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의 아주 이른 봄. 나는 처음으로 너를 만날 수 있었다.
3년동안 우리가 쌓았던 수많은 감정들을 안은 채 우리는 그렇게 마침내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추례한 코트차림을 하고 있었고 너는 굉장히 멋스러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첫 만남에도 이렇게 겉모습에 전혀 신경쓰지 못한 채 나는 참으로 태연한 너의 앞에서 애써 어색해하지 않으려 하였다. 10대의 후반을 함께 교감했던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나는 그렇게 너의 앞에서 뻣뻣히 굳어버렸다.
그 날은 우리가 처음 식사를 함께 했고 처음 함께 놀았던 날이다. 제대로 된 역사적인 첫 데이트였다. 많지 않은 대화는 겉돌다가도 때로는 속을 파고 들었고 나는 그저 겪어본 적 없는 생경한 대화속에서 내가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시려하는 손을 잡고 네 주머니에 넣으려 하니 주머니가 작아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자면서도 하이킥을 할 것 같은 부끄러움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노래방에 왔는데 열심히 연습한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네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참으로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나는 누구에게 온 전화냐며 물었고 그것이 어떤 오빠라고 했을 때 나의 표정을 잘 숨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매년 평화로웠던 내 생일은 그 날 만큼은 그야말로 혼돈속의 카오스였다. 나는 그저 너무 어색했고 그 긴장속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내 쓸모없는 머리는 그 날만 잘 구르더니 저녁에 고정적으로 다니던 라켓볼이 있음을 생각하고 난 3년만에 널 만난 첫 날 운동하러 가야한다며 바삐 사라졌다. 너 또한 약속이 있다 하였기에 아쉬움은 덜 했으나..
그 날의 기억은 굉장히 희미해서 3시간동안 애써 기억을 조합해야만 했다. 그만큼 그 날은 내게 있어서 참 당황스럽고 긴장 속에서 무얼 했는지도 모를 날이었다. 하지만 흰 옷의 너는 너무나 선명하다. 그 특이한 악세사리들조차까지.
그 날 네가 밤에 장난처럼 부를 때 나는 택시를 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친구에게 아쉬움을 드러낼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코트 안에서 공을 쫓느라 바빴고 너는 들쑥날쑥한 기분이 되어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내가 너를 만나지 못할 많은 이유를 부수지 못했다. 긴 시간 끝에 나는 너를 만나려 했으나 이미 너는 괜찮은 상태가 되었지. 그때는 그냥 그게 괜찮은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속에 남은 몇 가지는 서면과 우동과 노래방과 책과 그리고 개금역 정도였다. 고작 이틀간 나는 3년간 알아온 네가 굉장히 새로웠고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마냥 빛나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너는 마치 이쁘고 이쁜 새하얀 눈과 같아서 내 손에 있으면 금새 녹아버릴 것 같은.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래도 너는 어설픈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바보스러운 나를 보고 웃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끼곤 한다. 개금역에서 총총거리며 떠나는 너를 보낼 때 다음에 만나자는 그 말은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그게 3년이나 걸려버렸는걸.
그리고 한 달쯤 뒤,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을까. 나는 뜬금없이 널 찾았다. 다음에 만나자는 것이 이렇게 빠르리라곤 나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 날은 왠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1시간만에 충동적으로 모든 행동을 시작했다. 차표를 예약하고 물건을 팔고. 아마 그렇게 바쁘게 한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표를 뽑고 기차를 탔다. 혼자서 기차를 타 본건 난생 처음이었고 그 와중에도 나는 너무나 들떠있었다. 멍청하게도 5시간 뒤에나 도착하는 곳을 가면서 잘 바르지도 못 하고 항상 떡칠하기에 일수였던 머리에 왁스칠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혹시나 입냄새가 날까 양치를 하고 기차에서 물만 홀짝거리고 구취제만 왕창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기차를 타곤 하면 그렇게 길었던 시간이, 그 날은 어찌 그리 짧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부모님께는 자아 찾기 여행이랍시고 뻥을 단단히 치고 1년간 쓴 mp3를 과감히 판 돈으로 돈을 마련했다. 생에 처음 가는 장소에 약간은 고조된 기분은 참 좋았다.
6년이 지나간 지금에도 놀랍도록 선명하게 기억한다. 기차속에서 본 풍경은 단 한장의 컷도 남아있지 않건만 낯선 곳의 차가운 밤 공기. 택시에서 내렸을 때 보였던 사거리의 패밀리마트와 술집, 피시방, 아무도 없는 교정, 강가의 공원, 그 깜깜한 밤에 보았던 언덕 위 너의 집과 풍경들. 갈림길과 가로등의 주황불빛, 인적드문 도로와 총알처럼 빠른 택시, 그리고 회색 후드티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던 너까지.
