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달력을 확인하는 민준. 7월3일. 다가올 지수의 생일이다. 서랍을 열어 반지케이스를 꺼내 한번 보고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지수가 이 반지를 받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신의 청혼에 어떤 반응을 할지 떨리기도 하고 생각 만해도 즐거워진다. 그렇게 지수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인터폰이 울리고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선미다. 표정을 굳어버리지만 일로 연결된 사람이라 예의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일어나 선미를 맞이한다. 공사진행 건에 대해 형식적인 이야기가 주고 간다. 민준의 사무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선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거슬렸지만 참는다. 이것은 단지 비즈니스일 뿐이니 말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사원이 들어온다.
“ 실장님 앞으로 배달된 우편물입니다. ”
“ 아. 고마워요. ”
우편물을 받아 들고 책상으로 가 보낸 사람을 확인해 보는데 받는 사람 이름은 차민준이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지금 자신의 사무실에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는 것을 잊은 채 우편물을 열어 보는 민준은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고 표정이 심하게 굳어진다. 굳어지는 표정을 보고 선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우편물 안에 내용은 사진이다. 자신의 연인사진. 지수의 사진. 그러나 행복한 표정이 아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얼굴로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심장 박동수가 갑자기 빨라지고 다른 어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은 민준의 손에서 찌그러져 우편물에 쳐 박히고 급하게 사무실은 나온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선미는 민준이 나간 한참 후에야 자리에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진 우편물을 한번 내려다보고 승리의 표정으로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선다.
#민준의 차안.
사무실에서 나온 민준은 정신없이 주자창으로 달려가 차에 오른다. 아직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지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재빠르게 시동을 걸고 손은 핸드폰을 들어 지수의 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이 떨어진지 오래되어도 지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호 상관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휘문고등학교에 도착하여 교무실에 가보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몇 일 휴가를 냈다는 말만 듣고 허탈하게 나온다. 분명 지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다시 차를 돌려 지수의 집으로 가보지만 그 곳에도 지수는 없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두려움 때문에 민준은 견딜 수 없었다. 지수가 잘못되면 살아갈 자신이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자신이 지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더 화가 났다. 더구나 그 사실을 이런 방법을 통해 알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왜. 지수에게 그런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군지 앞에 있다면 죽일 수도 있을 만큼 흥분한 상태의 민준. 한참을 고민하다가 준혁이 생각나 준혁의 핸드폰 번호를 찾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들어오고 그 곳에서 준혁이 내린다. 준혁의 얼굴이 보이자 지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반사적으로 차에서 내린다. 역시 준혁이 부축해서 내리는 여자는 지수다.
“ 지수야! 지수야!”
그 목소리에 놀라 쳐다보지만 그 앞을 준혁이 가로막는다.
“ 지수야. 괜찮아? 무슨 일이야? ”
“ 민준씨.... ”
민준이 지수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자 민준의 팔을 잡고 막는 준혁을 보고 놀란 모습이다.
“ 왜 이러는 겁니까? 지수를 보러 왔습니다. 비켜 주십시오. ”
“ 아니요! 이제 당신한텐 그런 자격 없습니다. ”
“ 무슨!! ”
“ 준혁아... ”
“ 넌 가만히 있어.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건데.. 지수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돌아가세요. ”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 때문이라니... ? ”
“ 지수한테 당신 같은 부류는 어울리지 않아. 다신 지수 앞에 나타나지 마시죠. ”
지수를 부축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화가 난 민준은 준혁을 밀치고 지수에게 다가간다. 준혁이 벽에 부딪치자 지수가 준혁의 이름을 부른다.
“ 준혁아..”
“ 하...하.. 역시 그 깡패 근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닌가 보군.! ”
깡페 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리는 민준은 지수를 부축한 채로 준혁을 무섭게 쳐다본다.
