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동국대학교 해양문화연구소 소장
1 서론
역사활동에서 집단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환경을 포함한 객관적인 상황은 비교적 변화의 폭이 작고, 주체집단의 존재여부와 관련 없이 늘 존속하고 있다. 따라서 주체의 위치와 자격, 능력 등은 역사발전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새로운 집단 내지 그 결정체인 국가가 성립되었을 경우에 그것의 당위위성과 명분을 제공해줄 정체성은 의미가 크며, 그것의 주 내용인 정통성과 계승성은 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었다.
세계화 시대에 즈음하여 존재이유와 존재방식을 찾기 위한 시도로서 각 민족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현재 한국 내지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논하고 확립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초의 국가인 조선은 실체가 불분명한 점이 많고, 한과의 대결에서 패한 이후에 역사상의 단절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최초의 국가인 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대였고, 유사한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단절을 메꾸고, 심리적으로 남은 역사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긍정적인 역사행위를 이룬 국가로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역사를 운용해왔으며, 현재는 상실한 북방영토를 실질적으로 경영했던 나라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의 정당성을 찾기 위하여, 또한 조선의 실체를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고구려가 발전한 배경으로서 정체성의 내용도 살펴보고, 또한 고구려 건국의 정신과 목적이 조선의 계승성과도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과정도 그러하지만, 조선의 주민 영토 문화단계 정체 등 실체에 대하여 다양한 설이 있고, 불분명한 것이 적지 않아 논리를 구성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한계를 전제로 하면서 그 계승성 여부를 우선 사료 금석문 등을 활용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다음 단계로 고고학적인 발굴과 연구성과, 그리고 신화를 기저로 몇 가지 문화지표를 활용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장 역사에서 계승성의 문제.
역사활동을 지속하는 한 단위 속에서 집단의 특성을 파악하고 성격을 유형화시켜 이해하는 것은 필수기본조건이다. 共同體 意識을 공고히 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집단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목표를 설정하려면 집단의 성격을 명확히 아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구성원들이 公屬意識을 갖고, 공동의 역사경험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면 비교적 갈등과 충돌이 적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집단은 다른 집단과 경쟁을 하거나 갈등을 빚으며,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성 속에서 자기집단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자기 집단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이유가 있고, 또한 그러한 이유를 정당화시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생성과정이 불투명한, 갑자기 역사에 등장한 민족들은 그 출자의 애매모호성 때문에 본능적으로 항상 다른 민족과 구별되려고 하며, 또 先占集團과는 본능적으로 경쟁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자아가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에서 진보의 동력은 자아의식에서 부터 나온다. 자아의식이야 말로 사회를 밝게 하고 민족과 역사를 진보시키는 에너지이다.
대외적으로 팽창을 지향하는 국가 혹은 대외관계모순이 심한 국가의 경우에는 내부모순을 잠재우고,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게 하가 위하여 정당성을 강조해야 한다. 특히 정복국가인 경우에는 이미 정치 군사적으로 패배한 피정복민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사상적으로 친화시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행위가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선행국가 내지는 다른 집단과 계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동일한 지역에서 기존의 세력을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제거하고 신질서를 구축한 세력들도 합법을 가장하고,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선행질서를, 관념적으로는 하늘을 뜻을 계승한다는 의식과 행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새로운 정치세력들은 거의 예외가 없이 자기정당성 내지 계승성을 주장한다. 신흥국가가 탄생한 이후에는 동서고금의 예외 없이 새로운 해석을 가한 역사서가 편찬된다.
한국역사 속에서도 실제로 후발 국가들이 선행국가들을 계승했다고 자처한 예는 역사상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등 끊임없이 이름을 계승하며 신흥국가들이 탄생했다. 백제는 졸본부여를 탈출하여 건국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계승성을 시조신앙(동명제의)의 실천, 국호 사용 등을 통해서 실현해갔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 소고구려 후고구려 등을 세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건국한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續日本紀}에는 발해의 제2대 무왕인 大武藝가 聖武天皇에게 보낸 國書에서 고구려의 거처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고 썼다. 같은 책에 역시 제3대 문왕인 大欽武가 역시 국서에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하노라...(高麗王大欽茂言...) 또 권32에는 대흠무가 국서에서 '천손(天孫)'으로 자칭했다고 하였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渤海郡者 舊高麗國也)라고 하여 계승하였음을 인식하고 있다. 나라현 평성경에서 발견된 木簡에는 依遣高麗使廻來 天平寶字二年 十月 八日 進二階級라고 하여 고려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유사한 명칭을 갖고 복국운동을 펼쳐졌다. 후발해국이 세워졌다가 935년에 멸망했고, 그 후에도 定安國, 兀惹國, 興遼國, 大元國(大渤海)등을 세웠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는 백제를 계승하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만큼 선행국가의 계승의식은 중요했고, 실제로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계승성은 매우 중요하다. 남북이 각각 국명을 달리 설정한 일이나, 건국의 정통성과 계승을 달리 구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이러한 계승의식은 과거 역사를 해석하는 일에서도 나타난다. 남한은 삼국사기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삼국통일의 의미를 강조하고, 신라 정통론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은 조선민족 단일혈통론을 주장하고, 또한 조선과 고구려의 실질적인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만치,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계승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구려의 정통성과 고조선 계승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미묘한 문제인가는 이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인식태도와 역사기술을 보면 알 수 있다.
1940년대에 김육불(金毓 )은 '고구려 일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와, 우리 중화민족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지금 동북 국경지방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 뒤 孫進己의 『東北民族史稿』, 張博泉 등의『東北歷代疆域史』, 譚其 의『中國和中國歷代疆域』, 張博泉의『東北地方史稿』, 薛虹 등의『中國東北通史』,翁獨健 등의『中國民族關係史綱』,王仲翰 등의『中國民族史』는 모두 고구려족은 중국 고대의 한 민족이고 고구려국은 중국 고대의 한 지방정권이라고 보았다. 특히 孫進己 [關於高句麗歸屬問題的畿個爭議焦點]에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1993년 회의 당시에 孫進己는 "우리는 고구려를 중국의 영토라고 본다. 오늘의 국경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우리 나라 중앙 皇朝에 예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조선족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현재 중국의 각 민족에 속해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는 영토적 주민적 계승성을 인정하고, 정체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중국의 이러한 인식은 발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발해는 우리나라 당 왕조가 관할한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다. (渤海是我國唐王朝轄屬的少數民族地方政權) 楊昭全({求是學刊}, 1982-2) 또 발해국은 우리나라 소수민족이 건립한 하나의 지방정권이다.(渤海國是我國少數民族建立的一個地方政權) - 嚴聖欽({社會科學輯刊}, 1981-2) 등 등이다. 일본 또한 한국을 대상으로 삼은 식민사관을 만들 당시부터 계승성의 의미와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그를 토대로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사를 해석하였다. 결국은 우리역사의 연속성 정당성 계승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체성을 파괴 시키므로서 자신감을 상실케 하여 궁극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에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3장 역사적 관점
고조선이란 단어와 개념 속에 기자와 위만을 포함시키는 견해도 있고, 한편 기자를 부정하기 위하여 한씨조선, 예맥조선, 개아지조선 등의 용어를 설정하고 단계를 부여한 견해도 있다. 북한도 대체로 위만조선도 고조선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반해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은 고조선과 직접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윤내현 ) 본고는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을 논하는 본고의 주제를 고려해 고조선 자체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고,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범칭하면서 논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정한 집단 혹은 국가의 계승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다. 주민, 영토, 세계관, 생활양식 등은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함께 중요한 것은 당시에 전개된 시대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생각, 즉 인식이다.