그 가게앞 가로등의 너는 고작 두번째 봤을 뿐인데 마치 아파트 정문에서 언제나 보던 크라운 베이커리마냥 익숙한 간판모양처럼 편안하고 기뻤다. 회색후드티와 멋쩍은 웃음은 사람의 맘을 아주 편하게 해주는 구나라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기차속에서 준비했던 모든 생각, 말 등은 어디로 간 건지. 그저 네가 하자는대로 나는 바보처럼 이끌릴 뿐이었다. 첫 날은 너무 긴장해서 얼었다면 이 날은 너무 편해서 멍청하고 순종적이었다. 만약 그런 순종적인 나를 누군가 봤다면 얼마나 웃겼을까. 그러나 그때의 나는 무언가에 홀려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긴 거리를 오고도 전혀 피곤한 줄 몰랐고 너의 쫑알쫑알대는 말에도 그저 즐거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그 순간에 순수할 수 있었다.
너와 어둠이 가득 찬 조용한 교정에서 몰래 나눈 이야기도 소주 두 잔에 잔뜩 취한 척 하던 너의 모습도 강변의 공원에서 느낀 선선한 바람도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네가 그만 가겠다는 말에 그럴래라고 말한 멍청함도 그리고 네가 조용히 가겠다고 하니까 진짜 가라고하냐 미친 넘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웃었던 그 순간도, 언덕 가로등 앞에서 널 집으로 보내는 그 때도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홀로 내려오던 갈림길을 비추던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새삼 예뻐보였지.
그 날은 구름이 잔뜩 꼈었다. 금세라도 비가 내릴 듯 했다. pc방에서 졸고 있는 나를 약속한 시간에 깨워주며 어깨를 주물러주던 네 손길이 기억난다. 아침부터 만나서는 왠지 모르게 툴툴대던 너의 모습. 버스를 타고 찾아간 아침식사 됩니다라고 붙여놓은 작은 식당에서 넌 김이 서리는 국밥을 먹으며 뜨거운걸 못 먹어 후우댔었지.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점심쯤 부산으로 내려와야 할 때 쯤에는 결국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낯선 곳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비오는 날 배웅을 하겠다며 나와준 너를 택시에 태워보내며 평소에 유창하게 말도 잘 한다던 나는 벙어리처럼 그저 멍청한 악수와 안녕을 말하고 너는 왠지 모르게 쌀쌀맞고 그렁그렁하게 택시를 타고 갔었지. 빗물이 툭툭 떨어지는 거리위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역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 부산은 겨울인데도 눈이 안 오고 비가 오는 곳이다. 얼마 전 비가 추적추적 잘 내리더라. 그 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었지.
그리고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기로 하였지. 그때의 당혹스러움과 절망과 분노는 지금은 완전히 희석되었건만 어째서인지 우리가 가졌던 딱 두번의 만남은 너무나 생생하다.
몇 개월간 속을 괴롭혔던 너의 소식도 너의 새로운 친구도 그리고 너의 그러한 태연함도 나는 참을 수 없었지만 그것도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친구가 되어버린 지금도 뜬금없이 기억나는 언덕길과 사거리, 너희 집 아래의 갈림길, 대로변 pc방과 편의점과 학교와 택시와 기차역과 강변 그리고 회색 후드티의 너.
어째서 6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채 딱 한 번 가보았던 북쪽 어딘가가 그리워 지는 걸까.
나는 어쩌면 그 역에 나를 영원히 두고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를 태운 택시가 빠르게 도로 위를 구르는 뒷 모습을 보며 그저 괜찮을 거라 여겼던 추례하고 멋스럽지 못하고 어설펐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차에 올라탔다. 오는 길은 갈 때 보다 훨씬 길었다. 누군가 철로를 주욱 늘여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었다. 만약 그때의 그렁그렁하고 쌀쌀맞고 퉁명스러웠고 다정했던 네가 그걸로 마지막임을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그리워지는 북쪽 어딘가에 갔을까.
몇 석 안되는 작은 역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던 우린 없지만 나는 어쩐지 가끔 그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1시 10분 기차를 기다리는 것 같다.
너와 친구가 된 뒤에 너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는데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건만 여전히 그 의자 위에 앉아 비오는 날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기차를 타고 그 역에 도착하면 코트를 푹 덮고 청바지를 입은 어리숙한 내가 있지 않을까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가끔, 1시 10분이 찍힌 흰색 티켓을 구깃구깃 버렸던 게 참 안타까워지곤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