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약 내 아들이 한 달에 백만원 밖에 벌지 못한다면 자식을 낳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한 달에 백만원 벌어서 저축은 얼마나 할 수 있겠으며 집은 어떻게 사겠는가? 이백만원이면 하나를 낳아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식을 낳았으면 대학에는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립이면 그래도 보낼 수 있겠지만 사립이면 등록금만 일년에 800, 4 년이면 3200 만원인데 한 달에 이백만원을 벌어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찌 둘을 낳으라 하겠는가?
생존만 하겠다면 한 달에 백만원 벌어도 네 식구가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일이나 고기도 먹고, 아파트 월세나 관리비도 내고, 냉장고나 TV, 컴퓨터도 사고, 전화료, 인터넷 통신료도 내고, 그러면 참 어려워진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어른보다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더 많다. 무엇보다도 교육비가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내 자식이 백만원, 이백만원 버는데 어찌 아이를 둘 낳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옛날에는 먹이고 입히기만 하면 되지 않았나? 애들도 어느 정도 크면 논일, 밭일도 했을 것이고, 교육비는 거의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스무살이 넘도록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
또한, 한 달에 백만원 번다고 할 때 그 자식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아비가 한 달에 백만원 벌 때 먹고 싶은 것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겠으며, 교육인들 제대로 받겠는가? 과연 그 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몰라서 그렇지, 만약 자기의 자식이 고통 받고 힘들게 살 것 같으면 누가 자식을 낳겠는가? 자기의 자식이 가난하고, 남에게 억압받고, 비천하게 살 것 같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분명하다면 과연 자식을 낳겠는가?
옛날에는 대를 이어야 했고, 집안이 번성해야 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자식은 많을수록 좋았지만, 요즘에는 집안이니, 가문이니 하는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내 자식은 나와 아내의 자식이지만, 손자는 네 사람의 손자이고, 몇 대가 더 지나버리면 나는 그저 수십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 중의 하나일 텐데, 대를 잇는다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일까? 유전자로 말한다면 내 유전자가 얼마나 좋은 유전자라고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유전자를 남길까? 내 유전자 역시 수도 없는 사람들이 물려준 것이 아닌가?
정말 자기의 유전자를 그렇게 퍼뜨리고 싶은가?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한 희망은 우리의 본능, 성욕 속에 안배되어 있지만 우리 각자에게 그러한 직접적인 바람은 없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의 성욕이라는 욕구에 감추어 놓은 장치일 뿐이다. 우리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 섹스하지는 않는다. 다만 섹스가 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자식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자식이 있어서 그냥 좋고, 행복하고 그래서 자식이 있어야 한다. 자식이 없으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적적하며, 얼마나 많은 삶의 내용이 사라질 것인가? 그러나 그 자식을 키우느라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 자식으로 인해 너무 많은 고통을 받는다면, 자식으로 얻을 행복을 포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둘 낳을 것은 하나로, 하나 낳을 것은 아예 낳지 않으면 하나인 자식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더 많은 것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을 얼마 낳을까 결정하는 데에 무엇을 고려해야 하나? 먼저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다. 자식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가 얼마나 행복할까 혹은 불행할까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자식으로 인해 얻을 기쁨도, 그 자식으로 인해 받을 고통도 다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태어날 자식의 행복이다. 그 자식이 행복할 것 같으면 본인이 힘들어도 낳아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식이 태어나서 고통 속에 살 것 같으면 낳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식이 고통 속에 살 것 같으면, 그러한 데에도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 아닌가? 내 자식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한다면 왜 굳이 있지도 않은 자식을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내보낼 것인가?
2.
인구가 줄면 나라가 쇠약해지니 나라를 위해서 자식을 낳아야 하나?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러한 상황을 걱정한다면 사람들이 자식을 낳고 싶도록 유도해야지, 그게 어찌 애국심에 호소할 일인가? 자기가 살기 좋은, 내 자식이 살 만한 세상이 되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을 것이다. 사람이 살고 싶은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인이 살기 힘든 세상, 사는 것이 너무 고달픈 세상이어서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주저하고 등을 돌릴 것이다.
이제 사회는 그 존립을 위해서라도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구책으로 아이를 줄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하는 일은 누가 할까? 누가 청소를 하며, 택시를 몰며, 아파트 경비를 서며,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할까? 누군가 궂은 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이 세상에 강자들만 산다고 한다면 그들의 여유로운 삶이 유지되겠는가? 재판 받을 사람이 없으면 판사와 변호사가 있을 수 없고, 진료받을 환자가 없으면 의사인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강자들만 사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면 약자들도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이발사도, 식당 점원도, 파출부도 어느 정도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할 사람들은 이 땅에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기의 자식들이 그러한 인생을 사는 것이 불확실은 해야 자식을 낳을 것이다. 아마도 통계를 내어 본다면 부와 사회적인 지위는 상당 부분 세습되는 것으로 나올 것이다. 청소부의 자식이 청소부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우리 사회가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 청소부의 자식이 청소만 하게 된다면 누가 자식을 낳겠는가?
자기의 자식도 청소부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정해진 것이라면,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의 가변성, 변화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자식이 또 하위 계층에 있는 것이 고착된다면 자식 낳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들의 자식도 더 상위 계층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려면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불만이 없으면 된다. 소득은 하위 계층에 있지만 사는 것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마음이 편해서 행복하기는 그 어느 계층에 못지 않다면.
3.
인생살이가 너무 복잡하고 서로간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물질적으로는 많이 풍요로워졌지만, 긴장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밀려나지 않으려 애써야 하고, 그러다 밀려나면 끝장이다. 사는 것이 이렇게 고단하니 애를 낳지 않으려 하지. 우리의 삶이 좀더 단순하고 쉽고 여유로울 수는 없는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즐겁게 사는 것이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삶을 선택할 만큼 이 세상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기에는 삶이 가볍지 않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존재는 힘든 것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