고구려의 종족에 관해서는 몇 개의 기록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濊貊과 깊은 관련이 있다. 東夷나 濊貊은 종족 명칭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또는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서 구분된다는 견해도 있다. 즉 예는 북쪽의 눈강 유역, 맥은 남쪽의 渾江과 鴨綠江유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김정배는 濊貊族이라고 부르면서 한민족의 주체구성원으로 파악하였다. 濊와 貊, 혹은 예맥은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 시대인이다.
북한은 고조선 부여 진국을 기원전 1000년 기를 전후하여 성립하였으며, 하나의 핏줄을 가진 족속으로서 공통된 문화와 같은 언어를 가진 조선 사람이었다 라고 하여계통론을 세우고 있다. {전사}에서는 고구려 국가를 세운 기본 주민은 고대 조선족의 한 가지인 맥족(貊族)으로, 기원전 8세기 고조선 변방인 혼강(渾江) 유역과 압록강(鴨綠江) 중류 일대에서 살아왔다.고 하였다. 맥국은 기원전 3세기 초 경에 연에 멸망했고, 그들의 후신이 고조선의 옛 땅에서 고구려를 이루었다. 혼하 상류지역에서 요동반도 서부지역까지에 고조선의 진번국이 있었고, 그곳에 맥국의 유민들이 이동하여 살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가 발생한 지역은 [일찍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부터 이 지방에 졸본부여(卒本夫余)가 있었는데, 졸본부여(卒本夫余)는 고조선 옛 땅의 한 작은 나라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어느 곳에서 건국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이 지방에 수많은 고조선인이 살고있었다.] 라고 하여 주민의 자연적 계승성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북한은 고조선의 중심종족은 예족이나, 부여 고구려의 기본주민인 맥족도 고조선을 구성한 주요종족의 하나이라는 다소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句麗 貊夷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삼국지에는 小水에 의탁한 小水貊과 大水에 의탁한 大水貊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때 소수를 渾江으로 대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李丙燾 이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한서에서는 고구려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예맥을 사용한 사례도 있다. 최근에는 만발발자 유적의 연구와 유물들을 통해서 고구려가 맥족이라는 견해가 또 나오고 있다. 예맥의 용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고조선의 종족, 고구려 종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예와 맥, 혹은 예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조선의 영토에 대해서는 요동설, 평양설 이동설 등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요하 이동과 현재의 남만주 그리고 한반도의 서북부 지방이었음은 분명하다. 북한은 1960년대 초반기에 집중적으로 고조선문제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고, 토론회 등을 활발하게 개최하여 1963년도에 {고조선에 관한 토론집}으로 출판되었다. 리지린은 1963년에 {고조선 연구}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발굴조사를 중국 측과 공동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조선 문화의 공간적 범주가 결코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고조선문화의 시간적 상한이 기원전 1000년 기 전반기까지 소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산동의 제나라와 교역을 하였다는 {관자}의 기록, {산해경}{전국책} 등을 인용하여 고조선이 요동을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주장을 하였다.그후 {고조선문제 연구론문집}(1976) 등에서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대릉하이며, 수도인 왕검성은 요하하류의 동쪽 해안지대이다. 남쪽은 대동강을 넘어 예성강까지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최근에 들어서 대동강문화론을 내세우며 평양중심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요서지방도 고조선과 관련 있다는 견해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다. '夏家店上層文化'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됐다. 김원룡이 동호족의 것으로 본 이후 金貞培가 '濊貊 1기문화'로 분류하였다. 김정학은 요서지역을 주목하여 역시 朝陽文化로 이름짓고, 이 문화를 고조선을 맹주국으로 하는 연맹국가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추측하였다. 그 후 韓昌均 역시 요서지역이 고조선과 관계가 깊음을 주장하였고, 이를 '고조선 3기 문화'라고 파악하였고, 하층문화는 고조선 2기문화로 편입시켰다. 그는 나아가 고조선은 유사의 기록을 넘어 그 이전부터 발전해왔다는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다. 尹乃鉉은 요서의 범주를 더욱 넓혀 河 이동지역을 고조선문화로 보고 있다. 한편 남으로도 인식을 확대하여 다른 조선의 존재를 설정하고 청천강 유역도 고조선 영토 내에 속한다고 하였다. 林秉泰 역시 요서의 고대문화 주인공은 예맥족이 이룬 고조선이라는 주장을 한다. 복기대는 요동지역 및 한반도문화권과 가까운 관계임을 주장하였다. 그 외 중국의 翟德芳 林澐 등은 비파형 동검문화가 조선이나 예맥 계통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고조선의 영토와 중심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한반도의 북부와 요하 일대 그리고 현재의 남만주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기원 전 2세기까지는 존속한 정치세력이었다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 고조선은 정확한 실체를 규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황해북부의 교역권과 동아시아 동부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漢세력과 대결을 벌였으며, 기원전 108년에 전쟁에서 패한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한 국가가 멸망했다는 것은 국체가 소멸하여 정치적으로 진공상태가 되었고, 정체 즉 지배담당자가 바뀐 것이다. 하지만 주민의 다수는 그 땅에 그대로 살고, 문화의 일부는 변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때로는 충분한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국가를 되찾거나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일반론에 근거할 경우에 고조선의 주민들은 통제력이 약한 주변부를 거점으로 한군현에 저항하고 부흥운동을 펼치면서 소규모의 정치형태를 갖추었다. 한사군의 이동과 급속한 소멸은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진번 임둔을 몰아내고 기원전 75년에는 현토군을 몰아냈다. 고구려는 건국기원의 시기, 단계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세력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소국이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고구려는 일찍부터 고조선의 실력 있는 지방정치세력, 즉 후국(候國)이 되었다.라고 하여 후국체제를 설정하고 있다.
