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지그문트 바우만
옮긴이 : 함규진
출판사 : 산책자
311쪽 / 2009.1.30 / ISBN 978-89-01-09212-6 03100
서론 공포는 어디에서 와 어떻게 움직이는가
1 죽음의 공포
2 악과 공포
3 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
4 글로벌 공포
5 유동적 공포
잠정적 결론
모든 교훈담은 공포의 증폭을 통해 효과를 낸다. 하지만 고전 교훈담이 구원을 포함했다면, 우리 시대의 '교훈담'은 잔인무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구원의 약속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그런 교훈담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예측 불가능하며, 해소 불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지연될 수도 망각될 수도 잇지만, 소멸시킬 수는 없다. 그런 공포에는 현재 해법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포는 삶의 곳곳에 파고들고, 일생 동안 떠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약한 부분을 사정없이 공략하고, 인생을 끊임없고 하염없는 '숨바꼭질'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마는 무시무시한 게임으로. -죽음의 공포」중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는 몇달전 부터 읽고 싶어했던 책이었다. 수많은 책들중에 베스트셀러도 아닌 이 책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두가지 것에 기인한다. 첫째는 '유동하는', '공포'라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 때문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빨간색과 청보라색이 묘하게 조화된 책의 표지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갈망하여 읽기를 시작한 책이건만, 기다림과 이해도와는 무관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난 왜 몰랐을까.
공포에 관한 이야기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이 책은 근대사회에 내재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흔히 우리는 심리학이라고 하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알아채는, 그런 부류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심리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학술적(재미없는)이 듯이....
이 책에서 말하는 공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정의내릴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말하는 공포란 '근대'사회에 내재된 공포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란 modernity를 의미하는 것으로 옮긴이도 밝힌 것처럼 근대와 현대의 의미를 모두 가지는 어휘이다. 물론 우리말에 있어서는 근대와 현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영어라는 어휘가 가진 표현의 한정성 때문에 modernity라고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근대'를 우리 식으로 곧이 곧대로 18~19세기쯤의 시대라고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근대란 무엇인가. 그것인 인간이 신과 자연과의 유대관계를 끊어버리고, 인간 스스로 인간의 삶을 통제하기로 한 시대, 세상이다. 통제의 무기는 인간의 영성이나 감성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이성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자로 잰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숫자를 토대로 방정식을 세운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우주왕복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공의 도구들로 자연을 정복하고, 세계를 통제한다. 모든 것은 오직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좋은 것을 극대화하고 싫은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근대를 '유동적'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유동적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옮긴이 함규진도 많은 고민을 한 듯 싶다. 단지 '유동적'이라는 표현은 '약속시간이 유동적이다.'라는 표현 등에서 보듯이 '가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적'의 의미는 보다 정교한 의미를 지닌다. Liquid라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액체, 물을 의미한다.
즉, 카트리나와 같은 엄청난 힘의 (우리의 일상을 순식간에 바꿔놓을만한 충분한 힘을 지닌) 대홍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도시의 한켠, 반지하 단칸방에 몸을 누인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스며드는 습기의 흐물흐물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깨끗하고 반듯한 환경에 있더라도 습기가 차고, 눈에 보이지 않는 틈으로 물이 새어드는 것처럼 자본이나 기술, 폭력이나 마약등이 우리가 세운 경계를 자꾸만 넘나들고,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곳들을 생경한 곳으로 바꿔버리는 것이 유동적 근대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죽음의 공포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어떤 다른 성질과도 비교가 안 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성질을 침묵하게 하는 성질. 우리가 겪어서 아는, 또는 들어서 아는 모든 사건은 과거가 있듯 미채도 있다. 죽음만이 예외다. 모든 사건은 하나의 약속을 포함한다. 너무 작아서 알아볼 수 없는 글씨일망정, 잘 찾아보면 어딘가 반드시 '다음에 계속'이라는 약속이 적혀 있다. 죽음만이 예외다. 죽음에는 단지 하나의 문장만 따라붙는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죽음의 유일한 의미는 그 이후에 아무것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 일도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모든 동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이야말로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인간의 삶에는 내재된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근원적이며 원초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포를 물리치거나 억제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이 고안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 "죽음의 최종성을 부인하는 전략(죽음은 세상의 끝이 아니며 단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과정이다.)"을 들었다. 죽음을 종말(termination)이 아닌 종료(expiration)으로 봄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즉 죽음이 종말로 이해되었더라면 무의미했을 삶의 목적ㆍ의미ㆍ가치등이, 죽음의 최종성이 부인되고 죽음이후의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됨으로써 죽음이라는 야생마에게 재갈을 물려 삶의 마차를 끄는 말로 만들었다.
또 다른 전략으로는 죽음을 바라보는 고민ㆍ주의를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사건인 죽음 자체에서 돌리는 대신에 죽음의 구체적인 원인들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러한 죽음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죽음의 불가피성이 온몸으로 다가오며 허무함을 지워버릴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구체적인 원인들(질병, 사고, 노환 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죽음에 대해 저항가능하리라는 착각과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 원인을 질병때문에, 사고때문에,,로 회피해버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회피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전략으로는 일상적인 '은유적 예행연습'을 통하여 죽음의 종말성, 그 소름끼치는 진실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이름도 모르는 3인칭의 소멸은 나에게 죽음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저 인구학적/통계적 개념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그 소멸의 숫자가 아무리 크게 나타나더라도 그렇다. (이라크에 수백 명의 시민이 폭탄 테러로 희생되었다는 뉴스에도 둔감한 이유이다.) 이러한 생각속에는 아무리 많은 숫자가 소멸하더라도 그것이 회복 불가능한 상실은 아니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깃들어 있다. 하지만 내게 가깝고 내가 아끼는 사람의 상실, 나의 삶과 한데 얽혀있는 사람의 영원한 부재는 나에게 죽음의 종말성ㆍ회복 불가능성을 일깨우고 그러한 간접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죽음은 익숙한 것이 되고 '평범화'된다는 것이 바우만이 말하는 세번째 전략의 핵심이다.
