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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순대와 귀여운 여고생

님들아.


그래요.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삶의 무료함에 지쳐가고 있던 나는 요즘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차가운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어요.

그래요. 님들아.

당연히 밥통에 밥은 없었고 난 비겁하게 라면 물 따위를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님들아. 후후후..

요 한달간 집에서 밥먹고 응가하고 잠자는 것 외에 내가 했던 생산적인 일 하나가 있어요.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으기 시작한거에요.

난 그릇이 넓은 남자라 과감하게 10원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님들아. 남자는 이상이 높아야 해요. 난 10원따위의 액수에 쉽게 흔들리는 사내는 아니에요.

자신의 값어치는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다고.. 누군가가 막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요.

50원짜리부터는 외면하지 않고 차곡차곡 내 서랍안에 정리를 해뒀어요.

500원짜리라도 발견되는 날이면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전에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의 행운을 자축하곤 했지요.

그렇게 해서 모은 동전은 무려 3000원이 넘었어요.

난 양쪽 주머니가 가득 동전을 채워 넣고 무거운 부자의 발걸음으로 집밖을 나섰어요.

나의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얼마전부터 우리집 골목 입구 어귀에 '백암순대'라는 간판을 단 트럭을 눈여겨 보고 있었어요.

중2때 산 미츠코 런던 반바지와 삼디다스 슬리퍼로 모던한 풍의 런던 간지를 완성하고

비틀즈의 'Hey, Jude'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그 트럭에 당도하였어요.

"아줌마, 순대 얼마씩 하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드렁한 아줌마의 대답이 이어졌어요.

"보통 순대는 1인분에 2천원, 백암 순대는 1인분에 3천원.. 보통으로 하나 줘?"

순대를 자르려고 칼을 든 아주머니의 행동은 나의 짤막하고 무게 있는 말 한마디에 멈춰 버렸어요.

"백암으로 합시다."

아줌마의 오른손에 움켜쥔 식칼이 부들부들 떨리는것을 난 느낄수가 있었어요?

순대 아줌마는 경이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혹시 간과 허파도 평소 즐기시나요? 혹, 그렇다면 그 비율은 각각 얼마로 해야 할까요?"

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간과 허파를 동등한 비율로 많이 주되 그 합한 양이 순대보다 적으면 안될 것 같아요."

"Hey, Jude~ Don't be afraid~"

난 따끈따끈한 순대 봉다리를 내 콧노래에 맞춰 흔들어 걸으며 금의환양의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 때였어요. 내 뒤에서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저기요.. 잠시만요."

난 그 작지만 맑음 음색이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어요.

그 곳엔 교복을 입은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커트머리 소녀가 보였어요.

"나요?"

그 소녀는 빨개진 얼굴로 내 강렬한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어요.

난 조금은 댄디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어요.

복숭아같은 볼살, 까만 눈썹 그리고 밑에 약간 불안에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

이 소녀는 날 왜 불렀을까요?

내가 맘에 든 걸까요. 그렇다면 난 말로만 듣던 그 헌팅이라는 것을 당하고 있다는 걸까요.

이 소녀는 날 보고 반했을지도요.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나이차가 조금 있겠지만 그녀의 꾹 다문 입술에서 그 정도 장벽은 금방이라도 뛰어 넘어버릴것 같은 의지를 보았어요.

순간, 난 그 소녀를 김연아보다 더 사랑하기로 맘 먹었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와 그 소뇨가 잘 지낼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엇어요.

"날 왜 불렀나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어요.

"저기... 담배 한값만... 대신 사다 주시면 안되요?"

그녀가 나에게 살며시 내민 고사리 같은 손에는 2천원이 들려 있었어요.

'아.. 디스 피는구나.'

난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배신감에 가득찬 눈빛으로 소녀를 잠시 2초간 응시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집으로 슬픈 발걸음을 돌렸어요.

타닥 타닥..

뒤에서 날 쫓는 소녀의 발걸음이 들려왔어요.

소녀는 울쌍을 지으며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어요.

"죄송해요.. 선배가 시켜서 그래요.. 부탁 좀 드릴께요.."

난 다시 뒤돌아 소녀를 바라보았어요.

소녀는 못된 선배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녀는 니코틴 중독자가 아니다, 사실이라면 소녀를 구해내자,

이 가련한 소녀와 놀이 동산에 가고싶다, 저 목에 보이는 빨간 자국은 멍자국인가, 왜 그 선배는 하필 목을 때렸을까요.

"제발요.."

소녀의 간청이 다시 한번 내 귀를 막 간지럽혔어요.

"선배들 어딨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내 손에 순대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로 난 문제를 크게 만들기 보단 차근차근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로 했어요.

난 그녀가 준 2천원을 받아들고 편의점으로 향했어요

그녀는 다소곳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더군요.

"밖에서 잠시 기다려요. 내가 곧 사올께요."

우웡.

순간 난 내가 그 영악하고 치밀한 소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난 현기증으로 편의점 계산대에 손을 짚고 가쁜 숨을 내쉬었어요.

점원님아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어요.

님들아.

이럴수는 없었어요.

난 정말이지 막막 머리속이 너무 복잡해졌어요.

심장이 돌덩이같이 무거워졌고 숨조차 제대로 내쉴수가 없었어요.

점원님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어요.

"뭐 찾으세요?"

난 다시 편의점 통유리 밖의 소녀를 바라보았어요.

소녀가 천사같은 얼굴로 싱긋 웃더군요.

'난 더 이상 속지 않아. 아까 니가 지었던 악마의 힘을 손아귀에 쥔듯한 웃음을 보았단 말이야.'

 

난 천하장사 소시지를 5개 달라고 하고 점원에게 소녀가 준 이천원을 건내주었어요.

점원님아는 잔돈을 거슬러 주었고 난 내 주머니안에 잔돈을 넣었어요.



소녀야. 이 게임은 나의 승리다.

넌 나에게 소시지 등 쳐먹힌거야. 난 나쁜 남자니까.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은 정말 심장이 터질것 같았어요.

두근 두근.

난 그 커다란 심장박동 소리를 떨쳐버리려는 듯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을 열고 질풍의 뜀박질을 시작했어요.

집까지의 거리는 약 200미터.. 난 마이클 존슨의 주법을 이용했어요.

정말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미친듯이 달렸어요.

소녀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가요.

막 하늘이 무너지고 막 그런 느낌이었을 거에요.



집 현관문을 열고 거친숨을 몰아쉬며 난 마루에 대자로 뻗었어요.

헉헉거리는 내 숨결과 이마에 흐르는 땀은 팜므파탈을 응징한 정의의 표식이었어요.

난 승리감에 취해 크게 웃으며 손에 쥔 전리품, 천하장사 소시지 껍질 벗겨 오물오물 씹었어요.

풍부한 치즈맛이 내 입안을 가득 메꾸었어요.



그렇게 소시지 5개를 다 먹어치울때 쯤에서야 난 깨달았어요.

내 순대..

편의점 계산대에다 놓고 온 것일까.

내 백암 순대..

편의점을 다시 가볼 수는 없었어요.

그 소녀를 마주치는 건 아무리 나정도 되는 남자로도 조금은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니까요..



님들아. 난 그냥 라면 물을 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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