고구려는 東明聖王 때부터 沸流, 荇人, 北沃沮 등을 정복하였고, 이후 초기의 왕들은 梁貊 盖馬 句茶 東沃沮 曷思 藻那 朱那 등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였고, 수 차례에 걸쳐 부여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중국의 잔재세력들을 몰아내고, 요동 요서로 진격하여 영토를 넓히는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신흥국가로서 정치적인 성장을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고조선 땅을 회복하고 계승하므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과거에 비강단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장됐고, 윤내현 등이 보다 과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도 소국통일운동으로 본 바 있다. 북한에서도 1970년 대 이후에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데, {전사}는 건국초기에 주변의 소국들을 공격하여 정복하는 일을 고조선 세력을 결집하는 행위라고 해석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에 대해서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주장해왔다. {통사} 2 에서 고구려는 고조선의 생산력과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고구려국의 성립은 고조선 사회 내부의 반노예제투쟁이자 고조선을 무너뜨린 중국세력을 상대한 반침략투쟁으로 인식, 서술하고 있다. 이후 {전사} 3권의 발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사 서술의 기본틀로 쓰인다.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치열하고 완강한 세기적인 투쟁을 이끌어간 나라였다 라는 주장은 역사적인 계승성을 의미한다.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 이른바 '대동강문화론'과 함께 고조선 부여 진국 외에 구려국을 {전사}의 고대편에 기술하였다. 고조선은 강상무덤이 축조된 시기(중기 비파형 단검시기)인 기원전 8세기보다 더 먼저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하였고, 부여는 기원전 7세기, 구려는 기원전 5세기 이전으로 보아 고구려의 건국시원을 보다 높이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멸망시기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건국시기 사이에는 오랜 기간이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을 주장하기에 시간적 연속성이란 측면에서 무리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당시에 전개된 일반적인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구려는 그 지역의 선행국가요 문화인 고조선을 계승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을 사료 등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료는 기록인 만치 사실여부와 함께 기록집단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1차적으로는 집단주체들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2차적으로는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변존재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고구려인들은 그 계승성은 어떻게 기록하고 인식하였을까?
고대인들은 건국신화에 자기존재에 대한 해석과 역사적 경험, 목표,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메세지 등을 표현했다. 廣開土大王陵碑, {三國史記}{삼국유사},{동국이상국집} 魏書, 그리고 北史 등의 중국 사서들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 혹은 건국과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역사주체의 기록이며, 당대의 사료이고, 가장 정확한 것은 廣開土大王陵碑文이다. 본문의 첫머리에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地'와 '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라는 구절은 북부여에서 비롯됨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20년 조에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라고 하여 東夫餘와 관계가 깊은 계통임을 주장하였다. 동일한 시대의 금석문인 {牟頭婁墓誌名』에도 '-河伯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라고 하여 북부여를 계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三國史記} {三國遺事}에는 東明이 東夫餘에서 出自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삼국유사} 북부여조에서는 "東明帝繼北夫餘而興, 立都于卒本川, 爲卒本夫餘 "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명과 주몽은 항상 동일한 인물은 아니나, 고구려 시조로서의 동명은 부여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중국 측의 사료에도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인식이 반영되고 있다. 즉 {魏書』의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周書』고려조의 '高麗의 선조는 夫餘', {隋書』고려조의 '高麗之先, 出自夫餘, 夫餘王嘗得河伯女,--- 名曰朱蒙', 또 {北史』고구려조의 '高句麗, 其先出夫餘王嘗得河伯女',라는 기사 등이 그것이다. 동명신화는 만주일대에 포진한 범부여계의 신화이고, 고구려는 부여계의 적장자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신화도 계승하였을 것이다. 한편 {新唐書} 流鬼傳에 '達未婁自言北夫餘之裔. 高麗(즉 高句麗)滅其國, 遺人渡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魏書} 豆莫婁國傳의 豆莫婁國는 '舊北夫餘也'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여 혹은 북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유귀 두막루국 등 북방계 정치집단들의 母集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부여인들은 자신들이 亡人의 후손이라고 말하였다.('國之耆老 自說古之亡人') {魏略}에 따르면 부여의 건국이전에도 고리(索離, 離, 藁離, 離)국이 있었다. {상서}나 {일주서} 등을 보면 기원전 12세기에 구려란 나라가 주와 교섭을 하였다. 구려는 기원전 277년에 건국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句驪國이 기원전 5세기 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집안 북쪽인 대평의 오도령 부근에서 발견된 무기단 돌각담 무덤, 세형동검 등은 기원 전 5~4세기의 것으로 고구려의 것과 유사하다.이들 세력들과 부여 혹은 조선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고구려가 부여가 아닌 조선을 계승했다는 사실과 인식을 알리는 기록들도 있다. {삼국유사}는 朝鮮(王儉朝鮮, 古朝鮮)을 최초의 국가로 설정하고, 그 후에 건국한 국가들의 역사를 차례대로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조선정통론이 보여진다. 그런데 王曆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 朱蒙--鄒蒙 壇君之子)로 기술하여 고구려의 '조선계승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고조선 조항의 마지막 구절에는 '唐 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周以封箕子爲朝鮮,漢分置三國, 謂玄 樂浪帶方(北帶方),라고 하여 고죽국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 고죽국에 대해서는 동이의 국가로서 유물이 발견되었고, 고조선의 한 국가였다는 설이 있다.(이형구)한편 삼국유사는 단군기를 인용하면서 단군이 非西岬의 딸과 결혼하여 夫婁를 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단군이 주몽이라는 인식이다.
{帝王韻紀} 또한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 라고 하여 고구려 등의 국가들은 단군의 자손임을 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어 [漢四郡及列國紀]에도 '--三韓各有幾州縣---數餘七十何足徵,於中何者是大國, 先以扶餘沸流稱,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부---世系亦自檀君承.'라고 하였다. 운기는 {국사}의 檀君本紀를 인용하여 非西岬 하백의 딸이 부루를 생하였다 하고, 또한 宋讓이 '疑壇君之後'라고 하여 단군과의 계승성을 주장하고 있다. 비록 후대의 기록들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고려인들의 인식이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東川王 21년(247년)조의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라는 기사 역시 단군이 평양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당시에도 단군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舊唐書}에는 '其俗多淫祀 祀靈星神 日神 可汗神 箕子神'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가한이 가진 정치군장적인 의미, 언어학적인 의미를 고려해 可汗神을 단군으로 비정하고, 이미 고구려 시대에 단군과 기자를 제사했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 측의 사료에도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周나라의 {逸周書}에 고구려가 成周(현 洛陽)에서 참여한 성주대회에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商書 편에는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였을 때 숙신이 와서 축하하였다는 귀절이 있는데, 孔安國은 주석하기를 해동의 여러 夷族은 駒麗 扶餘 韓 貊 등과 같은 족속인데 무왕이 商나라를 이기니 모두 길이 통하였다. 고 하였다. ( 윤내현)
{후한서}에는 濊傳에서 "濊及沃沮 句驪本皆朝鮮之地也."라고 하여 조선 땅에 있다. 고 하여 영토적으로 고조선을 계승하였음을 알려 준다. 역시 같은 책의 高句麗傳에서 고구려는 부여의 別種이라고 하였고, 東沃沮전에는 언어가 구려와 대체로 같으며---, 濊傳에서는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구려와 같은 종으로서, 언어와 법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라고 하여 종족적 계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은 해당국가들이 존속하고 있었던 당 시대에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는 종족적으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집단임을 스스로 혹은 중국인들(객관적으로)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수서} 배구열전, {구당서} 및 {신당서} 배구열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영양왕조에는 隋煬帝와 고구려 사신이 돌궐의 啓民可汗의 장막에서 만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라는 글이 있다. 역시 고구려와 고죽국 간의 영토적 계승성을 인식하고 있는 대목이다. 한편 『括地志』에는 '평양성은 본래 漢의 樂浪郡 王險城으로서, 옛 朝鮮이다.' 라고 하였다. 이들은 고구려의 후기 수도였던 현재 평양지역을 낙랑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역시 평양을 매개로 삼은 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은 여러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漢 樂浪郡의 옛 지역으로 표현하였으며, 『通典』은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은 옛 조선국 王險城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唐 시대의 금석문인 {泉男産墓地銘』에는 '東明之裔, 寔爲朝鮮, 威胡制貊, 通徐拒燕("東明의 後裔가 참으로 朝鮮을 세워 胡를 위협하고 맥을 제어하여 徐州와 통하고 燕을 막아 지켰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기록한 금석문과 후대의 기록, 중국인들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에 고구려는 부여와 조선의 계승의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국의 계승성을 국가를 발전시키는 명분과 힘의 근원으로 삼았다. 부여와 고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일반적인 견해를 수용하여 부여는 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고조선의 정치체제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였다.
