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명한데, 그다지 과거의 추억거리가 곱씹을 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사례가 딱히 기억나지 않는 것도, 내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에 한 몫 한다. 이건, 예전의 내 경험담이다.
1장
'마지막 날'이라는 핑계로, 나는 편집장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서핑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추운 계절과는 전혀 상관없이, 졸려서 눈은 풀려가고 있었다. 그 쯤 이었을까.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요 근래에 업무 관련 메시지를 제외한다면 문자를 보내 줄만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일까'라고 궁금해 하며 확인을 했다.
"오늘 머해~" (상대방)
지난 주말에 친한 동생이 '소개팅' 한번 하라며, 그래서 같이 만나 술한잔 유별나게 마시고 헤어졌던 그 사람의 문자였다. 보통 문자 받으면 빠른 답장으로 회신하는 나, 그러나 그날은 그러하지 않았다. 몇 분을 망설이다가 짧게 보냈다.
"왜" (나)
"그냥 생각나서~ 저녁때 할일 없음 나랑 놀자"
"왜"
"그래서 놀기 싫다고?"
...
"그냥 왠지 한번만 더 보고 싶어서~ 바쁨 담에 봐" (상대방)
"보는 것 좋다만 걱정 되" (나)
"무슨 걱정?"
"알잖아 우리는 서로 상극이라는 거"
마지막 답장 후 동생에게 문자를 했다. 그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고, 그리고 말했다. 만남은 괜찮은데 불안한 마음이 적지 않다고. 그러자 동생은 내게 괜찮을 거라고 웃음 섞인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며 '그래 괜찮겠지'싶었고, '2008년의 마지막 날인데 한번만 더 보자'라고 혼잣말을 읊으며 만남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문자를 날렸다.
"퇴근 후 연락할게. 근데 뭘 하지" (나)
"그냥 술 한 잔 하면서 얘기나 해" (상대방)
사실 이때에도 '술'이라는 단어에 나는 불안했다.
퇴근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전에 얻어먹은 게 많으니 밥 한 끼 사겠다는 내 말에 그는 무척 기뻐했다. 친구를 만나기에 앞서, 나는 먼저 <SATIN>에서 머리를 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2008년의 마지막 날이니 머리 손질이 혹했을 뿐이다) 머리 손질이 끝나갈 때 즈음 친구가 도착했고, 우리는 잠실 롯데의 8층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천천히 구경을 하고 1층에 도착할 즈음, 만나기로 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디야. 난 명동인데 몇시에 어디서 만나?"
평소 사람 만나면 약속시간 부터 정하고 보는 나, 그날 이상하게도 그게 싫더라고. 그래서 바로 답장 하지 않고 시간을 좀 끌었다.
"나 좀 늦으니 압구정에서 보기로 해. 시간은 미정" (나)
"그래, 그럼 이따 연락 줘. 기다릴께"
그러지 않아도 됐지만 나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어머니께 드릴 신년 선물 구매하려 <COACH>매장에 갔을 때에도, 바로 구매하면 되는 것을 둘러보고 또 둘러봤다. 물론, 부모 앞에 놓일 선물이니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그녀를 만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기도 했고. 여하튼 신상 하나 포장하고는 약속 장소로 가지 않고 발길을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는 그날의 추위는 매서웠다. 이런 날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꽤나 짜증날 일이다. 그냥 생각했던 건데, 만약 상대방이 약속 장소에 늦기라도 한다면 멱살이라도 잡을 듯했고, 거기에 덧붙여 야릇한 미소까지 날려 온다면 거침없이 뺨을 갈길 것 같은, 그런 날씨였다. 잠깐의 잡스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뭔가를 밟고 미끄러졌다. 누군가를 취하게 만들고 버려진, 속이 비어있는 '참이슬' 공병 이었다. 술병을 보니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압구정으로 향하고 있을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출발해. 그런데 차가 많이 막히니 강남역으로 장소 변경"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보내는 문자치고는 꽤 별로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별 수 있나. 약간 미안함은 있었지만, 썩 유쾌한 만남만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문자를 보내며 내심 상대방은 집으로 떠나지 않을까 생각 했는데, 의외로 끈기 있고 가슴 넓은 여자였다. 왜냐하면 돌아온 답장은 '알았어' 뿐 이었으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순순하게 나오는 그녀, 뭔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내 얼굴에 물을 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2장
"30분 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나 갈거야"
강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그녀가 내게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핸드폰 화면의 우측 상단에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세 정거장이 남았으니 대략 늦을 듯했다. 그래서 뭐라 답장을 보내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나'스러운 답장으로 거침없이 회신했다.
