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가나 유별난 나의 대한민국사랑은 늘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가 있던 날 밤.
난 당연하다는 듯 얼굴에 태극기를 다시 그려 넣었고,
목에는 대형태극기를 망토처럼 걸쳐 묶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곳 시드니 사람들에게 이런 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하디
못해 유별나게 보였나 보다.
호주에서 축구가 비인기 종목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까지 일줄은 미쳐 생각 못했다.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그려진 선명한 태극마크에 부끄러운 내가 될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눈이 마주 칠때마다 그냥 지긋이 미소 지었다
마치 내가 아닌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듯이......
이윽고 나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광장으로 일파만파 퍼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급기야 호기심어린 동심의 눈동자를 지닌
아이들에 둘러 쌓인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소문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짐작컨데, 군중들이
밀집해있던 터라 그 위력은 배가 되었으리라.
아이들은 내게 연신 똑같은 질문을 뱉어냈다.
"형~(사실은 아져씨였음-_-;;) 저도 그거 그려줘요 빨리요~~"
결국 어쩔수 없이 아이들로 줄을 만들고 경기내내 관람도 못한체
페이스 페인팅을 그려주는 아티스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시각 난 근무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 근무지는
이 광장 한켠에 있는 까페였고, 난 이곳에서 매니져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부하직원들이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급기야 일(?)을 벌렸다. 직원분들 죄송합니다.ㅜㅜ)
전반전이 끝나고 아이들이 또다른 소문을 퍼뜨렸는지...
그 아이들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내게 러쉬가 들어왔다.
솔직히 이땐 너무 힘들어서 팔이 저리고, 장시간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에 쥐까지 나는 등...
붓을 짚어 던지고 GG (포기라는
뜻을 가진 스타크래프트 용어)를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마치 저글링 한부대에 둘러쌓인 마린의 처지와 견주면 이해가
빠를 듯 싶다.
그런데, 이번엔 성인과 학생, 남녀노소 구분할것 없이 내 앞에 줄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_-;;;;;
결국 경기내내 페이스 페인팅을 그리느라
한순간도 제대로 경기관람을 할 수 없었다.
.
한바탕 페이스 페인팅이 끝나고, 이제 좀 쉬나 했더니...
엎친데 덮친겪으로 인자한 풍모를 가진 (심지어 그의 머리맡에선
후광도 살짝 보였다 - 그가 꼭 대머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인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데......
표정을 보니 쉽사리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경외감을 표하듯이, 또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묵언으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게 아닌가?
아직 그 이유를 전혀 파악 못한 나는 여전히 의아해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사진 한컷이 끝나고 그가 갑자기 명함을 건네며
조용히 내게 말했다.
"자네같은 청년이 있어서 한국은 오늘 꼭 이길것이네. 그리고,
명함에 있는 메일주소로 이 사진을 꼭좀 보내주게. 부탁하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다시 군중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난 그가 누군지 궁금해서 미간을 찌뿌려가며 명함을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는 다름아닌 이곳의 시장이었다.
물론 이 시민들을 위해 대형 스크린을 설치한것도 그의 명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테고, 이 행사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그의 입에서 비롯된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군중틈에 섞여 여느 시민과 다를 바 없이 함께 공기를 마시고,
함께 구호를 외치고, 때론 탄식을, 때론 환호를 보냈을 것이다.
갑자기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샘 솟았고,
그와 찍은 이사진이
불과 몇초사이에 그냥 동네 아져씨와 찍은 그를 위한 기념사진에서
내게 정말 소중한 나를 위한 기념사진으로 둔갑했다.
어쩌면 그가 정말 원했던건 끝까지 내눈엔 그냥 동네 아져씨로
비춰지길 바랬을지 모른다.
그와의 기념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카메라 맨이 나타나 내
면상에 플래쉬를 터뜨리면서 인터뷰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직업은 무엇이냐? 시장이 뭐라하던가? 몇살이냐? 등등
정말 귀찮아서 짜증까지 났다.
이건 뭐......
결국 그 인터뷰가 끝나고 난 잽싸게 그 자리를 떠야했다.
다시 내자리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페이스 페인팅을
마져 다 해주었다.
결국 전후반 경기의 단 한컷도 제대로 관전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심지어 한국말조차 하지 못하는
호주의 국적을 품고 태어난 이민 2~3세대 아이들의
홍조띈 볼에 대한민국의 태극마크를 그리며, 조금이라도
한국에 대해 알려 줄 수 있었기에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두번의 큰 환호성과 몇번의 탄식들,
한숨섞인 아쉬움의 숨소리로 쉽게 결과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내 노력이 우리 태극전사들에게 잘 전달이 되었다는듯.
그들은 두골이라는 대단한 활약을 펼쳐 내게 화답해 주었고,
난 다시한번 대한민국인이라는 자랑스러움에 한동안
그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느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참 멋진 시장님 아닙니까?
우리나라 시장님이었으면 비서들 주루룩 달고
삼엄한 경호 받으면서 특석에 앉아 관람하고 곧장
자리를 뜰 법한데 말입니다.
뭐, 가끔은 억지 웃음 꽤나 지어주시면서 사진 찍혀 주실지도...
(+)하나더... 한국에 계신 훌룡한 시장님들은 제외되심을 거듭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