4장 고고학적 관점
국가단위 간의 계승성을 주장할 때에 핵심요소 가운데 주민과 영토, 인식 외에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계승과 共質性이다. 이 글에서는 고조선 지역의 고고학적인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고조선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그것이 고구려로 계승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승성의 구현은 일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시기 별로 추진되며,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데 복잡다단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묘제의 보존과 계승이 동일한 집단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형식과 기능 분포범위의 유사성은 집단의 계승성을 입증하는데 유효성이 있다. 역시 다양한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고조선의 기본적인 무덤양식은 지석묘이며, 고구려 전기의 기본적인 양식은 적석묘이다.
고인돌은 기원문제와는 별도로 고조선의 전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요동지역에는 남단 盖州市의 石棚山 고인돌을 비롯하여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이 약 100여기가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남만주 일대 고구려의 중심영역에서도 고인돌은 많이 발견되고 있다. {通化縣文物誌}의 소개에는 고구려 이전의 청동기시대 묘장인 砬縫石棚과 西江墓地 두 곳을 소개하고 있다. {通化市文物誌}에는 고구려이전의 고분으로서 西山南坡墓群은 原始社會의 무덤이고, 金廠南頭屯에 石棚이 두 곳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撫松縣의 松郊鄕 撫生石棚, 柳河縣의 蘭山鄕 野猪溝石棚, 善家店鄕 三塊石石棚, 太平溝石棚(이 지역에 또 石棺墓가 있다), 安口 大沙灘石棚, 長安石棚, 太平川 集安屯石棚 등이 있다. ( 孫進己 [中國高句麗 考古硏究에 對한 綜合考察]{ 高句麗 遺蹟發掘과 遺物} 제 7회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고구려연구회, 2001, pp 47~ 58 . 河文植 또한 위 인용책에서 분포도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 분포 지역은 고구려의 초기발생 지역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서북지방, 황해도 일대, 그리고 남으로 내려오면서 크기와 형식은 다르지만 골고루 있다. 그런데 북한은 최근에 대동강 문화론을 주장하면서 평양이 고대문화의 중심지라는 근거로서 고인돌의 존재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평양일대에 수 천 개의 고분이 있는데, 안주군과 연탄군 일부를 포괄하는 황주천 류역일대에 약 1100여기가 있다. 특히 평양일대는 고인돌의 발원지로서 기원과 관련되는 초기의 시초형으로부터 중기형 말기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이 다 보인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고인돌과 고구려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알려진 적석묘는 축조의 시간적인 격차를 두고 거의 유사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지역적인 계승성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변형고인돌을 토대로 고구려의 적석총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80년에 李殿福은 [集安高句麗墓硏究]에서 집안현에 12,358곳의 高句麗墓가 있음을 밝히고, 구분하여 石墳은 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제적석묘, 방단계제석실묘, 封石洞室墓로 나뉘고 土墳는 방단봉토석실묘, 방단계제봉토석실묘, 土石混封石室墓, 봉토석실묘로 나누었다. 적석묘는 집안현 외에도 만주의 전지역에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근년에 압록강 중하류의 장백 조선족 자치현의 幹溝子 등지에서 이와 같은 적석묘 군이 발견되었는데 동일한 墳壟에 많은 石壙이 있었다. 이것을 고구려 적석묘의 淵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집안 등 압록강 중하류는 물론이고, 요녕성의 각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陳大爲의 {遼寧境內高句麗遺迹}에 따르면 遼寧省의 고구려 고분은 주로 太子河, 渾河, 淸河上源 및 渾江 中·下遊와 富爾江流域의 兩岸에 분포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주로 鐵嶺, 撫順, 本溪, 丹東 등 동부지구에 분포되어 있는데 본계지구에 가장 많다. 辛占山은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에서 고분들이 모두 渾江 및 그 지류부근에 있고 그 중 五女山 아래의 동남부에 제일 밀집해 분포되어 있으며, 高力墓子, 連江의 고분 形制는 園丘式 積石墓와 階壇式 積石墓가 주를 이루는데, 이는 모두 고구려 초기 고분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梁誌龍·王俊輝은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及相關問題}에서 "환인의 청동유물고분은 시대가 西漢시기 혹은 약간 이른 시기에 집중되어 고구려 부흥시간과 접근하거나 이어져 고구려초기문화에 작용과 영향을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 초기문화를 연구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중요자료이다."라고 하여 고구려 계승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許玉林·崔玉寬 등은 丹東 鳳城縣 東山 大石蓋墓群를 보고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과 약 3000년 떨어져 있고 이것이 고구려선인과 관련이 있는지는 더욱 고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인 大連市 甘井子區 四平山과 旅順 老鐵山,將軍山 等地에서도 적석묘는 비교적 일찍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는 강상무덤 루상무덤이 있는데, 이는 무기단 적석총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 적석총의 초기등장이 기원전 2~ 3세기로서 시간적 간격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두 묘제는 지역적인 일치성 외에 형식면에서도 관련성이 있는 듯 하다. 石室墓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묘제인데, 그 기원문제는 중국학계에서 대략 세 가지 의견으로 정리되고 있다. 첫째, "고구려 석실묘의 기원은 당연히 石棚墓(支石墓)-石棺墓를 계승 발전하였다." 둘째, "적석묘는 자생 발전되어 나타난 것이다." 셋째, "석실묘의 기원은 한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직접 한문화를 받아들여 나타났다."고 하여 고인돌이 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전기 핵심지역인 혼강 중, 하류와 태자하, 혼하 상류의 요동지구에서 大石棚을 이어 大石蓋墓,石蓋積石墓,石棺墓를 위주로 한 短劍이 있는 청동시대 고분이 근래에 많이 발견되었다. 그 대표적인 장소는 신빈현 南雜木, 永陵鄕 包家村 북쪽 산의 石棺墓; 환인현 사도하자향 대전자 石棺墓 무덤떼, 本溪縣 이도하자 石棺墓, 봉성현 西赫家堡 石棺墓 등이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적석묘와 고인돌은 시간적으로 계승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達·張正岩은 {遼寧省新賓縣黑溝高句麗早期山城}에서 "이 구역에서 석붕과 소형 적석묘를 발견했는데, 그 중 소형 적석묘는 고구려초기고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제기하고 있다. 長白朝鮮族自治縣에는 고구려 이전의 고분에는 十四道溝 電站墓群, 金華 東江墓葬, 十一道溝蛤 川墓葬, 十四道溝幹溝子墓群이 있는데, 모두 청동기시대에 속한다. 