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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vet Underground의 태동。

Nova Sonic |2009.10.10 21:47
조회 462 |추천 0

 

"Even though hardly anymore bought the Velvet's records at the time they appeared,

almost everyone who did formed their own bands."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의 음반을 산 사람은 모두 밴드를 결성하였다."

 

- Brian Eno -

 

 

아트록 그룹 Roxy Music 출신이며 글램록과 엠비언트의 선구자, 지금도 손에 꼽히는 U2의 명반들을 프로듀싱한 최고의 프로듀서로도 명성이 높은 브라이언 이노의 이 짧은 문장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적 영향력을 설명하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Velvet Underground

 

 

64년경 뉴욕의 한 파티에서의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우연한 만남은 곧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943년 뉴욕주 외곽의 평범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루 리드는 어려서부터 록음악의 모태가 되는 50년대 두왑이나 R&B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뉴욕의 시라큐즈 대학에 입학하여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동안에는 그리니치 빌리지와 소호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비트 문화와 전위적인 예술운동에 빠져들었다. 비트문화는 기성질서와 도덕에 대한 부정과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특징인데 후일 벨벳에서 보여주는 그의 독특한 노랫말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반면 영국의 웨일즈 태생인 존 케일은 여덟살 때 BBC방송에 출연해서 비올라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어려서부터 꾸준히 클래식을 공부한 인물로, 레너드 번스타인 장학금 수혜자가 되어 미국에 유학을 와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아방가르드 음악에 심취하여 드림 아카데미(Dream Academy)라는 실험음악 앙상블 프로젝트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의 경험은 후일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들려주는 그의 독특한 비올라 연주로 연결되었다. 서로 다른 음악적 배경을 지니고 성장했지만 변화의 바람을 주도하고 있던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아방가르드와 록을 결합하려는 공통의 비전을 가지고 맞닥뜨린 두사람.

 

리드는 시라큐즈 대학에서 함께 창작활동을 하던 기타리스트 스털링 모리슨을, 케일은 자신의 이웃이었던 앵거스 맥리스를 퍼커셔니스트로 각각 끌어들여 순식간에 4인조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탄생하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은 맥리스가 싸구려 포르노잡지의 제목을 따온 것이었다. 이들은 루 리드가 한때 작곡가로서 일했던 픽윅 레코드사를 통해 몇 개의 싱글을 레코딩하고 무료 공연을 벌이곤 했다.

 

 

그리고 앤디 워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 그는 분명 락아티스트도 뮤지션도 아니지만 락 음악계나 영화계에 있어 무척이나 유명한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펼치며 기이한 행적으로 주목을 끌어온 그의 활동 무대는 늘 뉴욕을 중심으로 펼쳐졌었다.

그의 본업은 그림과 디자인을 중점으로 하는 화가 였지만 상업성 논리를 이용한 자신의 표현을 펼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림, 음악, 영화, 행위예술 어디건 거칠 것없이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캠펠수프 깡통, 코카 콜라 병 등의 슈퍼 마켓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과 마릴린 먼로 등의, 스타의 얼굴을 그려서 전시하며 "예술이란 완벽 창조가 아닌 일종의 모방이다."란 생각을 바탕으로 예술로 돈을 버는 것도 정당한 행위 임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지금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 계통은 마치 표절같은 시시해 보이는 표현이 의외로 많다.

그가 이러한 그림들을 그리는 작업장을 그는 "팩토리"라고 부르곤 했는데 여기에는 그 같은 화가 분만 아니라 히피족, 비트족 시인, 락뮤지션 등 많은 수의, 당시 기준으로 이른바 "골 때리는" 사람들이 같이 기거하곤 했다.
앤디 워홀은 그들에게 마약을 가르치며 새로운 예술 사조에 동조하도록 하였다.

급진적인 예술사조와 스프레이 페인팅등의 스트리트 아트와 전위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뉴욕이었기 때문에, 그는 금방 알려지게 되었고 기존 관습과 제도권에 대치적이었던 비트족들은 그의 예술에 열광하였다.

또한, 그 당시 뉴욕의 클럽에는 뉴욕 아방가르드 음악계의 영향을 받은 기이한 밴드, 그들이 바로 벨벳 언더그라운드였고 루 리드는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드나들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 루 리드의 데뷔앨범에 실려있는 Andy's Chest란 곡은 바로 앤디 워홀과의 교류에 대해 노래한 곡이다.

그리고 1965년 11월, 히피 디스토피아를 천명한 "Black Angel's Death Song"를 연주했다는 이유로 매니지먼트사로부터 해고당한 전력이 오히려 워홀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게 되어 그들은 워홀의 프로젝트 EPI에 참여하게 된다.

