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7. 클럽여행이 잡혔다
전날 월드컵 응원으로 늦게 잤더니 피곤도 하지만 오랫만의 여행으로 들뜬기분..
종종 지나는 가봤지만 직접 가보기는 처음인 전북 김제
김제는 평야로도 유명하다.
10월에는 지평선 해넘이 축제도 크게 열고 있다 .
김제여행 처음으로 들린곳은 금산사
모악산 도립공원에 위치한 금산사는 입장료가 2,500원 음...비싸다..
언제나 그생각 해본다 그냥 1,000원이나 1,500원정도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2,500원이면 정말 비싸다..
비싸다고 궁시렁 거리면서 금산사로 들어가본다.
클럽회원중에 한분이 그런다
예전에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한뒤로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고 한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 출처 : 금산사 홈페이지 -
입구에 들어와서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
옆으로 3층으로 있는게 미륵전...대웅전이다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미륵전안에는 불상3개가 있다 현재는 2개만이 보이고 하나는 천으로 덮어놨다
아무래도 보수를 할 듯 싶다..
가운데 불상 높이가 11.82m, 양옆 불상이 각각 8.79m로 상당히 크다
그래도 미륵전이 3층으로 되어있다...^^
이슬비를 맞으며 금산사 여기저기 기웃기웃 사진을 찍고 그 다음 여행지로 이동을 해본다.
두번째로 이동한 곳은 벽골제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성리에 이르기까지 제방이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저수지. 우리 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역사적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세 사가들이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 속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한 사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종 때와 인종 21년(1143)에 수축한 바 있었으나, ≪고려사≫ 세가(世家)에 의하면 인종 24년 무당들의 말에 의해 새로 축조된 둑이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축조하였으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폐지하고 말았다.
현재 그 유적은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제방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1925년에 동진(東津) 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기간수로(基幹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3개 소에 수문지(水門址)가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보면 두 개의 수문이 더 있었다고 한다.
1975년 수문지 2개 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약 4.3m이고, 윗변의 너비가 7.5m, 그리고 밑변 너비는 17.5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의 너비는 4.2m로서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며, 1개의 무게는 약 8t에 달하고 있다. 수문 외부에는 호안석(護岸石) 등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한편, 저수지 수면의 만수 때 이 제방을 구축함으로써 확보되는 점유 총 면적은 37㎢, 즉 1,120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달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정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측정법(水準測定法)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이는 당시 토목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제방과 함께 이곳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김제벽골제비는 1959년에 일괄해서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 출처 : 네이트 검색 -
예전 벽골제가 저렇게 생겼을 것 같다
넓은 저수지에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들고...가득 담아놓은 물로 김제평야의 곡식들은 익어가고...^^
벽골제의 유명한 쌍용이다.
벽골제하면 이 쌍용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용두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오~~멋져 멋져....ㅋㅋㅋ
벽골제는 가족단위 쉼터로 좋은것 같다
둑방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과..
여기저기 정자도 있고 물레방아도 있고 아이들과 뛰어놀기도 좋고...^^
근데 자전거는 안가지고 왔음 좋겠다..자전거 바퀴에 잔디가 상하니깐...
주차장옆에는 소를 주제로 만들어 놓은 동상들이 즐비하다.
송아지랑 밭가는 소, 여물뜯는 소, 쉬는 소 등...참 볼거리를 잘 해놓은 것 같다.
벽골제는 농경문화박물관, 우도농악관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테마연못이 있어서 아이들과 체험하기도 좋을 듯 싶다. 도로 건너편에는 아리랑 문학관도 있다.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과 조정래 작가를 기리는 공간이다.
아리랑 문학관 뒷쪽으로는 창작스튜디오도 있다는데 거기까지는 못가봤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음 찾아가봐야 겠다...^^
처음 가본 여행지에서 좋은 볼거리를 찾았고 맛있는곳도 알게되고...^^
알찬 여행이였던것 같다.
10월 지평넘 축제 할때 다시 한번 와봐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