靖宇縣에는 고구려 이전의 고분은 楡樹 林子墓葬 고분이 있는데, 山頂竪穴岩石墓에 속한다. 延邊地區에서는 고구려 고분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모두 청동기시대의 고분과 沃沮人의 고분이다. 고구려가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고분과 옥저인 등의 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은 문헌과 역사상에서 나타나듯이 고구려와 옥저의 종족적 문화적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萬發撥子(속칭 王八 子) 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 중류의 鴨綠江 渾江 중류의 유지로서 "2강"유역이 있다. 3, 4기 유지는 요동 맥(맥이)의 문화유지이다. "이 유적의 '제4시기'를 대표로 한 石室火葬墓는 '길림성 남부 전국말기로부터 한나라초기 고분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積石墓,階壇積石墓는 고구려시기의 일종 특수한 화장습속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결론은 기본적으로 정확한 것이다. 보충해야 될 것은 大石蓋墓,石棺墓,積石墓와 화장습속을 대표로 한 춘추전국부터 한나라초기까지의 고분형식은 혼강 중, 상류의 '길림성 남부'뿐만 아니라 혼강 하류와 혼하, 태자하, 상류인 집안, 임강과 요동 산지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고구려 전기 영역과 지역적으로 일치한다. 전형적인 예는 1978년 집안 太平鄕五道嶺에서 발견한 정방형계단식 積石墓로서 청동단검을 부장하였다. 만발발자 3, 4기의 고분 구조 및 출토한 銅短劍,銅泡,銅斧등 동류의 청동기와 기본적으로 같다. 결국 압록강 중류의 임강과 혼강 중류의 만발발자 유지는 "2강"유역의 전형적인 '고구려 선대' 맥족의 석구(石構)고분에서 화장 습속을 가진 것과 공동적인 특징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면후는 "만발발자 4기는 고구려 조기의 토착유적"이라는 보고서를 긍정하고 "고구려 선대 유적"이라고 다시 부르고 있다. 이어 金旭東이 만발발자 유지의 주된 내용을 분석할 때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高句麗出于夫余)'(서단산문화)라는 관점은 고고학적 의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부여 계승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묘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적석묘는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고조선의 일부 주민들에 의해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인돌과 적석묘는 통칭 고조선이라는 역사시대에서 유사한 지역에서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교차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적석총의 발생시기는 기원전 3세기 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독로강 유역의 노남리, 심귀리의 적석총을 근거로 편년화 한 것이다. 정찬영은 강돌로 만든 적석총은 기원전 2세기 경에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다. 참고로, 북한은 魯南里遺蹟은 기원전 3세기 이전의 문화층이며, 雲坪里 4지구 8호 무덤에서 나온 주머니식쇠도끼는 고조선시기의 버선코모양의 청동도끼(銅斧), 句麗國의 五道嶺溝門墓에서 나온 버선코모양청동도끼 및 로남리유적 웃문화층과 북창군(北倉郡) 대평리(大坪里)의 초기고구려유적에서 나온 쇠도끼와 생김새가 같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원전 3세기경의 유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결국 고구려가 고조선을 시간적 단절없이 그대로 계승했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무덤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고인돌을 초기에는 일종의 종교기념물이나 제사기능을 하는 장소로 인식하였다. 중국에서 石廟子 石棚墓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발굴이 이루어져 무덤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고 나서는 고인돌은 제단과 무덤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요녕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 가운데에는 조영위치도 좋고, 지석과 개석에 기호와 신상이 새겨져 있다. 북한지역도 은률의 관산리와 운산리, 배천의 용동리, 용강 석천산에서 조사된 지석묘 등은 조영상의 특징이 제단의 기능을 겸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積石串墓 Ⅱ,Ⅲ식에서 '墓舌'이라는 형식이 발견되고 있다. 적석묘의 아래 비탈 묘역변에 쌓은 것인데 방형, 반원, 반원형 계단식이 있다. 유실방지라는 토목공학적인 관점 외에 제사시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근래에 압록강 중류 左岸의 조선 경내인 慈江道 楚山郡, 滿浦市 등지에서 많은 고구려 적석묘가 발굴되었는데 무덤 언덕에 낮은 제단 시설이 발견되고 출토 유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그런데 운평리 송암리 등의 지역에서 전방후원분의 원형이 있다는 북한이나 일본 등에서 주장되어왔다. 고구려의 무덤에 제단시설을 갖춘 형태가 있었다면 天孫思想과 祖上崇拜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고인돌의 제의기능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장군총의 개정석 위에 건물이 있었다. 이를 李亨九는 東夷系의 亨堂說을 주장했고, 申榮勳은 佛塔說을 제기했다. 또한 집안 외곽 4회분들 위에 개석들이 덮여져 있는 사실, 또 고구려의 무덤에 '墓上入碑'라고 하여 돌을 올려놓은 것 등은 일련의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와 토기이다. 이는 고조선의 문화는 물론 담당자인 주민들, 그리고 영역까지를 추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고조선의 첫 시기는 기원전 8~7세기 미송리-강상시기라고 부르는데, 비파형 단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7-5세기 묵방리-루상시기로서 전형적인 것과 함께 변형 비파형단검 이 있다. 묵방리 류형의 변형 고인돌은 서북조선과 료동지방의 문화적 공통성을 잘 보여주며, 두 지역 사이의 련계가 다른 어느 지방과도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미송리형 토기는 요동비파형 단검문화의 주인공과 관련하여 주목받게 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서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미송리형 토기는 서쪽으로는 요하-대능하선에서 부터 한반도에서는 두만강 유역, 압록강 유역, 청천강 유역 그리고 대동강 유역 및 황해도 지역이다.특히 압록강 유역은 신암리 미송리 용연리 유적이 있다. 그런데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는 청동기문화는 후기에는 주변으로 확산되어 길림의 서단산 문화와 대동강 유역의 팽이형 토기에도 영향을 주었다.북한은 근래에 들어서서 요동중심설을 수정하면서 팽이형 토기를 주목하고, 이것을 고조선문화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문화를 고대 조선족 전체의 문화로 보고 있다. 그리고 분화를 시도하여 요동 서북조선의 비파형 단검문화는 고조선문화, 즉 예족의 문화로 보고, 요서지방, 길림-장춘지방 등 양 지역의 비파형 단검문화를 맥족문화로 보고 있다. 세죽리- 련화보류형유적은 서북조선문화로서 좁은 놋단검 관계 유적이 발견된다. 이 유적은 기원 전 1000년 전반기의 고조선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기원전 3~ 2세기의 고조선문화였다고 하였다. 이형구는 비파형동검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라고 명명하고, 고조선 강역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집안에서 고구려 이전의 靑銅短劍이 方壇階梯積石墓에서 발견되었는데, 상한은 기원전 3세기말이며 하한(下限)은 기원전 1세기초이다. 이렇게 비파형에서 세형으로 변해가면서 고조선 문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구려가 급속하게 대두한 것을 고조선 사람들이 제철기술을 고구려인이 이어받아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생산력을 발전시킨 결과로 인식한다. 즉 고조선의 제철 鑄造유적인 세죽리-연화보류형유적을 계승한 것이 고구려의 시중군 로남리의 鍛造유적이라는 것이다. 즉 기술의 계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5장 사상적 관점
