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제중원

나막신이 |2010.02.15 17:03
조회 708 |추천 0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모른다.

 

'허준' 이후 나의 관심을 끈 유일한 의학 드라마.

 

'투하트' '하얀거탑' 등등... 많은 의학 드라마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나는 주인공이 불우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노력의 결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일 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한가지 더하여, 옆 사람들을 돌아보고 따뜻하게 대할 줄 아는 태도를 가지면서도 그 업적을 이뤄내는 사람일 때 존경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그 인물을 대하게 된다. 즉, 실력과 인격을 다 가진 사람일 때를 말한다.

(예를 들어 '투하트'를 보면서 여자수석 김민정이 여자라는 이유로 교수 조재현에게 당한 모욕이 보기 좋지 않았다. 조재현이 아무리 실력이 우수하더라도 그는 환자도, 제자들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얀거탑'은 볼거리가 많았다고 했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 사람냄새가 난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보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결국 사극 + 의학 드라마를 찾게 되었는데,

이번에 제중원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거다!'라고 느꼈다.

 

실존인물 박서양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을 알고 바로 찾아보았다.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나 제중원 제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어, 나중에는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

두 가지가 내 가슴을 쳤다.

1. 백정의 신분을 딛고 의사가 되다.

: 백정이 얼마나 사람취급을 못 받았는지는 조금만 찾아보면 나온다. 양반에게 신분차별을 당해 서러웠던 평민들은 그 설움을 풀려는 것에서였는지 백정들을 그 못지 않게 구박했다.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다른 한편으로 결국 폭력을 쓰는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폭력의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서 기어다니며 벌레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바로 백정이었다. 하지만, 백정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직업 중 하나였다. 고기를 잡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었겠나? 그렇게 꼭 필요한 직업군이었는데도, 유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나쁜 관습 중 하나인 사농공상 (선비, 농민, 공장, 상인) 덕분에 백정 등 천민 계급은 하늘이 내리신 사람이라는 개념 밖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신분상승의 길은 막혀 있었지만, 배움의 기회조차 없었다.

(이 드라마에서 소근개가 백정인데도 글을 배운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갑오개혁 이후, 제도상으로는 신분제가 철폐되어 조금은 희망을 가졌겠지만, 사람들의 뿌리깊은 의식과 생활습관에서는 아직도 백정=짐승이었다.

그리고,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제중원도 사람을 구하는 데 어느 정도 융통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기회는 결코 쉽게 주이지지는 않았다. 제중원의 4대 에비슨 원장은 박서양의 아버지가 그렇게 간청을 하자 겨우 박서양을 잡일 담당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성공을 해내고야 말았다. 고생 속에서도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까짓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고, 사람 답게 살 기회를 가졌으니 꼭 이겨낼거야.'

 

2. 백정이었는데도 나중에 독립군에 가담했다.

고등학교 시절, 동학혁명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백정이 동학군을 배반하고 관아에 밀고를 하는 이야기를 봤었다. 그때 치를 떨면서 '배신자'라고 욕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 이 드라마를 보며 다시 생각해보니 쉽게 욕이 나오질 않는다.

백정이 평민에게 당했던 수모는 양반이 양민에게 했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비록 양귀들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군에 가담은 했을지언정, 전쟁이 끝나면 또다시 짐승같은 취급을 받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리고 관아에서는 밀고를 하면 포상과 함께 면천까지 시켜주어 사람답게, 게다가 부요하게 살게 해 준다면?

제중원에서도 소근개의 친구 중 육손이란 인물이 밀도살을 통해 돈을 벌고 신분을 속여 사람답게 살것을 노린다. 밀도살은 물론 법으로 금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인 것 같은 심한 범죄도 아니었다.

끊임없는 억압에 울분과 한이 가득한 마음이었을 그들이, 눈앞에 다가온 황금의 열매를 과연 대의명분 (그것도 자신의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을 대의명분)에 얼마나 지조를 지키면서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사람답게 살 권리'조차 박탈당해 살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선택에 돌을 던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위한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고

유학시절 나를 힘내게 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의 파렴치한 태도를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해'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내가 한 사람의 '국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국민의 '의무'와 더불어 '권리'도 가지고 있어, 즉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백정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민'의 개념에 포함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인면수심의 범죄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같은 비인격적 대우를 받았대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직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으니 근거 없는 핍박의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박서양이 의사가 된 후에,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군들의 치료를 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시대 지식인들의 삶과 매우 대비되는 숭고함을 전해준다. 그 시대 지식인들이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일본의 침략을 용인하고 살았던 것에 비해, 행동으로 애국을 실천했던 박서양.