 

66년에 시작된 팩토리의 프로젝트는, 벨벳이 음악을 하며 워홀이 촬영을 하던 중, 조명과 댄서들까지 참여를

하게 되었고, 당시 워홀과 같이 일하던 필름 감독 폴 모리시가 그 퍼포먼스 공연의 이름을 지어야 했었는데,

그는 "Exploding" 이라는 문구를 쓰고, 밥 딜런의 시디 커버에서 봤던 모델 바바라 루빈을 떠올리며 "Plastic",

그리고 "inevitable" 을 조합해서 퍼포먼스 프로젝트 "Exploding Plastic Inevitable"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사람들은 벨벳, 니코, 워홀과 그의 영화 제작 스태프들, 댄서들, 그리고 벨벳을 따라다니며

숫자를 불렸던 밴드의 그루피들이었다.


 

 

은빛에 이상한 색이 감도는 염색을 한 창백한 사내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그들 중에는 많은 모델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독일 출신의 니코는 늘 눈에 띄는 재능을 지닌 여성이었다.

 

 

 

 

 

워홀은 EPI의 연장 프로젝트의 개념에서, 또 다른 소리이자 비주얼로 분한 니코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보컬로

참여시킬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꽉 짜인 진용을 갖추고 있던 벨벳은 더 이상의 멤버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이들은 니코를 게스트 보컬 정도로만 여겼다.

 

이 무렵 맥리스가 돌연 네팔로 떠나면서 밴드를 탈퇴해 벨벳은 데뷔앨범 한 장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당황스런

상황에 빠졌다. 부랴부랴 리드, 스털링과 시라큐즈 대학에서 함께 수학하던 친구의 여동생 "모린 터커"로 드러머의 공석을 메꾸면서 벳벳은 다시 재가동할 수 있었다. 모린 터커의 본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지만 이와 같은 멤버

변동은 결과적으로 벨벳의 사운드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초창기 그녀는 '모 터커(Moe Tucker)'라는 애칭을

사용한데다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드럼 플레이도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1966년 두 장의 싱글 "I'll Be Your Mirror/All Tomorrow's Party", "Sunday Morning/Femme Fatale"을 완성한다. 이를 전초전으로 같은 해 할리우드의 TTG 스튜디오에서 레코딩 한 "The Velvet Underground & Nico"가 발매된 것은 이듬해 EPI 투어가 끝난 1967년 3월 12일이었다. 앤디워홀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와 자켓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나나가 그려진 음반이며, 오리지날 원판은 바나나의 껍질을 드러내면 속살이 벗겨지는 제킷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워홀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기 보다, 재정적 지원과 분위기 조성에 더 큰 역할을 담당했었고, 실질적인 프로듀서는 톰 윌슨과 존 케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레코딩은 66년에 이미 끝나있는 상태였지만, 1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발매 지연과, 다소 실망스러운 발매 등등의 결과로 인해 워홀과 루 리드의 관계가 급격히 틀어지게 된다.


당시 워홀 팩토리의 많은 이들은 흥분제 타입의 마약인 '메쓰'를 하고 있었고, 루 리드가 점점 앤디 워홀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면서 나중에 뱀을 들고와 자신들의 매니져라고 칭하는가 하면,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자신"의 밴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 일이 결국 나중에 존 케일과의 마찰의 씨앗이 되었고, 앤디 워홀도 그루피로 들어온 발레리 솔라네스라는 지독한 약물중독에 빠진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EPI에 관심을 점점 잃어갔고, 결국엔 루 리드가 EPI에서 레코딩하던 앨범이 나오기도 전에 워홀에게 계약 파기를 요청한다. 워홀은 벌컥 화를 냈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루 리드가 좀 더 나은 매니져를 원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들이 벌어들인 유명세와 돈은 전부 앤디의 공이라는 걸 철저히 무시한 발언이었다.


 

 

 

니코는 전체적으로 벨벳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루 리드 또한 앤디 워홀 덕에 유명해 졌지만 "앤디가 이거해라 앤디가 저거해라 하여튼 앤디 뜻 대로만 이것 저것 하자니 짜증이 뻗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건 로큰롤인데" 라며 불평이 늘었다. 니코는 "벨벳의 멤버들은 다들 수퍼스타가 되고 싶어하고, 아주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하다. 짜증이 난다. 난 밥 딜런 노래 부르고 싶단 말이다" 라며 벨벳에 대해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니코는 특유의 차가운 고딕풍의 보컬톤으로 루 리드가 작곡한 'Femme Fatal', 'I'll Be Your Mirror', 'All Tomorrows Paties'을 불러 벨벳의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밴드 내에서 그녀의 위치란 매우 어정쩡했다. 특히 라이브 공연시에 그녀가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루 리드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탬버린을 흔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그녀는 공연때마다 늦게 나타나고 심지어 보스턴 공연에서는 마지막 곡을 연주할 때 공연장에 도착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멤버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이래저래 겉돌던 그녀는 데뷔 앨범을 끝으로 밴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는 별도로 루 리드와 존 케일이 니코의 솔로 앨범 "Chelsea Girl"의 제작에 참여하여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이 앨범에는 벨벳의 미발표곡 등 루 리드가 작곡한 곡이 여럿 수록돼 있다. 존 케일은 이후에도 그녀의 솔로 앨범 몇장을 프로듀스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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