한 국가가 선행국가를 계승하였다고 할 경우에 사상적인 체계란 중요하다. 현대처럼 이데올르기 지향 사회가 아니므로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신앙이나 세계관 등은 계승성 여부를 살펴보는 지표가 된다. 특히 자신들의 존재이유, 탄생의 과정, 지향성을 등을 밝힌 건국신화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지배계급으로서는 신흥국가의 정통성과 권력소유의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아래 글에서는 두 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를 비교하여 그 구조적 관계, 각종 神話素의 유사성, 세계관 등을 통해서 계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건국신화인 만치 시대를 달리하는 각종 기록에 다양한 형태로 기술이 되어 있으나, 가장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신화적 색채가 풍부하며, 비교적 역사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일연의 단군신화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이 두 편을 토대로 다른 자료를 일부 활용하며, 아울러 고분벽화의 부분적인 관찰과 해석도 응용할 예정이다.
신화는 그를 창조한 집단의 의식세계와 그에 기초한 문화 사회와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때문에 신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므로써 인간행동의 일정한 모델을 설정할 수 있고, 그럼으로서 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준다. 민족탄생신화는 한 민족사의 현존하는 신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철저히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건국의 始原과 過程은 물론 한 민족이 가진 우주관, 역사관, 인간관 등 자신의 論理를 가장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壇君神話는 철저히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신의 論理를 치밀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항에 기록되어 있는 壇君神話는 李承休의 帝王韻記에 실려있는 檀君神話 및 기타의 기록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역사성과 신화성이 공존하고 있는 고조선 기록에서 신화적인 기술하고 있는 부분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제외하고 '昔有桓因부터 號曰壇君王儉'까지이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 전체문장은 3부의 구조로 되었고, 그 내부에 24개의 주요한 神話素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천손강림신화이고, 2부는 지모신 신앙이며, 3부는 2개의 이질적인 신앙 내지 문화가 습합하는 과정과 단군왕검으로 상징되는 통일체를 완성하는 대단원이다.
1부는 천손강림신화로서 '昔有桓因'부터 在世理化까지를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천상에 있었던 환웅이 아버지인 환인의 협조와 승인 아래 기존질서를 탈피하고, 새로운 공간인 인간세상(人世)에 내려와 그 행위에 적합한 이념인 홍익인간을 지니고 새로운 상황을 건설해 간다는 내용이다. 첫 문장에 등장하는 桓因은 하늘의 신이며, 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환웅은 천신 혹은 환인의 아들로서(庶子 桓雄),천왕(桓雄天王)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천손이 내려오는 내용이므로 천 숭배집단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신화소가 신화 전체에서 반복 중첩되면서 표현되고 있다. 六堂은 단군을 Tengri계의 언어로 보고 단군은 天을 가리키며 동시에 天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하늘숭배는 구체적인 대상체로서 해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난다. 三危太伯 太伯山頂 등의 태백은 하늘 혹은 해와 관련이 깊다. 백은 '밝'의 뜻으로 해석되는데, 역으로 ' '은 白으로 음사가 된다. 흰 것은 광명을 나타내고, 광명은 밝음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 '白' 字속에는 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양주동은 밝(밝)은 광명 국토의 義로 古史에 [發 我 弗 不 夫餘 夫里 火 坪 赫 昭 明] 내지 [白 百 佰 貊 泊 朴 ] 등 자로 國名 地名 族名 人名 등에 借字로 쓰였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地母神 신앙으로서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이다. 熊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 熊은 虎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곰을 뜻하는 용어와 개념이었다. 그런데 지역의 이동이 생겼고, 생활 양식이 수렵삼림에서 농경으로 발달하면서 인간은 새로운 신의 개념과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단계에서 대지는 생산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신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여성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熊 虎에게 주어진 금기인 '不見 日光百日'은 햇빛이 단군탄생의 중요한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단군신화에는 인간의 생활과 관련을 맺고 의미를 가진 주요한 대상으로서 風伯, 雨師, 雲師 등 관리와 조직을 뜻하는 표현과 主穀, 主命, 主病, 主善惡 등 인간 생활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主穀은 농경문화가 시작됐고 농경을 통한 生産力의 확대가 주요한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는 地母神 신앙이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곰이 가진 동면동물이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곰이라는 용어에는 지모신의 의미가 담겼다. 더구나 곰은 검정색 피부로 인하여 밝음과 어둠의 두 신 가운데 어둠의 신을 표상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常祈于神雄~ 號曰壇君王儉 부분으로서 천손인 환웅과 지모신인 웅이 결합하여 금기와 중간 단계 예비상황 등 변증법적 인식과 행위를 통해서 단군왕검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단군의 탄생과 조선의 건국은 환인 환웅으로 표상되는 밝신과 熊(虎도 가능함 ) 王儉으로 표상되는 감신이, 즉 두개의 상반된 신 개념이 합쳐졌고, 또한 문화권으로는 태양을 숭배하고 천손강림신화를 가진 유목문화 집단이 주체가 돼서 대지를 숭배하고 지모신 신앙과 결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熊과 虎은 굴(同穴而居)에 유폐되어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不見日光百日) 熊은 금기를 잘 지켜 人身을 획득하였다. 그후 다시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生子 하자 假化한 雄을 다시 만나 혼인하여 壇君王儉을 生하였다.
