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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3간도에서의 항일투쟁 ⑷

조의선인 |2010.07.29 21:38
조회 381 |추천 0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상해의 임시정부를 따라야 한다는 김좌진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단독으로 임시정부를 따로 수립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국무회의를 거친 중요한 문서를 휴대한 특사(特使) 조병진(趙炳振)이 정의단에 찾아왔다.

 

조병진은 임시정부에 명칭이 알려진 단체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임시정부의 결의내용을 설명하고 무장 단체들의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취지는 모든 국내외 교포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단일체제 아래 대동단결(大同團結)하자는 내용이다.

 

“만주에 있는 여러 반일단체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만한 성과도 올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노력에 상응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점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동지들의 값진 희생이 헛된 것이 되고 말 중대한 고비에 지금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왜놈들의 경찰과 군대는 우리 독립군보다 우수한 장비와 무장력으로 압도하며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우리 동지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압도적인 왜놈들의 군세에 대항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만주지방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두 개의 군사령부로 통합할 것을 제의해 왔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상해를 근거지로 하여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만주지방을 군사활동 위주의 목적으로 남만주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만주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설치하되 현지의 자치활동도 아울러 허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상해의 임시정부는 외교적 경로를 통하여 대량의 무기 구입도 제의해 왔다. 그리고 더욱 반가운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정규군이 무기 공급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원래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겪었던 나라로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짓밟힌 대한제국에 대하여 은근한 동정을 품고 있던 관계로 임시정부의 무기 구입 교섭에 쾌히 응락해 온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특사 조병진은 남만주의 부민단(扶民團)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임시정부 휘하에서 서로군정서로 개편시키기로 한 결의서를 서일에게 제시했다. 이미 대세가 이에 이르니 서일(徐一)도 독자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서일도 이 해 12월에 정식으로 북로군정서로 조직을 개편했다.

 

그러나 비록 군사작전을 기본목표로 하는 자치단체이지만 재만동포들의 지지 없이는 군사조직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대민활동도 군사작전 못지않게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북로군정서는 본영을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波溝)에 두고 중추기능인 군사부를 설치하여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여단장에 최해(崔海)·정훈(鄭勳) 등을 각각 임명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총재인 서일은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단기 속성 군사교육기관인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北路軍政署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소장에 김좌진을 임명하여 이장녕·김규식·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弘國)·최상운(崔商雲) 등을 교관으로 등용, 일선에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도록 했다. 서일은 이와 별도로 민사부를 설치하여 북만주의 교포들을 상대로 한 지방행정에 주력하였으며, 상해의 임시정부와 긴밀히 연락하여 현지에서 거두어 들인 군자금과 국내에서 보내온 유지들의 성금 등을 모아 소망하던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구입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교육생들과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높아졌다. 이로써 김좌진의 지휘 아래 8백여명 정도의 군사병력이 모아졌고 기관총(機關銃) 3문, 권총(拳銃) 40여정, 소총(小銃) 7백여정, 탄환(彈丸) 1백만발의 무기가 확보되어 만주의 여러 독립군 가운데 최고의 정예부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면 서일은 꾸준히 교포사회 속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10만원의 성금을 마련하는 한편 관할지역 안에 야간 강습소를 설치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정신 함양에 힘쓸 뿐만 아니라 농사와 임업 등 교포의 지방산업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여 더욱 교포사회와 유대를 강화하니 북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미국의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사상이 강대국에게 억압받던 약소국 민족 지도자들 사이에 팽배하고 일제의 무단통치에 울분을 견뎌오던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한용운(韓龍雲) 등 지도자들이 고종 황제의 국장 날짜를 노려 민중을 선동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어났다. 바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봉기한 것이었다.

 

이처럼 국내외의 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무기관리와 군사훈련 및 작전계획 등 분주하게 일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로써 김좌진이 제의했던 두가지 조건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북로군정서가 군대의 체제를 갖추니 김좌진은 총재인 서일 휘하에서 군사부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마적단(馬賊團)의 횡포

 

1920년 여름에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자들을 크게 당황하게 했던 대사건이 있었다. 일본의 정예군이 독립군 장병들과 맞붙은 첫 정규전(正規戰)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병호(安秉鎬)가 인솔하는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산하 경비대, 박승길(朴昇吉)의 신민단(新民團) 부대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였다.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이끄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가 안산(安山) 방면으로 침입하자, 독군부 병사들은 사면에 매복해 있다가 맹렬한 총격을 가하여 150여명의 일본군을 살상하고 나머지는 유원진(柔遠鎭) 쪽으로 패주시켰다. 이 싸움이 대일항전사(對日抗戰史)의 쾌거인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였다.