“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
“ 왜죠? 안 그러면 그 주먹으로 나를 치기라도 할 겁니까? 당신 때문에 지수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두 번씩이나 당신이라는 남자를 만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이젠 내가 용서 안 해. 당신한테는 지수 절대 못 보내. 돌아가시지.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수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도 안쓰러운 마음에 안아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그 사진이라는 말인가. 멍한 표정으로 잡고 있던 지수의 팔을 스스로 놓는다. 울고 있는 지수를 감싸 안고 준혁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힘없이 무릎 꿇은 채 소리 지르는 민준. 너무도 괴롭다. 정녕 이번에도 자신 때문에 그 여자가 다쳤단 말인가. 2년 전에도 그 일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었고 또 다시 그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게 죽을힘을 다해 그 조직에서 나왔다. 거의 죽을 위기까지 갈 정도로 맞고 또 맞고 번번이 조직보스들에게 끌려 다녔었다.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이젠 과거 보다 미래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는데 한 여자만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또 자신이 지수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한다.
#민준의 집
모든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고 끝없이 밀려오는 죄책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술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공중에 분해 되버릴듯한 아픔이 몰려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간신히 집까지 들어오는 민준은 침실까지 가지 못하고 쇼파에 쓰러진다.
“ 지수.... 김지..수..”
# 민준의 회사 앞
또 한 번 그런 사고를 겪었을 때는 살고 싶지 않는 생각마저 든 지수였다. 너무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민준이 자신을 찾아 왔는데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낸 것이 마음 아팠다.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잘못 아니라고. 그저 내가 운이 없는 여자인거라고. 절대로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 루 하 루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 극복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절대로 차민준이라는 남자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아닌데도. 그걸 잘 아는데도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 못해주고 그렇게 보내버렸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아직은 사람들이 무섭고 세상이 무섭지만 용기내서 온 곳이 민준의 회사다. 무슨 말이라도, 무슨 위로라도 아니면 꼭 안아주기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발걸음이 여기까지 옷 것이다.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무며 참아낸다. 그리고 다짐한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다. 19층에 내려 민준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차민준 실장님을 찾아 왔는데요.”
“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쩌죠. 오늘 실장님 결근하셨는데요. ”
“ 결근이요? ”
“ 네.. 저희도 통 연락이 안 되서 걱정하던 차였는데. ”
“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
사무실 밖을 나오는 지수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분명 마음이 힘들어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민준의 집으로 향한다.
# 민준의 오피스텔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둠으로 가득한 민준의 집안을 스위치를 눌러 환하게 만들고 나서야 민준이 쇼파에 쓰러져 앓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 민준씨... 어떻게.. 열이..높아. 민준씨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요. ”
지수의 말에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민준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수건에 물을 적셔 민준의 몸을 닦아내고 이마에 수건을 올려놓는다. 집안을 뒤져 해열제를 찾고 자신의 품안으로 민준의 머리를 끌어 올려 해열제를 먹인다. 분명 어제 그 충격이 민준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다. 민준을 간호하면서 지수는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있다.
“ 미안해요. 민준씨.. 내가 어제 괜찮다고만 말했어도....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만 말 했어도....이렇게 힘들어하진 않았을텐데... 미안해...요.흑..”
밤새 간호하느라 한숨도 안자고 민준의 곁을 지키다가 지수의 체력도 고갈되고 있었다. 입술이 마르기 시작하고 지수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눈의 초점도 흐려진다. 민준의 열이 내려간 것을 확인 하고 주방으로 가서 쌀을 꺼내 죽을 끓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준을 간호하던 지수도 지쳐 민준의 손을 잡은 채 엎드려 잠을 청했고 민준은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다 온기가 느껴져 아래를 보니 지수가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아프고 눈물 난다. 이 작고 여린 여자에게 그 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니 또 다시 흥분되고 화가 난다. 그리고 한참을 지수의 얼굴을 눈썹부터 입술까지 섬세하게 손가락으로 만진다.
“ 지수야..”