단군신화에 표현된 이러한 인식과 의례행위를 계승한 고구려는 당대의 사료와 금석문, 예술작품, 건축물,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는 역사적 행위를 통해서 표현하였으며, 동맹, 屋制 등을 통해서 실제 생활에서 재현하였고, 그 후에도 전수되어 우리의 혼인풍습에 영향을 끼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건국신화이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흔히 朱蒙신화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 등 등 우리사료, {魏書},{周書},{隋書},{北史} {論衡}{通典} 및 그 외에도 당 시대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 {牟頭婁墓誌文} 등 각종의 금석문, 무엇보다도 풍부한 고분벽화가 있다. 이 곳에 기록되거나 표현된 내용은 문자 표현 상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거의 유사하다.
신화적 색채가 가장 풍부한 이규보가 쓴 {東國李相國集}의 東明王編에 따르면 이 신화의 첫 부분은 역시 天孫降臨神話의 형태로서 단군신화와 구조는 물론 의미도 동일하다. 해모수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에 五龍軌를 탔고, 백 여 명의 사람들이 흰 고니(鵠)를 타고 왔다. 그는 熊心山에 머물렀다가 내려왔다. 해모수는 아침에는 세상에 살고, 해가 지면 다시 天宮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와 유사한 내용은 {帝王韻紀나 세종실록지리지 평양 편 등에도 있다. 동명왕 편에서는 해모수를 '天王郞'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실제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새를 탄 신인과 함께 그 위에 '天王郞'(天王地神塚)이라는 묵서가 남아있다. 천손이라는 인식이 고려시대까지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나 지하공간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현세건 내세건 간에 하늘(天)을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당 시대와 후대에 자신들이 가꾼 역사의 내용을 전달하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사용한 공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인들은 천숭배신앙과 天孫民族이라는 自意識,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자신감을 곳 곳에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이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인식하는 태도는 고분벽화에 표현된 것과 내용이나 구조가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분의 벽화들을 두루 본 후에 기술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때까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전승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자연현상인 해를 숭배하고, 해에서 태어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즉 릉비문은 추모가 '剖卵降世'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 卵은 해를 뜻하고 있다. 연남산의 墓地銘에는 "朱蒙은 해를 품고 浿水에 임해 도읍을 열었다"라고 그 외 {論衡}, {三國志} 夫餘條, {삼국사기} 등도 주몽이 탄생이 해와 관련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牟頭婁塚의 묘지석에도 '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이란 글과 '河泊之孫 日月之子 所生'이라는 글이 반복되고 있다. 고구려인들에게 하늘(天)이란 곧 일월이고, 특히 日인 해를 가리키는 용어요 개념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주몽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유화부인은 단군신화에서 熊이 햇빛이 차단된 유폐상태(同穴而居 不見日光百日)였던 것과 동일한 상태에서 집중적으로 햇빛을 받아(感應)임신을 하였고, 알을 낳은 다음에는 역시 熊이 여인의 몸을 받아 잉태한 것처럼 일정한 금기와 단계를 거쳐 그것이 깨지면서 주몽이 탄생하였다. 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서 더 다양하고 치밀하게 이러한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일종의 通過儀禮인데, 이는 모순을 지양하고 대립물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취하는 특별한 형식이다.
고구려인들은 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扶餘의 천제가 解慕漱, 解夫婁였듯이 고구려의 解明(琉璃王의 왕자), 大解朱留王(大武神王), 解色朱(閔中王), 解憂(慕本王) 등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解를 마치 성처럼 앞에다 달고 있었다.(삼국유사에는 해를 姓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책들인 사기, 일주서, 한서, 좌전 등에서 전하는 부루, 불, 발, 박은 우리 조상을 가리키는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렇게 고구려인들이 명분상으로 천손이며, 출생과정에 해의 역할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인식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와 구조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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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주몽이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로서 天의 역할과 성격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상대적인 水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곧 유화부인이다. 모두루총 묘지석에 따르면 주몽은 해와 달의 子라고 되어 있으며, 다른 여러 금석문 및 기록에서 주몽의 외할아버지는 물신인 河伯으로 나타나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유화가 熊心山 아래 熊心淵에서 해모수를 만나, 물가에서 결합을 하였다. 그 후 아비에게 버림받은 채로 물 속에 있다가 金蛙에게 구출되어 주몽을 生하였다. 물은 지모신과는 직접 관련이 안되지만 천 또는 해의 상대적 존재로서 구조상으로는 단군신화의 熊과 동일하다. 물론 熊은 곰을 의미하고 있지만, 본질은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地母神을 의미한다. 곰은 언어학적으로 고마, 즉 알타이어에서 신을 뜻하는 고어이다. 이 '감'계의 언어는 해와 상대적인 의미와 기능을 상징한다. 백두산의 또 다른 명칭 가운데 하나는 개마산 개마대산이다. 이 때 개마는 바로 고마 등 감계의 언어이다. 그러니까 웅심산(太伯山과 동일한 의미)에 있었던 유화부인은 바로 웅녀와 동일한 지모신을 의미한다. 후에 유화부인은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남으로 내려갈 때 곡식의 종자를 보내므로써 농경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주몽은 역시 단군신화의 단군과 마찬가지로 천의 우위와 주도성 아래 태어난 천손의 의미가 강하다. 비문은 "하늘은 황룡을 아래로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오르시었다."(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라고 기록하므로써 추모가 생을 마치고 붕어하는 모습에서도 하늘의 자손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필자가 다른 논문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 신화는 구조가 유사하다. 해모수와 유화는 성격, 역할, 신화상의 구조로 보아 환웅과 웅녀의 위치와 동일한 것이다. 주몽은 부계는 천숭배집단이고, 모계는 하백신이며 알을 깨고 나왔으므로 난생신화적인 요소가 있다. 하백 및 유화는 水神이건 地母神이건 간에 구조적으로는 단군신화의 熊과 일치한다. 주몽은 '壇君之子'라고 하여 해모수를 단군으로 파악한 {三國遺事}나 {東國李相國集}은 {舊三國史} {古記} 등을 인용했다. 이러한 양 신화의 유사성은 문화적인 계승성을 가능하게 한다. 고구려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고조선의 영역을 차지해가면서 숭배와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신화를 간직하였기 때문에 신앙이나 제의, 고분벽화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의 宇宙觀 歷史觀등을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구성원리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고분안을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고 築造樣式을 활용한 空間分割을 시도하고 있다. 땅(地)의 세계와 天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고, 각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를 설정하였다.벽화내용 중에서 첫째, 建國神話 내지 信仰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벽화가 표현하였던 기본구조 내지 논리가 그러하며, 표현된 상징물들 역시 건국신화에 나온 것과 유사한 것이 많이 있다.(물론 모든 고분벽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려진 내용들에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
건국신화에서 표현된 상대적인 두 존재의 결합은 고분벽화에서도 天과 地의 결합, 天과 水의 결합으로 반영되어 있다.