 

야스카와 소좌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후 상부에 보고하는 문서에서 ‘대안(對岸)의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은 정식(正式)의 군복(軍服)을 사용하고 그 임명(任命) 등에 사령(辭令)을 쓰며 예식(禮式)을 제정(制定)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統一)된 군대조직(軍隊組織)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支那) 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警告)를 줄 필요가 있다’고 하여 독립군의 전력이 정규군(正規軍)과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대장(大將)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을 탄압하기 위해 마적단(馬賊團)을 매수하는 간계(奸計)를 꾸몄다. 일제(日帝)가 만주를 노리는 야욕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만주의 많은 자원을 확보하여 늘어나는 일본의 인구에 대처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만주는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의 사유지나 다름없었으므로 일본군이 진주할 명목만 있다면 만주를 일본의 새로운 영토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므로 마적단으로 하여금 훈춘성(琿春省)을 혼란시키게 한 뒤 그를 구실삼아 일본군이 진주한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둘째는 항일독립군(抗日獨立軍) 박멸에 있었다. 일제는 엄연한 중국의 영토이고 당시 장작림이 통치하고 있는 간도에 한국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이유만으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는 없었고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하여 명목을 찾는 기회만을 궁리한 끝에 야비한 대책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마적단으로 하여금 소수의 일본인들을 공격하게 하여 일본군이 진주할 구실을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일본군과 마적단이 합세하여 중국 군경의 만주에 대한 치안유지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악명이 높았던 마적단의 수괴는 장강호(長江好)란 자였다. 그는 훈춘의 일본영사관 측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한국인들이 개척한 농장을 습격하고 학교를 불태우는 등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았으며, 한족회(韓族會)에 소속된 오제동(吳濟東)·전성규(全星奎)·김재호(金在鎬)·송계원(宋桂元) 등 한국인들을 납치했다가 참수(斬首)한 시신을 압록강(鴨綠江) 유역의 밀림지대에 버리고 달아나기도 하였다.

 

1920년 9월 25일 새벽에 4백여명의 마적단이 암암리에 일본군과 음약(陰約)하고 훈춘성을 공격해왔다. 마적단은 상가를 약탈하고 일본영사관 건물에 불을 지른 뒤 20여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1백여명, 중국군 120여명을 사살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 사건에서 훈춘 일본영사관 경찰대에 근무하고 있던 시부타니[澁谷] 경부(警部)의 전가족 7명이 학살되었으니, 타국의 영토에 군대를 진주시키려고 마적단을 매수하여 동족(同族)을 죽인 일본인들의 음흉한 본색이 그대로 드러난 참변이었다.

 

일제는 이 훈춘사변(琿春事變)을 구실로 만주 지역의 자국 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 아래 군경(軍警) 3개 대대 병력을 훈춘성으로 파견했다. 일제는 본래 마적단 토벌에는 의도가 없었고 우선 훈춘성에 진주한 뒤 조선 독립운동 주모자를 색출, 검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아타이[熱海] 경시(警視)와 고마츠[小松] 경부(警部)가 인솔하는 150여명의 일본 전경대(戰警隊) 150여명은 친일파 조선인 단체 보민회(保民會)와 더불어 간도 지방에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사찰을 시작했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면 즉석에서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이 훈춘과 간도일대는 삽시간에 일제의 군경에 의하여 아수라장이 되었고, 무수한 한국인들은 죄없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일제는 중국 당국과 한번도 회담을 하거나 합의하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계획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마적단에 의한 손실은 김좌진(金佐鎭)의 주변 사람에게도 나타나고 있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가 편성되기 전에 만주에 뿌리를 박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대한 농장을 이룩한 재만교포 성오채(成吾彩)의 호의로 그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성오채의 사랑방에는 인근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는 이진경(李眞卿)이란 노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이복희(李福姬)라는 갓 스물의 외동딸이 있어 성오채의 아들 성준식(成俊植)과 애틋한 사이였다. 성준식은 성격이 괄괄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했으며 농사와 같은 경작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김좌진이 성오채의 집에 식객으로 들어갈 무렵에 성준식은 부친에게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훌쩍 가출하여 행방이 묘연했다. 두 달 후에 아들의 소식을 들은 성오채는 몹시 마음이 언짢았다. 성준식이 신민단 독립군에 입대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오채의 세 아들 중 두명은 장가들어 이미 손자까지 보았고 또한 농사일에도 열심히 하고 있으나 총애하던 준식이는 성격이 특이하여 농장일에는 뜻이 없고 엉뚱한 생각만 했던 관계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성오채와 이진경은 사돈이 될 것을 언약하고 있었으나 성준식이 독립군 병사가 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위치에서 탄식만 하고 있을 무렵 다시 준식이의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전달된 내용은 준식이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알고 보면 성준식의 집안에는 이때부터 이미 검은 먹구름이 덮고 있었다.

