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디오 컬쳐 세대, 김기덕과 만나다
얼굴에 여드름이 솟아나던 사춘기 시절,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은 괜히 허무했고 별은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아마도 감성에 한창 물오른 나이였을 것이다. 감성이 자만이 되었는지, 까까머리를 한 동급생들은 내가 보기엔 어린애들 같았다.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가고 세상에 고민일랑은 전혀 없는 표정으로 벗은 여자의 사진이나 흘깃거리는 그네들과 같이 놀기에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세상이 이러니, 그 때쯤부터 나는 영화 보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영화에는 지금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시크한 어른들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학교가 파하면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신작을 체크하고 빌려오는 일은 나의 당당한 프라이드로 여겨졌다. 비디오 대여점 아줌마는 그 때 유치원생쯤 되는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진열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내게 종종 좋은 영화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그 날도 그랬다.
“김기덕이라고 알아?”
나는 몰랐지만, 괜히 아는 척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는 ‘내가 영화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라는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다.
“알죠. 김기덕.”
“리스트엔 김기덕 감독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아, 나는 깜짝 놀랐다. 비디오 대여점에는 대여목록을 조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던가. 나는 헛헛해서 웃으며 말했다.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봤지요.”
아마 이 잔머리를 발휘했다면 천하대도 갔으리라. 결국, 나는 김기덕의 ‘섬’을 빌렸고 대낮에 대자로 기절할 뻔 했다. 그런 충격과 공포, 엽기는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나는 그 후로 낚시 바늘만 보면 그 마치 그것이 내 몸 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아, 몸서리 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김기덕의 영화가 끌렸다. 사실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 비교해서 세련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엿보였다고 할까. 그 후로 김기덕의 신작이 나오면 일부러 찾아 봤다. 때가 바뀌어, DVD 시대가 되었다. 김기덕은 참 이상하게도 해외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한국에서는 별로라지만, 해외영화제에 출품되고 상도 한 번씩 받아오니 슬슬 예술영화감독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아마 ‘빈집’이 접점일 것이다. 빈집이란 영화에서는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거의 동작만으로 영화가 흘러간다. 남편에게 매일 학대를 받는 상처투성이의 여자와 빈집에 몰래 들어 가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대사도 없이 무슨 용기로 만든 걸까. 김기덕이 그렇게 강조하는 해병대 정신?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과연 김기덕의 ‘빈집’은 모든 것을 보여주었는가? 그리고 그 방법은 최선이었는가?
이에 대한 문제에 대해 영화를 다시 한 번 감상해 보고, 나름의 생각과 비판점으로부터 다시금 영화 <빈집>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창작해보기로 한다.
2. 빈집에서 나는 소리는 무엇일까.
그래도 ‘빈집’ 은 가학성과 폭력성이 문제시되던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순화되고 보기 편해진 작품이다.
대신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남자 주인공 재희는 일정기간 빈집만을 골라 주거하는 독특한 범죄자이다. 그는 며칠동안 빈집에 머물면서 먼저 살았을 그들의 삶과 맞닥뜨린다. 그러다 선화 (이승연 분)을 만난다. 선화는 남편의 학대로 모든 것을 상실한 여자로 보인다. 그녀는 말이 없으며 움직임도 아주 소극적이다. 남자 주인공과 선화는 둘 다 말이 없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 둘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려 애쓴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한다.
대사라는 것은 인물의 심리를 나타내는데 아주 유용한 장치다. 우리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그가 괴로운지 배가 고픈지 등의 심리상태나 욕구를 알 수 있다.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촌스럽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그 이상의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예술 감독이 되기 위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대사를 포기했으니 상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상징이다. 그렇지 않으면 1차적인 상징에 머물고 만다. 1차적인 상징으로는 우리에게 어떤 감동도 카타르시스도 줄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자 주인공은 빈집에 들어 가, 고장 난 물건을 고친다. 아이의 장난감 총과 체중계, 멈춘 시계, 오디오. 그리고 독거노인의 집에 방치된 시신까지, 대신 염을 한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그러나 그 장면은 도무지 무엇 때문에 들어 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주인공 자신의 특기일까? 그래서 선화의 아픈 마음을 고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나타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각각의 고장 난 물건들은 주인공의 상처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인 것일까? 본인은 특정부분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드는 부분들을 새롭게 다시 써보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시나리오-
# 독거노인의 집 (그믐달 뜬 밤)
하늘에 뜬 그믐달. 사방이 적막하다.