내 눈에 그는 '나를 핍박한 조국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국을 돌본 위대한 의사'로 비쳐졌다.

 

그리고 제중원의 가상인물 두 명. 백도양과 유석란.

 

백도양.

천재가 어울리는 노력형 수재. 분명 똑똑하고 우수하지만, 천부적인 감각을 소유하고 훈련해온 황정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처받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유석란의 마음이 황정에게 향하는 것도 불편할 수 밖에 없고.

정말 힘든 일이지만, 라이벌의 존재가 자신을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더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 라이벌을 피해 일본 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같이 조국을 구하려고 노력했다면.

유석란의 마음이 떠난 것은 결국 백도양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 백도양은 석란의 천재성을 보고도 시대의 여성억압사상에 길들여진 자신의 가치관으로 그녀를 보았다. 현재 조금은 석란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그녀를 대등한 의사로 인정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유석란.

신여성... 나에게 신여성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선 단어였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화가 나혜석 밖에.

그렇지만 그 시절 여의사로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영실과 허영숙. 허영숙은 친일행각으로 얼룩졌던 춘원 이광수와의 연애로도 좀 알려졌다고 한다. (자유연애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던 그 시절, 독신남들과 사귀었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기혼남성과 사랑에 빠져 원래 부인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역관의 딸로 태어나 영어에 능통하고, 서양문물에도 거부감 없이 넓은 견문을 자랑하는 현명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따뜻한 마음과 올곧은 성격,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력을 두루 갖춘 '과연 저런 완벽한 여인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단한 여인이다. 거기에 타고난 미모까지 덧붙여져 드라마를 보는 내내 한송이 아름다운 꽃을 보게 하는 듯한 캐릭터다.

황정을 몇 번이나 구해주면 보여준 그 행동력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남장을 하고까지 의생시험에 도전하여 자신의 한계를 알고 싶어하는 그 열정.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수석으로 합격하고서도 어차피 사회 구조상 자신은 갈 수 없기에 황정을 넣어주기 위해 위험도 무릅쓰는 모습에서는 역시 주인공만큼이나 '착한'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세 명을 놓고 보면서,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나쁜'사람을 투입시켜 '착한 사람'과 삼각관계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도양이 앞으로 얼마나 변해갈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못된 성격을 원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로 꼬여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픔까지 같이 보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자신의 심술이나 쾌락, 또는 만족을 위해 주인공을 핍박하는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드라마들에서 가장 보기 싫었던 것 중 하나였던 그런 인물이 아니라서 더욱 정이 간다.

 

이외에..

초대 원장으로 (박도양은 4대원장과 박도양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였으나) 황정을 도와주는 알렌의사.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는 걸 봤다. 그렇게 숭고한 의사는 아니었다는 것으로, 미국의 이권침탈에 동조하였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그것에 대해서 제작진이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것이 더욱 궁금해진다.

 

의녀들. 특히 앞으로 의녀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낭랑이.

 

성균관에서 넘어온 인물들. 성리학의 가치관 중 사람을 사랑하는 좋은 것은 지키고, 사람을 구박하는 나쁜 악습들은 버릴 수 있을지?

 

한성병원 주축의 일본 세력.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구한말을 다루는 드라마가 어려운 게 바로 이것이다. 일본 치하의 치욕의 역사를 필연적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에 그것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시청자가 얼마나 될 것이냐는 게 문제다.

궁중암투를 다루는 드라마가 오히려 더 많이 사랑받는 건, 붕당의 다툼이나 왕궁 권력 다툼, 또는 비들끼리의 질투 등은 소화가 쉬운 소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내용들을 보는 게 더 힘들다. 그렇게 같은 민족끼리 서로 물어 뜯는 것을 보다 보면 우리나라 국민성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어려움과 치욕을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는 독립투사나 신분상승을 위해 정당하게 노력하는 인간군상들은 오히려 희망을 주는 별들이 아닐까.

 

시청률이 그다지 많이 나오는 것 같지 않지만,

나같이 제중원을 사랑하는 시청자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제작진이 끝까지, 뚝심있게 좋은 명품 드라마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연예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