"가더라도 얼굴은 보고가"
문자를 보내긴 했지만 불안했다. 혹시나 따귀를 맞지는 않을까 싶었고, <PASCUCCI>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내 얼굴에 커피라도 뿌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지금이야 편하게 키보드에 손 올려 끄적거리고 있지만 당시에 나는 떨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그 곳에 도착하여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고개 숙이고 나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화난 모습이었고, 집에 가는 듯했다.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확인했는데, 다행하게도 가방 말고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 때, 나는 과감하게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한마디 내뱉으며 뒤 돌아 그곳을 빠져나갔다.
"늦어서 미안"
뒤통수를 상대에게 내준 상태였고 살짝 겁을 먹고 있었는데 다행히 별이 번쩍 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늦었는데 불구하고 인사말이 너무 짧았으니까. 그래서 얼굴을 돌리며 뭔가 말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는 찰나에 그녀가 한마디 했다.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 타이밍 좋다"
과연 타이밍이 좋아서였을까. 뭐 여하튼, 추위에 약한 나는 상대방을 등 뒤에 두고 재빠르게 걸어 강남역 <Sand>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옆 가게, 사람이 적어보이는 곳으로 갔다.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 둘의 분위기는 좋았다. 약속 장소에 늦게 나온 나, 그걸 가지고 뭐라 말하지 않는 그녀. 적어도 평화로웠다.
정확하게 기억한다. 맥주 세트를 시키며 세병은 <버드와이저>로, 두병은 <칭타오>, 안주는 '나초'였다.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 분위기가 싫었는지 그녀는 담배 한대를 입에 물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의 작은 등불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게 불편했는지 그 모습은 여간 엉성했다. 용을 쓰고 있는 그녀, 나는 잠시 관찰했다. 약간 갈색 빛을 발하는 머리칼은 그대로였고, 등불에 얼굴을 가까이 했으니 눈 화장이 자세히 보였는데, 오늘도 역시나 '스모키'였다. 그리고 다리를 꼬았으니 치마가 보였는데 매우 짧았다. 갈색 앙고라 티셔츠에 황토색의 모직 미니스커트, 마찬가지로 따스한 느낌의 모직 자켓. 검정색 스타킹과 갈색 여성 제화. 굽은 그다지 높지도 않았고 낮지도 않은 평균적인 것이었다. 스타일만 본다면 꽤 내 취향이었다. 무심한 듯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내 눈을 의식했는지, 그녀는 말을 건내왔다. 별 큰 의미 없는, 어제는 뭐 했고 오늘 하루는 뭘 하며 보냈냐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순전히 술 때문이었던 그녀의 행동들과, 그 다음날 전혀 통하지 않았던 우리의 대화 탓 이었을까. 나는 짧은 대답, 그리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내가 질문을 던졌다. 오늘 왜 나를 만나길 원했냐고.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내게 뭐라 하는 사람도 처음이었고, 내 앞에서 최악이라는 표정을 드러내는 남자도 처음이야. 그래서 쟤는 뭐 믿고 저러나 궁금했지. 뭐 그러하다 보니까 한번만 더 만나보고 싶더라고"
이런 저런 불필요한 대화로 그날의 만남을 시작했으니 내 기분이 달갑지 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과를 내게 연거푸 쏟아내니, 그녀를 싫어하던 감정도 조금씩 사그러져 갔다. 그렇게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조금씩 친해졌고 서로 마음을 열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저런 대화에 시간은 벌써 2009년을 1분 남겨둔 상황. 서로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아니다만, 그래도 누군가와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기쁨도 (살짝) 있었다. 만약 종로에 있었다면 보신각 종소리와, 사람들이 외치는 새해의 알림도 들을 수 있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강남 뒷골목에서 맞이하는 새해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조용하고 따스한, 어둠에 잠겨있는 bar에서의 신년은 나름 운치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08년의 추억들을 떠올려 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신년 인사말을 건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등잔의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꽤 매력적이었다. 서구적인 외모에 당당한 듯한 인상의 그녀, 나는 내 턱을 손 위에 받치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띄었다.