시간이 흐르고 지수가 잠에서 깨고 어색함에 서로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
“ 정신이 들어요? 민준씨? ”
“ 응...”
“ 아... 음.. 내가 죽 끓여 놨는데. 금방 가지고 올게요. ”
어색함의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서던 지수의 손목을 잡는 민준을 보며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지수. 그 모습을 본 민준 역시 힘들지만 결심한 표정으로 말한다.
“ 우리 그만하자. 지수야. ”
그만? 순간 지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민준이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최준혁씨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너에게 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거야. ”
“ 아니에요. 민준씨.. 그런 거 아니에요. 준혁이 말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준혁이는 단지 내가 걱정 되서..”
“ 나와 있으면 지수는 위험해져. 그게 좋겠어. 그만하는 게. ”
“ 아니라구요. 민준씨 나 괜찮아요. 당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당신 탓 아니에요. 걱정 안해도..”
“ 아니! 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 얼굴 보지 말자. ”
너무도 단호한 말투와 표정으로 지수의 말을 끊어버리고 그 자리를 피하듯 베란다로 나가버리는 민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부터 민준도 따뜻함이 묻어나고 자상한 남자는 아니었다. 무뚝뚝한 성격이고 잘 웃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겪으며 지수를 만나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느덧 온화한 표정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이 남자가 지금은 처음 민준을 만났을 때보다 더 어둡고 냉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외면해 버린다. 순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거라고 믿고 싶다. 당연히 이 남자 나를 놀리는 것일 거라고 여기고만 싶다. 머리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이미 지수 자신의 마음은 인지한 듯싶었다. 지수 자신의 몸은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지수의 뺨에는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민준의 표정과 말투를 보고 듣는 그 순간부터 심장을 쪼여오는 듯한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자리에서 한 30분쯤은 얼음이 되어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다시 시간이 돌아갈 때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고 단지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웃으며 넘기고만 싶었다. 그 자리 그대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차마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해 간신히 오피스텔 밖으로 나온다. 민준이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부터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혹시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 마음껏 소리도 내지 못하고 더 이상 그 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울기 시작한다. 오피스텔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지수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하지만 지수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 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이 어두워진다.
#민준의 사무실
따뜻한 봄이 지나가고 초여름 날씨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길거리에 사람들의 옷들도 소매가 짧아지고 겉옷을 걸친 사람들이 줄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민소매 옷으로 자신을 한 것 뽐내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시계는 오후 1시 30분을 지나가고 있다. 점심시간이라 모든 직원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옹기종기 모여 오늘의 점심메뉴를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시간일 테지만 민준에게는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민준에게 즐거움이란 없었다. 평생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얼마 안 되는 삶이었기에 지수와의 시간은 1분 1초라도 중요하고 소중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두 사람은 함께 하지 못 하게 될 테니. 지수를 그렇게 모질게 보낸 후부터 민준의 입가에선 미소를 찾아 볼 수 없다. 잠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모든 인생사가 한 순간에 지겨워진다. 길 잃은 양처럼 사방으로 나눠진 길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다. 또 다시 혼자라는 것과 또 다시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아프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모든 게 사실이니까.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으며 무미건조한 이 생활을 연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민준의 괴로움을 보여주듯이 피부는 까칠해지고 턱수염도 자라나고 눈의 초점이 흐려진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단 며칠사이에 말이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 악몽을 꾸기도 한다.
그런 고요함을 깨고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건드리는 것에 놀라 돌아보니 선미다. 오랜만에 만나는 민준의 얼굴을 본 순간 눈 동공이 커진다.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 어제 야근이라도 했나보죠? 얼굴이 왜 그래요? ”
선미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하도 하지 않고 선미를 뒤로 한 채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민준을 보고 기분이 상한다.