 

김좌진은 때마침 젊은 병사들과 함께 사냥을 겸한 전투훈련을 목적으로 백두산의 산림지대로 나가 있었는데, 일본군의 사주를 맏은 마적단이 밤중에 성오채의 집을 습격하여 불사르고 일가족을 몰살한 뒤 흙먼지를 피우면서 사라졌다. 우연이라고는 너무도 참혹한 변을 당한 것이다. 김좌진이 밀림을 헤치면서 사냥한 짐승을 메고 돌아오니 성오채의 집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가족들은 전원 학살당한 뒤였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이웃집에는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다만 성오채의 집에만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이진경이 김좌진을 붙들고 통곡했다.

 

“마적단의 습격으로 성씨 일족이 몰살되었네. 조용히 생각해보면 아마 준식이 독립군에 가담하였다는 것을 냄새 맡은 왜놈들이 시켰을 걸세.”

 

아무리 발을 굴러보아도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서운 보복의 손길은 차츰 재만동포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자네가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있게나. 내 별로 도와줄 건 없지만 꼭 좀 성씨 일가의 복수를 맡아 주게.”

 

울분에 떨며 눈시울을 붉힌 이진경이 김좌진의 손목을 붙잡고 당부했다. 그리고 성오채가 일궈 놓은 개간지는 이제부터 김좌진의 부하들이 경작하며 복수의 그날을 벼르고 있었다. 이 결정은 재만교포들의 협의 끝에 결정된 것이다. 김좌진은 이진경의 요청으로 그와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부인도 이미 별세한 이진경의 집에는 딸인 이복희가 모든 살림을 맡고 있었다. 김좌진의 거칠고 얼어붙은 마음은 이복희를 볼 때마다 차츰 봄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북만주의 풍토 탓인지 이복희는 꾸밈새없이 김좌진을 정성껏 대해주었다. 그러한 점이 김좌진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이복희를 볼 때마다 김좌진은 문득 고향에 어머니와 함께 두고 온 아내 오숙근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복희로부터 이국 땅에서 고생했던 과거와 허전했던 빈구석을 채우기도 했다.

 

김좌진은 지금까지 이역 땅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사이도 없었지만 이복희를 만난 뒤부터는 격렬한 이성애(異性愛)를 느끼고 인간으로서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조금씩 느끼며 커다란 변화가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활달한 기질이라고 하지만 갓 스무살 나이의 처녀로서 마음에 물밀듯이 스며드는 야릇한 심정은 이복희에게도 애정의 눈을 뜨게 한 계기도 되었다. 이 때 김좌진은 서일의 제의를 받아들여 조국의 부름으로 생각하고 이복희와 재회의 약속도 없이 이진경의 집을 떠나고 말았다.

 

북로군정서에서 중책을 맡기로 된 이상 일개 아녀자에 대한 애정 등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처음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동생을 고향에 두고 떠날 때도 그러했고 서울에서 몸을 숨겨준 인연으로 부부가 된 김계월의 경우도 그러했다. 김좌진의 앞길에는 오로지 무장투쟁으로 일본인들을 바다 건너 열도로 몰아내고 조국을 다시 찾는 일만이 생명을 다 바쳐 해야 할 일이라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좌진은 대망의 부푼 가슴을 안고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로 향했다. 그 때 이복희의 용기로서는 노인 아버지를 홀로 남겨놓고 김좌진을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더구나 김좌진이 눈짓만이라도 암시했더라면 따라 나섰겠지만 김좌진의 태도에도 그러한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좌진의 태도는 어느새 그녀와 만나기 전의 굳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에 부임해서는 이복희라는 한 여인을 까맣게 머리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지난 추억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김좌진은 오로지 일본군에 대항할 전투부대의 편성을 끝내고 인근 교포로 구성되는 민병대 편성에 골몰하고 있었다.