"우리 나가서 더욱 재밌는 시간을 보내자" (상대방)
"뭐 그러자" (나)
술값을 계산하고, 소지품을 챙기고, 밖에서 부는 겨울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옷 단추를 잘 채웠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뭐 하고 싶은데" (나)
"한 잔만 더 마시고 싶어" (상대방)
"아냐, 더 마시면 너 취할 것 같은데"
"걱정 마, 오늘은 문제없어. 안심해도 좋아"
그런데 그날 문제의 시작은 그 때부터였다. 그녀는 전혀 거뜬하지 않았다.
3장
한 군데 술집의 주인장은 새벽 1시까지 영업이라 죄송하다고 말했다. 다른 한 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8년을 보내고 신년을 맞이하는 밤 치고는, 돈을 벌려고 하는 술집들의 영업 의지가 결연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민속주점에 들어갔다. 나는 잠깐 불안한 감에 무얼 먹으러 여기에 가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또렷하고 명쾌하게 '소주'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싫다고 말했다. 나는 소주에 약하니까. 그 뿐만 아니라 상대방 역시 소주에 약하니까. 내가 가기 싫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술의 종류를 바꿨다. 소주에서 청하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술값을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설득했다. 나는 져주는 척, 못 이기는 척 동의했고 그녀는 기뻐하며 내 손을 붙잡고 술집으로 이끌었다.
민속주점에는 손님이 많았다. 부산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남녀 몇몇으로 구성된 손님이었다. 아마도 새해를 맞이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또 다시 시작되는 2차의 걱정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주변의 분위기에 취해갔다. 자기가 값을 계산한다 했으니 나는 그녀에게 주문하라고 말했다. 안주는 조금 고민하더니 조개탕을 시켰고, 술은 머뭇거림 없이 소주와 청하를 각 한 병씩 주문했다. 나는 소주는 너무 강한 녀석이니 청하를 두병 마시자 제안했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청하로 바꿨다. 그리고 잠깐 기다림 후에 술과 안주가 도착했다. 나는 그녀의 테이블 앞에 티슈를 깔아줬고 그 위로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줬다.
"너가 이런 것도 해줘?" (상대방)
"그냥 한거야, 의미 두지마" (나)
서로 술을 따라주고 건배를 했다. 청하의 맑고 시원한 맛이 목에 닿았음을 느꼈다. 날씨가 추워서 그랬는지 취하는 맛이 없었다. 술이 좀 잘 받았다. 이 정도의 느낌이라면 두, 세 병은 거뜬하게 마실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뭐라 말하는지 모를 웅얼거림을 시작했고, 잠시 후 살며시 고개를 들며 내게 말했다.
"야 챔프, 너 나 사랑했잖아. 왜 떠나가는 건데"
그 이후에 그녀는 입으로 많은 말을 뱉어냈다.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그녀는 나를 계속 '챔프'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뭐라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 자세히 듣다보니 명확하게 '챔프'였다. 그녀는 계속 알 수 없는 호칭을 써가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내용들은 대략 이러했다. ‘왜 떠나가는지’, ‘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것인지’, 이것은 이별한 옛 연인의 얼굴 앞에서 해야 어울리는 말들 이었다. 그녀는 연거푸 질문을 던지다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 쪽의 머리칼이 이마를 스치고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었다. 그 자세로 미동조차 없는 그녀, 나는 불안함에 정신을 차리라며 왼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맙소사.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보다 더욱 진했던, 그녀의 ‘스모키’한 눈에서는 검정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나는 정말 난처했다. 웬만해서 당황이란 모르고 살았던 나인데 어찌해야 할지 모를, 이런 상황이 ‘초난감’인가 싶었다. 나는 무의식에 내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우리 테이블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신년 벽두부터 보기 흉한 모습을 봤다는 듯 날카롭고 거친 눈길을 내게 보내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종로에서는 신년을 고하는 종소리가 울려 펴졌고,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년 초를 맞이한 날인데 나는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한 생각 와중에 울고 있는 그녀의 등 뒤편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눈빛으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새해 선물을 이별 통보로 선사 하는구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 언어는 확실하게 해석이 가능했다. ‘멋지다, 구역질난다, 재수 없다’ 정도로 요약될 듯하다.