“ 이봐요. 차민준씨!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 법이 어딨어요? 귀머거리라도 된 건가요? 아님 벙어리? 하... 정말 아무런 대구도 없으니 할 말 없어지네. 아직 점심 전인 것 같은데 나가서 뭐 좀 먹죠.? ”
“ 생각 없습니다. ”
“ 하... 정말.. 이렇게 매번 무시당하니까 미치겠네. 그거 알아요? 난 당신이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이 더 가지고 싶어 미치겠다구! ”
또 다시 대답이 없는 민준의 팔을 잡아끌며 억지로 사무실 밖으로 나오게 한다. 사무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무심코 옆을 보다 한 여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지수였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민준에게는 거리 따윈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아무리 많은 인파속에 있어도 단 한 사람은 금 새 찾을 자신 있었으니까. 지수를 발견하고 의도적으로 팔을 뻗어 선미의 어깨에 둘러 감싸 안는다. 민준의 낯선 행동에 놀랐지만 그 행동이 싫지 않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지수와 두 사람이 마주치고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 민.준...”
지수가 민준을 바라보고 걸어오던 길을 멈춰 섰지만 민준과 선미는 지수를 모르는 사람인 마냥 가던 길로 걸어간다.
“ 이런 거구나. 헤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하.. 이렇게 만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가는 거였어. 그런 거였어. 음.. 하.. 울지 말자. 울지마...김지수...”
순간 눈물이 사무실 복도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한참을 서 있다가 무언가 문득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보지만 민준과 선미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는 중이다.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있는 힘 껏 달려 내려오기 시작한다. 학창시절 운동신경이 없어 체육대회 때면 달리기에서 꼴등만 하던 자신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오늘 처음 알았지도 모른다. 간신히 민준과 선미가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 한다.
“ 민준씨!!!!!!”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놀랐고 순간 멈칫 했지만 가던 길을 멈추진 않는다. 지수가 달려가 민준의 팔목을 잡는다.
“ 잠깐만요. 민준씨 나랑 애기 좀 해요. 우리 할 이야기 있잖아요. ”
“ 우리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까? 그런데 어쩌나. 전 없습니다. ”
“ 민.. 민준..씨? 왜.... 그..러는 거에요..? 왜 나한테 그런 말로..”
“ 제가 지금 이 분과 선약이 있습니다. 더 볼일 없으면 길 좀 비켜주시죠. ”
라는 민준의 낯선 말투에 온 몸이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었고 더 이상 민준을 붙잡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민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뒤엉켜 복잡한 심경만 더 해 갈 뿐이다.
‘더 볼 일 없으면 길 좀 비켜주시죠. ’
#주차장
민준의 차를 탄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동안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남자 지금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을 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소 짓는 선미. 민준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고 창백해진다. 민준 역시 지수의 흔들리던 눈망울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았지만 선뜻 시동을 걸지 못한다. 그런 민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는 선미.
“ 내가 운전 할게요. 자리 바꿔요. 우리. ”
“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차에서 내려주십시오. ”
“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당신은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가 않아! 그래서 더 매력이지. 내가 제안 하나 할까요? ”
“ 관심 없습니다. ”
“ 과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관심이 없는지는 제안하는 나조차 궁금하군요. ”
“ 나를 이용해 봐요. 내가 기꺼이 도와줄 테니까. 김지수씨가 당신을 하루빨리 포기하길 원한다면 이 방법이 가장 효과는 좋을 거에요. ”
“ 무슨!!!”
“ 이것보세요. 차민준씨! 방금 전에도 김지수라는 여자 속이려고 나를 이용했던 거 아닌가요? ”
“ 그건! 미안합니다. ”
“ 그러니까. 좀 더 미안해도 된다구요.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죠? 내가 확실하게 정리해줄게요. 내 제안 생각해 봐요. 점심 같이 먹긴 이미 어려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가죠. 다음에 또 봐요. ! ”
민준에 차에서 내린 선미는 자신의 차에 옮겨 타고 그 장소를 떠난다.
선미가 내리고 핸들위에 두 손을 내리치며 절규하며 괴로워하는 민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