 

김좌진이 구상하는 이 같은 조직과 편제는 앞으로 독립전쟁에 있어 현지 교포들과 서로군정서와의 유대를 한층 더 두텁게 하여 아울러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예비병력을 증가시키게 될 뿐 아니라 현지 교포의 적극적인 후방지원이라는 작전계획으로 폭 넓은 항일투쟁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현지 교포들을 설득하고 민병대를 조직하기 위해 총재 서일을 위시하여 북로군정서의 중진들이 대거 동원되었으나 처음에는 부정적이고 일본 경찰대의 탄압이 심한 북만주에서 가족보존을 위해서라도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 끝에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북로군정서의 체제정비가 끝나고 또한 교포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북만주의 광활한 지역에 영향력을 떨치며 일본 정규군에 대적할 수 있는 강대한 군세로 성장했다.

 

또한 서대파구는 북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으뜸가는 병참기지요, 북만주 교포의 자치적인 중추부가 되었다. 이와 같이 금방이라도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는 조직정비가 끝나니 김좌진은 사관연성소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막 사관연성소 정문 앞을 나서는데, 소복(素服) 차림의 한 여인이 김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여인은 피로의 기색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아니, 당신이 이 먼길을...?”

 

김좌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복희를 만나고서야 자신의 과거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구려. 자, 가면서 이야기를 좀 들어 봅시다.”

 

석양에 저물어 가는 햇살은 서산 위에 반달처럼 걸쳐 있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좌진과 이복희는 숙소로 가는 소로길을 걸으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장군님이 떠난 뒤 왜놈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지고 성씨 노인댁 가족 몰살과 화재사건이 있은 뒤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버님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는데 치료를 할 의사도 없고 산약을 구해 드렸으나 급기야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장군님을 기다리며 지냈는데 스무살 된 처녀 혼자 생활하고 있으니 부호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웃의 유수인 중국 사람이 제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자기의 후실로 들어오라고 권유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절했지요. 그러나 그 중국 사람은 집요하게 나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신변보호를 위하여 이웃집 교포의 집으로 피신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국 사람은 장정들을 동원하여 숨어 있는 교포까지 위협하며 나를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곳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지요. 교포들의 협조를 얻어 밤으로 밤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통하여 교포들의 신세를 지면서 북로군정서 사령부를 찾아 오늘에서 장군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말을 끝낸 이복희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과 중국인에게 위협당한 일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먼지와 함께 얼굴을 덮어 그를 보는 김좌진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이복희를 자신의 숙소로 안내한 김좌진은 욕실(浴室)에다 큰 목탕(木湯)을 하나 마련하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욕실 입구에 대나무로 만든 발을 드리워 보이지 않게 막고 이복희가 갈아입을 수 있는 새옷을 장만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김좌진이 새옷을 사 들고 숙소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막 목욕을 끝낸 듯한 이복희가 놀랍게도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로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갓 스무살 처녀의 탄력적인 몸매와 매끄러운 피부를 보자 김좌진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장군님, 부디 저를 안아주세요.”

 

이복희는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사내의 본능을 자극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김좌진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가 입술을 포개었다. 그의 입술과 혀가 이복희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빨기 시작하자 새빨간 그녀의 젖꼭지가 꼿꼿해졌다. 김좌진의 손가락이 그녀의 사타구니로 이동해 은밀한 부분을 희롱했다. 이복희의 깊은 속살은 벌써 젖어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얇은 신음이 이복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이복희는 오른손을 김좌진의 하체로 뻗어 남근(男根)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왼손으로 그의 둔부(臀部)를 붙잡았다. 김좌진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으면서 자신의 실체를 그녀의 깊은 속살로 삽입시켰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으나 이내 두 남녀의 육체는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되었다.

 

이복희는 파과(破瓜)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김좌진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부드럽게 하체를 움직이면서 두 손으로 이복희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두 남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온 신경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김좌진은 이복희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자신의 온몸이 폭발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이복희 역시 온몸 구석구석의 세포가 터져나가는 듯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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