무용총, 각저총 등 전기고분에는 삼족오와 두꺼비, 개구리, 토기 등 달동물(runar animal)이 그려진 달이 상대적인 위치에 있다. 또 오회분의 4호묘, 5호묘 등 후기의 고분에는 흔히 伏羲와 여와라고 해석하는 해신과 달신이 마주보고 있는 그림들이 있다. 日神 月神 등은 현실적으로 태양왕인 해모수와 地母神인 柳花婦人, 혹은 高登神과 夫餘神으로 나타난 고주몽과 유화부인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 특히 오호묘는 하얀 날개옷을 걸치고 몸은 용이요 얼굴은 사람인 남녀신이 피어오른 보리수나무를 사이에 두고 비상하면서 만나려하고 있다. 이는 人身을 획득한 웅녀가 생식의 상징인 神檀樹를 가운데 두고 결합하는 의미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도 단군신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 소재는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고분벽화에 반영된 단군관련 소재에 대한 연구가 있다. 북한의 강룡남에 의해서 지적된 각저총과 장천 1호분의 내용이다. 즉 각저총에 곰과 호랑이가 신단수로 추정되는 나무아래에서 장사들의 씨름을 구경하고 있다고 하며, 장천 1호분에서는 나무를 향해 있는 여인을 웅녀와 연결시키고 있다.
양 신화의 유사성은 언급한 구조적 측면 뿐 만 아니라 포함하고 있는 세계관 내적 논리 등도 유사하다. 삼족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므로 태양신인 해모수와 그 혈손인 동명계 왕들을 의미한다. 특히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는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 1호나 7호 고분에서 출토된 金銅冠形透彫裝飾에서도 볼 수 있다. 삼족오가 가진 의미는 단군신화의 구조 및 논리, 변증법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그 외에 벽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존재물들과 그들의 행위, 그들을 연결시키는 구조를 파악하다면 고분벽화와 단군신화, 또 이규보가 기록한 주몽신화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밝힐 수 있다.
필자는 단군신화의 초기원형이 고조선에 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수 차례의 변형을 거쳤고, 필자가 이미 초기논문에서 주장했듯이 일연이 기록한 단군기록은 고조선 멸망 이후에, 특히 찬자인 일연과 관련하여 매우 체제적이고 논리적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규보가 기록한 주몽, 혹은 동명의 건국신화 역시 고구려 당시의 原形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고구려는 건국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후에 만든 전승되던 단군신화의 원형을 근거로 건국신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역사가 발전하면서 점차 역사와 세계관 논리 등을 반영하여 정교한 틀을 만들어갔고, 그 결정적인 계기는 광개토대왕 및 장수대왕 시기로 여겨진다.
이 시대에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이 天孫과 水神의 결합에 의해서 탄생된 존재요 집단이라는 선민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존재의 원근거, 즉 世系를 직접 표방하고, 그것을 생생하고 치밀하게 표현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첫 귀절에 世系, 즉 원존재의 근거를 천명하고 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라고 재천명하고 있다. 추모의 후예인 대왕이 天神과 水神의 直孫이라는 천명을 통해서 선택된 종족임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삼국사기에도 물론 유사한 기록이 있다. 또한 昭烈帝({隋書} 고려전) 등 稱帝를 칭하거나, 聖上幡(安岳3호분 벽화)이란 표현을 쓴 경우도 있다. 중원고구려비문에도 용어 및 세계관, 태왕적 질서 등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이 시대에 이르러 內的發展과 함께 外的膨脹으로 인한 自己成長, 多種族 多文化國家로서의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역할과 국가의 탄생과정과 목적 등 自己正體性(identity)을 자각하고 승화시켜가는 고구려의 재발견(rediscovery)시대였다. 天孫意識을 강조하였고, 夫餘系와 百濟 新羅 伽耶 등 동일종족의 흡수와 포용을 실현하였다. 동명계신화의 재정리, 天帝意識과 성스러운 용어의 사용 등은 부여계 종족의 嫡長子라는 강한 자각과 동시에 自己役割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고구려 정통론을 내외에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모델로 삼았던 고조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재정립(re-foundation)하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적 질서를 재현하였다. 비록 건국 시기, 건국한 지역, 주민구성에 있어서 동일성을 충분하게 회복하지 못하였다해도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고조선문화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전승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6장 결론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 여부를 살펴보았다.
범칭 고조선은 건국 시기 기원 종족 문화형태 등 등 그 실체가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대의 국가들이 조선을 우리민족의 기원, 혹은 최초의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를 제외하였으나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등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인식이 보다 본격적으로 표현되었다. 김성환이 몇 편을 논문을 발표하였고, 최근에는 {高麗時代의 檀君傳承과 認識}에서 상세하고 논하고 있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국가는 시대적으로 부여 고구려를 비롯하여 몇 개의 소국들이 있다. 이들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는 고조선을 시대적으로도 계승하였으며, 당시의 국제질서란 측면, 영토, 주민, 문화형태 그리고 신앙이나 신화 세계관 등을 계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현실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한계가 있었으나 국가가 발전하면서 이를 더욱 분명하게 자각하고, 실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 글의 작성을 통해서 몇가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국가의 계승성은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요소로서 한 국가의 계승성 여부를 둘러싸고, 당사국은 물론 주변국들도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여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둘째, 고구려는 당시 전개된 역사적인 상황으로 보아 고조선을 계승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셋째, 고구려는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기록한 금석문과 후대의 기록, 중국인들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에 고구려는 부여와 조선의 계승의식이 분명히 있었다. 넷째, 묘제 무기 토기 등 등 고고학적인 유물 유적들을 비교하면 고조선과 고구려 간에는 문화적 계승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사상을 살펴볼 수 건국신화를 비교할 때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구조적 측면, 내적 논리, 세계관, 몇몇 신화소들이 의미하는 바가 유사하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단군신화의 모티브와 함께 신화소들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는 부분이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성격상 혈연적 계통 아닌 문화적 역사적 계승성에 의미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고구려가 건국의 계승성을 국가를 발전시키는 명분과 힘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발전과정을 명분적인 측면에서는 조선의 계승, 즉 조선적 질서의 재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서남북의 영토확장정책과 과정, 흩어진 채 발견되는 기록 및 광개토태왕릉비문 등 금석문에서 나타나는 세계관과 천손인식, 고분벽화가 포함하고 있는 논리와 의미,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등은 그러한 인식과 목적의 발로라고 여겨진다. 집단에게 있어서 정통성과 계승성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더구나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국가단위의 역할이 점차 소멸되고 있는 과도기인 현재에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은 순수역사적 측면 외에 필요한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의미가 크다. 이 글을 작성하는 데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사료의 부족, 고고유물의 부족과 해석의 상이성, 벽화의 내용 및 논리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는 일반적인 한계는 차치하고라도, 필자의 고고학적 지식의 부족함 때문에 입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문제가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승성은 기원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한 계통론의 한계와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도그마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