무소에 찾아가 김대수를 만나자 일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그 친구를 만난 지 1년도 더 됐어요. 나는 그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하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사는 친구죠. 증권으로 몇 억 벌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나름대로 어디엔가 투자를 했겠죠. 이번에 전세금을 내 계좌에 입금시킨 거요?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요.
김대수는 문영의 삼촌 얘기를 장황하게 해 준다.
이 고약한 인간이 경찰서 정보계장 출신인데요. 조카가 돈 좀 벌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괴롭히는지 몰라요. 그래서 내 계좌로 입금을 시킨 거죠. 자기 계좌로 입금을 시켰다가는 정보 전문가인 삼촌한테 또 추적을 당하고 돈을 뜯겨야 할 테니까요.
아무리 형편이 그렇다지만 말입니다…….
이형사가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김대수를 응시하면서 묻는다.
화실 전세금을 빼서 친구 계좌로 입금을 시켰다면 둘도 없는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얘긴데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만나 본 지는 1년도 넘는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김대수도 만만치 않다.
장문영, 그 친구가 애당초 상식을 뛰어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생기는 거죠. 사실이 그런 걸 날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친구의 계좌로 입금을 시켰다면 궁금해서라도 전화 한 통화쯤은 했을 것 아닙니까?
곧 전화가 오겠죠. 그런데 그 친구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 여자친구가 있는데요…….
동호가 나서려고 하자 이형사가 얼른 손을 들어 말을 막는다.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을 수사 중인데 장문영씨의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그 친구가 직접 관련된 사건은 아니구요?
예. 그러니까 다른 걱정 마시고 장문영씨를 좀 만나게 해 줘요. 몇 마디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하여튼 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와야 만나든지 말든지 하지요. 명함이나 한 장 주고 가세요. 연락이 오면 얘기는 해 볼 테니까요.
명함을 주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형사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낸다.
냄새가 나지 않아? 삼촌 때문에 어딘가 꽁꽁 숨어 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지금쯤 신애를 감금해 놓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럼, 요 근처에서 잠복근무를 해야겠네요?
그 전에 만나 볼 사람이 또 하나 있어. 그 삼촌이라는 인간 말이야.
동사무소에서 문영의 호적을 열람하고 그 삼촌의 주소를 추적하는 일 또한 식은 죽 먹기다.
문영의 삼촌은 상도동 산동네 다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에 살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게 틀림없어 보인다.
집 꼴을 보니까 조카가 돈 벌었단 소문을 듣고 후끈 달아 오를만도 하구먼.
이형사가 그러면서 쪽문을 밀고 들어간다.
쪽마루에 앉아서 마늘을 까고 있던 문영의 숙모가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본다. 마늘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걸 보면 부업으로 하는 일 같다. 그러나 문영의 삼촌은 집에 없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문영의 숙모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알 수 없어 불안하게 눈알을 굴린다.
장문영씨 일로 뭐 좀 상의할 게 있어서요.
문영이요? 문영이가 뭘 어쨌는데요?
숙모의 눈에 불안이 가시고 갑자기 생기가 돈다.
예?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문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마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자세한 건 삼촌분을 만나서 얘기해야겠는데, 어디 멀리 가셨나요?
아뇨, 지금 동네에 있어요. 여기 왼쪽 골목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는데 아마 거기 있을 거예요.
문영의 삼촌은 그 구멍가게에서 어떤 노인과 둘이 앉아 김치와 마른멸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형사가 들어가자 창피한지 얼른 안주를 치운다. 그러나 문영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기운이 뻗치는지 열을 내기 시작한다.
문영이를 찾는다구요? 그럼,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내가 이래 봬도 왕년의 정보계장 출신이라구요.
이형사는 이마를 찌푸린다. 같은 경찰 출신이 구멍가게에 앉아 안주도 없는 소주를 마시는 꼴이 역겨웠던 것이다.
장문영씨가 최근에 여길 찾아오던가 연락을 한 일은 없습니까?
에이, 그 자식이 얼마나 꽃비암 같은 인간인데 날 찾아오고 연락을 합니까. 죽을 때까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문영이를 찾습니까?
그건 차차 말씀드리죠.
아 참, 내 정신 좀 봐. 수사 기밀을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나저러나 이 산동네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수사가 제대로 맥을 짚은 것 같은데 내 협조가 필요한가요?
필요하다면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협조하다 마다요. 나도 지금 그 자식을 찾기 위해서 정보망을 총 가동중이거든요.
그럼,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잠깐 말씀 좀 나누죠.
그럽시다. 아무래도 이런 데선 중요한 얘길 나누기가 좀 뭣하죠?
마침 저녁 무렵이었다. 이형사는 삼촌에게 돼지갈비를 대접했다. 체면 불구하고 마구 먹는 모습이 또 역겹기는 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삼촌이 갈비값을 하려고 그랬는지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김대수 사무실 근처에서 잠복을 한다? 좋은 생각이지만 그래 가지고서야 어느 세월에 문영이를 만나겠어요? 당장 국세청으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국세청에는 왜요?
아니, 아직도 감이 안 잡혀요? 문영이 그 자식이 모든 재산을 김대수 앞으로 돌려 놓은 겁니다. 화실 전세금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김대수 앞으로 등기가 돼 있는 부동산을 찾아보자 그 말씀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국세청에서 그런 일로 순순히 협조를 해 줄까요?
서장 명의로 공문을 떼어 가지고 가면 협조해 줄 겁니다.
만약 장문영씨가 아파트나 집을 구입하지 않았다면요?
그땐 또 방법이 있지요.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가지고 문영이 계좌를 추적하는 겁니다. 어디로 숨어 다니고 있는지 모르지만 현금 인출은 해야 먹고 자고 움직일 것 아닙니까?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고 용의점이 있을 뿐인데 법원에다 어떻게 계좌 추적을 청구합니까?
아따 답답하시네. 문영이가 범인이라고 딱 찍어 가지고 영장청구를 하면 될 거 아니요?
그랬다가 나중에 범인이 아닌 게 밝혀지면 절더러 옷을 벗으라구요?
나 이런, 정말 답답한 양반 같으니라구. 아, 언제 법원에서 거기까지 챙기는 거 봤어요?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이형사는 목구멍에서, 그러니까 경찰에서 파면을 당했지 하는 소리가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비록 부정한 짓을 해서 파면을 당한 인간 퇴물이라 해도 지금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삼촌은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를 지른다.
여기 갈비 2인분 추가! 소주 한 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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