나는 테이블의 내 술잔을 쥐었다. 그리고는 마셨다. 그냥 답답한 기분에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술잔에 가득 찬 청하도 마셔버렸다. 그 사람이 저걸 마시면 정신이 더욱 혼미해 질 것이라 생각됐다. 그리고 잠시 아무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계속 검은 눈물을 쏟아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머리는 축소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음주 때문에 졸려서 점점 몽롱해져 갔다. 나는 술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중인 여자가 불안했다. 난 또 다시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술값을 (제길) 또 계산했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곳을 도망치 듯 나왔다. 너무 급히 나가느라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혹한 새벽의 강남 뒷골목은 내 몸을 미친 듯이 떨게 했다. 떨림은 멈추지를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 술에 취하면 추위에 대한 감각은 덜하고 덥게 느낀다는데 상대방은 내게 ‘추워’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그녀에게 과천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주겠노라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기겁하며 싫다고 했다. 이유인 즉, 늦은 귀가에 부모님께 들을 꾸중이 무섭다는 뜻이었다. 나는 난감했고 당황스러웠다. 다 큰 성인이 부모가 무섭다니 그러면 진즉 자리를 마치고 갔어야하는 게 아닌가. 여하튼 이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자 제안했지만 그녀는 역시나 거부했다. 한편 그녀는 내게 술을 더 마시자고 말했는데, 그것은 내게 영 끔찍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고, 한잔 더 들이킨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릴지 모를 수준이었다. 날씨는 춥고, 갈 곳은 없고. 그렇다고 모텔을 가기도 참 웃긴 일이고.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한마디 뱉었다.
“너희 집으로 가도될까?”
막장
택시를 탔다. 차량이 출발하기도 전에 그녀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안겼다니 좀 귀여운 표현이고, 그냥 자신의 몸을 맡기는 듯했다.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남자이니 나쁘지는 않았지만, 운전하고 있는 기사 분의 입장을 고려하며 나는 약간 미안한 듯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백미러로 마주친 그의 눈빛은 ‘괜찮소, 뭐 다 그렇지’였다. 매우 부끄러웠다. 아무튼 우리를 태운 차량은 강남 역을 출발해 테헤란 로를 달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길에는 자동차가 많았다. 그날따라 가로등이 유난히 붉은 홍등으로 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나름대로 상황 판단을 위해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녀는 단순히 술이 취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남자친구가 없다니 외로워 그런 것일까. 섹스가 필요할까 등의, 내 머리에는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냥 내 머리는 뜨거울 뿐이었다. 후두부에서 피가 거꾸로 역류함을 느끼며 그것이 절정에 달할 즈음, 내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역시나,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 역시나 그러한 듯했다. 내가 봤을 때에는 취한 모습이 아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춥다고 난리였으니까. 여하튼 강남 역에서 우리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날 우리에게 섹스 따위의 몸부림은 없었다. 나의 아드레날린이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남자임에 불구하고 이렇게 된 이유에는 사연이 있다. 일단 그녀의 행동이 별로였다. 뭐 쉬운 예로 '새벽녘의 고성방가'라든가. 나는 그 새벽녘, 그녀의 난동이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집 밖으로 한 번 내쫓았고, 동상 걸릴 듯이 춥다는 그녀의 전화에 다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신년벽두의 새벽이니 난동 부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사는 곳의 위치와 자택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그러나 절대 알려주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신년부터 출동하여 짜증이 났을 두 명의 경찰관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는 바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뭥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해병대 같은 머리 스타일에, 가느다란 구렛나루와 거기에 연결된 턱 수염과 콧수염. 여자는 취하고 치마도 짧으니 오히려 나를 수상하다는 듯이 훑어봤다.
"선생님, 신분증 확인 하겠습니다" (경찰), ...
"신변은 양호하시군요. 저희가 보호할 테니 귀가하시죠" (경찰), …
연말에 친구와 술집에서 사케를 마시며 재미로 뽑았던 백 원 짜리 ‘운세’의 내용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신년을 맞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니 그대의 가슴에 폭풍이 치리라’였다. 폭풍 한번 제대로 쳤다. 아무튼 늘 혼자 보내는 시간이야 그랬다고 치고, 나이 듦에 따라서 이 남자의 사정은 점점 복잡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