악과 공포
가장 파급력이 있으며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다.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진 특징도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악의 군단의 예비군으로서 언제든 그 군대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시각은 대체로 과장이라 하겠다. 분명 모든 사람이 악의 종자로서 일할 수 있지는 않고, 일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악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게 요점이다.
[악과 공포]의 장에서는 어느 누구나 극악한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악을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다만 이름을 고치고 숨어 있는 악'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근대적 악의 평범성'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악과 관련한 논의를 위하여 나치 독일 당시 친위대 중령으로서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의 예를 들고 있다.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였으며, 우리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만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수백, 수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선택을 내린다. 마치 최근에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에서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얼굴의 우리 이웃이었음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바우만은 이렇듯 악은 누구나 '특별한 조건'만 만족시키면 가능하다라고 보았기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악에 저항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악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악에 물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최선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은 어김없이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어 오늘날의 인간관계가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더 넓은 친구와 동지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휴대폰 새 모델이 나올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을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는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잇는다고 부언한다.
누가 친구인지, 누가 악인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 상황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파트너십 보다는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추고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꿰뚫어볼 수 없고, 불투명하고, 탐색해볼 수 없는 이 안개야말로, 악이 몸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곳일 거라는 바우만의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통제불가능한 것과 공포
카트리나는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다 같이 치고, 부자도 빈자도 구별하지 않고 휩쓸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통제불가능한 것과 공포]에서는 근대적 발전의 낭비지향적, 자기파괴적 경향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우회전략'에서 찾고 있다. 자동차 운전자가 실제 이동하는 거리를 운전하는 시간, 자동차 정비하는 시간,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한 비용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한 시간의 합으로 나눠보면, 인간의 공간 이동 속도를 시속 4마일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증가시키도록 만들어진 내연기관은 겨우 보통사람의 걷는 속도 수준이라는 것이다.
근대 의학에서도 이러한 '우회전략'이 존재하는데,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희생해서 계속적인 의료 서비스와 약품 복용으로 유지되는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등록금 대출이자를 갚기위해 어쩔 수 없이 묻지마식 취업을 선택하여야 하고, 그렇게 적성ㆍ소질없이 들어간 직장에서 십 수년간 열심히 일하여 대출이자를 갚고,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을 시기가 되면 그동안 경쟁때문에 무리하였던 몸에 이상이 와서 벌어놓았던 돈을 모두 병원에 가져다바치는.......... 오늘날의 그러한 무시무시한 사이클이 고착화 되어가는 듯한 것도 우회전략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은 듯 하다.
유동하는 공포
표지에는 "시시각각 현대인의 일상을 위협하는 불확실한 공포의 실체와 맞서다"라는 표현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저 문구만 보고 이 책이 '현대인이 느끼는 다양한 공포'를 다루는 그런 사회심리학적 부류의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왕성했던 나의 지적호기심을 단박에 잠재울만큼 어려웠다. 마치 책을 읽고 서평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정도로...
이 책이 쉽게 다가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책의 주제 때문일테다. "현대인이 느끼는" 실재적인 공포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기대는 산산히 부서졌을뿐이다. 이 책은 근대사회(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여기서의 근대란 현대를 포함한다)로 진입하면서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중에서 공포라는 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 책이다. 그렇기에 결코 쉽게 읽힐수가 없는 책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아마도 저자의 표현자체가 난해하였을 듯 싶다. 드문드문 이해하기 쉽게 서술한 부분도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의 대부분은 어렵다. 물론 내용상으로 어려운 부분도 존재하거니와 문장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명쾌하게 표현된 문장이 아닌, 끊어읽기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음직한 문장들도 몇몇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옮긴이 함규진의 잘못은 아닌듯 싶다. 그러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옮긴이의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함규진은 이 책의 핵심을 꿰뚫는 내용들을 차분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이 읽는 이에게 사실상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하다. 옮긴이 함규진은 '이 책을 읽으며 왠지 매끄럽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우만의 잘못이 아니라 옮긴이의 잘못임을 알아주시기를.'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지나친 겸손의 말인듯 싶다.
「유동하는 공포」는 쉬이 읽어내려 버릴만큼 쉽게 다가오는 책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다 읽지도 못하고 포기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한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흐릿한 무엇인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막연한 그 느낌)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내 주위를 맴도는 공포들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를 한번쯤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둘만한 가치가 있다.
□ Book Review
이 책을 읽는 내내 공포가 엄습했다. '다 읽을수는 있을까?', '다 읽고나면 이해가 될까?', '다 읽고나면 서평을 쓸 수 있을까?' 모든 공포가 그러하듯 나에게 엄습했던 그러한 공포들도 막상 부딪히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였던 이상으로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아....그렇다고 하여 책이 쉬웠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였는지는 나에게 또 다른 공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