빈집인 줄 알고 들어 선 남자와 선화. 들어서면 역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에 선화 코부터 틀어막는다. 남자는 다소 슬퍼진 표정이 되더니,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것을 경계하는 듯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선화의 표정. 처음엔 무슨 동물을 보는 듯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사라지고... 막았던 코를 뗀다. 카메라 남자 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 숨진 듯한 노인의 시신과 그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선화도 옆으로 가서, 앉는다.
선화 (힘들게 말 꺼낸다) 무섭지... 않아요?
남자 아뇨... 진짜 무서운 게 뭐라고 생각해요?
선화 (쳐다보면)
카메라,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잡는다.
(글쓴이 주: 거울에 비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영혼은 거울에 비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가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람이 부재한 텅 빈 집만 골라 가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만 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 (결심한 눈으로) 우리가 보내 드려야겠어요.
염을 하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옆에서 바닥을 닦아내고 있는 선화가 한 화면 안에 들어온다. 땀방울이 갑자기 툭하고 남자의 손등에 떨어진다. 얼굴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염을 하는 남자. 뒤이어 바닥을 닦는 여자의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툭 떨어진다. 그들의 땀방울은 소리 없는 눈물이다.
대사를 삽입했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장면으로 바꿔 보려 노력했다. 그 장면의 시간적 배경은 그믐달이 뜬 밤이다. 그믐달은 음력으로 매월 마지막에 뜨는 달이다. 여기서 그믐달은 외로움과 소멸을 상징한다. 다음 장면.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신. 죽음을 목격한 자들은 으레 놀라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자는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는 무섭지 않냐고 묻는 선화에게 ‘진짜 무서운 것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를 ‘무존재 혹은 무존재감’으로 보았다. 텅 빈 집만을 골라 들어서는 주인공의 행동과 숨는 행위를 연습하는 행동에는 영원히 ‘무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엿 보였다. 그리고 노인의 마지막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며 천성이 어떠한가를 나타내었다. 서로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의 가장 말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글이 뜬다. 이 한 줄이 바로, 감독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라 여겨진다. 세상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나타낼 거라면 차라리 소설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화라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서는 곤란하다. 여러 장면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력과 생각의 여지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좀 더 영화적 문법에 맞도록 시나리오 형식으로 나타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나타내는데 주력하였으며, 부족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여 보았다.
-시나리오-
# 라스트신.
체중계에 올라서는 남자와 선화. 남자, 선화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체중계의 눈금이 마구 흔들린다.
WHITE.
눈 쌓인 길 위에 남자와 선화가 나란히 서 있다. 눈은 그쳤고, 햇빛이 들어 길 위에 번진다. 선화 역시 그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남자의 모습이 희미해져 간다.
장면전환.
선화의 방.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깬 선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간다. 적막한 거실. 구석에 놓인 체중계가 있고, 골프채가 있다. 다시 방으로 들어 와 커튼을 젖히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햇빛이 방 전체로 번지며, 화면 전체 WHITE.
그 위로 음악 흐르며. 영화제목인 ‘빈’과 ‘집’이 서로 교차로 한 번씩 뜨다가 결국엔 함께 뜨는 것으로 마무리.
그리고 END.
좀 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도록 장면을 새롭게 만들고 마무리 해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명확한 듯하지만 확실히 가늠하기도 힘든, 작열하는 햇빛 가운데 상황을 놓음으로써 주제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 하도록 노력했다.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며 마무리 된다. 결국, 존재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존재하게 되었다.
4. 결론
영화나 예술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 예술성을 논하기 전에 이미, 흥미를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할까?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말’ 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말’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 때, 우리에게는 어떤 숙제가 뒤따른다. 쉬운 말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면 수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단지 쉬우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큰 독이 될 것이다. 그 숙제를 잘 푼 사람은 극히 드물며, 우리는 아직도 그 숙제 때문에 고생 중이다.
여기서 살펴보았던 김기덕의 시나리오 역시 이러한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설명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는 것 같다. 보여주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감정이 생겨나게끔,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직접적 행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화’ 한다. 영화는 소설과는 달리, 영상으로 시를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압축과 여백의 미를 통해 독자 또는 관람객에게 감정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이번 시나리오를 다시 써 보는 경험을 통해 ‘빈집’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부터 옛날 봤던 영화를 다시 보련다. 그러면 다시 배우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또 여름이구나. 담배를 피워 물다가 코끝이 찡해진다.
“표현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짧고, 망각은 이렇게도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