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의 너무 뜻밖의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전날 남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여자는 정신없이 울어댔다.
처녀성을 잃은 것에 대한 황당함이기도 했지만...
여자가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대답하고
돌아선 남자에서 섭섭한 마음도 컸었기 때문에 종일 눈물만 났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을 때
여자의 모습은 너무 참담했다.
밤세 울어서 퉁퉁 붓다 못해 빨갛게 충열된 미운 눈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라면 두개쯤 끓여서
국물까지 남기 없이 퍼 먹은 듯 빵빵한 얼굴은 그렇잖아도 예쁜 구석 없는
여자의 모습을 더 보기 싫게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여자는 회사고 뭐고 그냥 집에서 계속 누워만 있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러고 있으면 분명히 식구들이 뭔가 눈치를 챌것만 같았다.
억지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면서도 여자는 회사쪽으로 쉽게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만큼 여자는 남자를 만날 자신도 없었거니와
남자 말고 다른 주변 사람들과 오늘은 대화할 맘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을 추스려 회사에 나왔다.
다행히 남자는 아침부터 현장에서 바쁘게 일하느라 여자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여자가 그 사실에 안도할즈음 점심시간이 되었고
일부러인지 자신 앞에 앉아서 옆에 동생과 대화하는 남자가
여자는 너무 밉고 싫어졌다.
'그래 너에겐 나같은 여자랑 하루밤은 별거 아닌 일이겠지'
라는 생각에 더 비참해진 여자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남자가 만나보자는 말을 하다니....
여자는 자기가 환청을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분명히 만나보자고 말했고...
오늘 저녁에 그 날 그 편의점 앞에서 보자는 약속까지 정하고 갔다.
여자는 혼란스럽고 왠지 기뻤다.
평소에 남자한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단 하루 만에 여자에게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린것만 같았다.
회사 업무 시간 내내
여자는 남자가 있는 곳을 훔쳐보며 시간이 더디간다고 느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을때는 여자는 미칠듯한 조바심으로 미리 옷을 갈아 입고
신발도 미리 바꿔 신고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료시간이 되자마자 여자는 제일 먼저 회사에서 나가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편의점 앞에 도착해서 여자는 숨을 고르며 자신의 모습을 주변 건물에 비춰봤다.
달려와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만지며 가슴이 뛰는게 느껴졌다.
가슴이 뛰다니...
여자는 25년간 살면서 누구를 좋아한 적도 없었고
가슴이 설레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여자가 그렇게 아름다운 편이 아니라서 여자에서 대쉬해 오는 사람이 적었던
탓도 있었지만, 여자는 원래 남자에겐 관심이 없는 타입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는 우선 경계하고
멀리하려고 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여직껏 연애다운 연애는 해본적도 없었고 심지어 첫사랑조차 여자에겐
없었다.
그런 여자가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남자를 기다리면서 설레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보다 10정도 늦게 편의점 앞에 나타났다.
자신처럼 달려오지 않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조금 부끄럽단 생각을 했다.
'아~~~ 내가 먼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 걸 보면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같은 회사에서 일 끝나고 오는 건데 내가 이렇게 먼저 와 있는 건 그만큼 빨리 오려고
했단 게 티나는 거니깐...아....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나~~~"
"어~ 왔어...^^;"
"누나 나 만나려고 달려오기라도 했어요?나도 빨리 온다고 서둘러서 온건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와 있데??ㅋㅋ"
"아...저...오다보니 그렇게 됐네...아...하..하...."
"ㅋㅋ농담이에요.누난 놀려 먹는 재미가 있다니깐 얼굴 봐요.ㅋ누나처럼 얼굴에
생각이란 생각은 다 써 있는 사람도 흔치 않을껄?ㅋㅋ"
"............."
남자는 여자의 시뻘개진 얼굴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누나 나 어제 집에가서 생각 정말 많이 해 봤는데...우리 그 날 그렇게 된거
아무래도 술 기운 때문은 아닌거 같아요.그리고 솔직히 어제 종일 누나 생각 땜에
화나고 섭섭하고 그러더라구요.난 누나 땜에 좀 설레이고 누나랑 같이 있었던게
좋았는데...누나는 싫었나 싶어서 기분 상하기도 하고...근데 오늘 보니깐 누나가
나보다 더 맘 고생 한듯 해서...ㅋㅋ솔직히 기분 좀 좋았어."
"아..저기 난....그냥...."
"우리 어디 들어가서 얘기해요.누나 밥두 못 먹었죠?아까 점심때도 한 술 뜨더니
나가 버렸잖아.나도 밥 제대루 못 먹어서 너무 허기진다.우리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ㅋ
물론 오늘은 술은 사절이에요.ㅋㅋㅋ"
"응...^^"
여자는 가까운 김밥집으로 들어가자고 남자를 이끌었다.
어차피 비싸고 분위기 좋은 곳 가서 밥 먹자고 해도 지금은 별로 먹히지 않을 것도
같고 그냥 편하게 얘기하기에는 차라리 이런 곳이 여자는 편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남자는 순순히 여자를 따라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이모 여기..김밥 두줄하고 칼국수~~누난 머 먹을래요???"
"아..나도 칼국수 먹을께."
"여기 칼국수로 두개 빨리 해주세요.ㅋ"
"누나....."
여자가 따라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남자가 여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남자는 여자의 손바닥을 펴서 손가락 하나 하나를
간지럽히며 여자를 바라봤다.
"누나...어제 사실 겁나서 먼저 도망가 버린거 맞지??사실 나두 겁나요.
나 연애처음 해보는 것두 아니고 사실 누나 만나기 전에 한 두세번 정도 여자 만나봤어요.근데 누나처럼 만나게 된건 나도 처음이에요.그래서 좀 낮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나도 그래.누나처럼요.근데 우리 서로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만나봐요."
"...................."
"우리가 정말 인연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그치?그니깐 편하게 만나봐요.
나도 누나한테 잘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노력할꺼고...누나도 그래줄 수 있죠???"
"으...응...."
"아...진짜...누나...ㅋㅋ애기처럼....자꾸 그럼 껴안고 싶어진단 말야.ㅋㅋ귀여워서ㅋ"
남자는 음식이 나올때까지 여자의 손을 잡고 여자를 부드럽게 쳐다봤다.
여자는 창피한 맘과 설레는 맘이 뒤죽박죽 섞인채로 남자의 손 끝만 바라봤다.
여자에게 남자는 처음은 급하게 모든 걸 나눴지만...
이제부터 사귀기로 했으니깐 모든 과정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만나면서 함께 하자고
말하며 데이트 첫날이니깐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여자의 손을 잡고 앞장 섰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이 고맙고 감사했다.
버스를 타고 가도 됐지만 여자와 남자는 손을 꼭 잡은체 걸어서 여자의 집앞에
다다랐다.
남자는 여자보고 들어가라고 말했지만 쉽게 여자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고
여자 역시 들어가겠다고 말했지만 멍하니 남자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나..."
"응???"
여자가 남자을 부름에 얼굴을 들었을때 남자는 여자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여자에게 이제 정말 들어가라고 말하며 남자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남자가 뛰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자신의 심장도
남자처럼 뛰기 시작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