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과 고구려 제일의 권력자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8·9개월 동안 이어진 이 전쟁에서 당(唐)은 패전국(敗戰國)이 되어 자칭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체면에 큰 손상을 입었다. 이 전쟁을 고구려(高句麗)의 승리로 이끈 주역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의 모든 군대를 총지휘했던 연개소문의 전술을 거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에서 30만 당군(唐軍)의 맹공(猛攻)을 끈질기게 막아낸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梁萬春)이 가장 큰 수훈(殊勳)을 세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서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던 장량(張亮) 휘하 당수군(唐水軍)이 장산군도(長山群島) 일대에서 고구려의 수군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더라면 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정벌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해군을 격퇴시켜 여당전쟁에서 실질적인 전공(戰功)을 세웠던 고구려의 장수(將帥)는 과연 누구였을까? 한국과 중국의 그 어떤 사서(史書)에도 등장하지 나오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의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옛 비사성(卑沙城)과 석성(石城) 등지에서 여당전쟁 당시 고구려의 수군 대장에 대한 존재를 증명해주는 비석이 발굴되었다. 비록 금석문(金石文)의 편린(片鱗)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淵秀英)이란 여성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연수영과 관련한 비사성·석성·청석관(靑石關) 등지에서 비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40년대에 이 지역 요령성 개주의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 나라의 학자로는 지난 1997년에 김금중 한민족통일교육연구소장이 비석문 일부를 발굴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비석의 명문(銘文) 대부분이 중국인들에 의해 변조(變造) 또는 훼손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천 4백여년 전 고구려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연수영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국상(國相)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나라의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정부가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청석관 유적지의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의 해상전투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모셔놓은 곳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이 우리 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적 실재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되었고, 비문 등도 중국 정부에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野史)인『서곽잡록(西郭雜錄)』과『비망열기(備忘烈記)』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고 한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淵素貞) 또는 개수영(蓋秀英)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역사서로 인정하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수영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녀의 오라버니인 연개소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연개소문에 관해서는 비교적 사료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정확하지 않지만 607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아래로 남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있었으니 연수영은 610년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연수영의 아래로도 연수진(淵秀鎭)이란 여동생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 남매의 조부는 동부대인(東部大人) 연자유(淵子遊)이고 부친은 연태조(淵太祚)로서 야금(冶金)에 뒤어나고 활을 잘 다루었다고 하니 이는 대대로 무장(武將) 가문이란 뜻을 것이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영웅적 기상과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덜쳤다. 그리고 부친 연태조가 죽자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했다. 그렇게 하여 국정에 참여하여 631년부터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감독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642년 9월이었다. 그가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무능한 제왕 영류태왕(榮留太王)과 태대형(太大兄) 고웅백(高雄栢)·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대사자(大使者) 고승(高勝) 등 측근 대신들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를 미리 알아낸 연개소문이 대신 180여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하여 모조리 숙청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영류태왕을 죽이고, 그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고장(高臧)을 새 태왕으로 내세웠다. 그가 바로 보장태왕(寶藏太王)이었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연수영도 오라버니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의 가병(家兵)을 이끌고 참전했을 것이다.
연개소문 일가가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좋아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혁명의 간접적 원인은 영류태왕과 그의 측근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굴욕적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연개소문을 비롯한 무장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고구려와 주변국의 정세를 살펴보자.
영류태왕의 본명은 고건무(高建武)로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이복동생이다. 612년에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침략으로 여수전쟁(麗隨戰爭)이 벌어지자 고건무는 수군원수(水軍元帥)로서 평양성 방어를 담당하여 패수대전(浿水大戰)에서 내호아(來護兒)의 수군(隨軍)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618년에 영양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국왕이 된 영류태왕은 전쟁유공자(戰爭有功者)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양태왕의 강경책과는 반대로 유화적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한편, 그 해에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에 영류태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건국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어서 621년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당은 그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여수전쟁 중 생긴 포로교환을 제의했다. 고구려가 여기에 응하자 수나라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대부분의 장수와 노병은 이런 저자세 굴욕적 유화책에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626년에 당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친형인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인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하여 제위에 오른 이른바 현무문의 변란이 벌어졌던 것이다.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좌를 강탈한 폐륜아 이세민이 바로 중국사의 대표적 성군이란 당(唐) 태종(太宗)이다. 연개소문은 이세민보다 열살 정도 아래다.
이세민은 중국통일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천하통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영류태왕이 이런 당의 음흉한 속셈도 모르고 또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봉역도)까지 보냈던 것이다.
고구려의 계속되는 저자세 외교정책에 자신감을 얻은 이세민은 631년에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을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또한 고구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은 경관(京觀)까지 제멋대로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런 당나라의 오만한 처사와 조정의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에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 무장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영류태왕은 장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남쪽으로는 신라를 공격하고, 당나라의 침공을 예방하는 천리장성을 축조토록 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638년부터 642년가지 토번·서돌궐·고창국 등을 복속시킨 뒤 고구려를 향해 칼날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치를 못 챈 영류태앙은 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고, 대신들의 자제도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더욱 고무된 이세민은 641년에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지리를 비롯한 정세를 낱낱이 염탐해오도록 시켰다.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이런 사정을 훤히 궤뚫고 있던 연개소문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류태왕을 끼고 도는 주화파 대신들이 사사건건 강경책을 주장하고 나서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래서 결국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어떻게 생겼을까?『구당서(舊唐書)』에 이렇게 나온다.
"(연개소문은) 수염이 길고 몸집이 크며 칼을 다섯 개나 차고, 좌우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항상 그 속관에게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말에서 내릴 때에도 그랬다.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병졸들을 길에 벌이고 인도자가 길게 소리쳐 행인을 물리치면 백성이 두려워 피하고 다 엉겁결에 구렁텅이로 빠졌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찼다는 기록이 마치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당시 고구려의 무사들은 칼을 다섯 자루씩 차고 다닌 것이 보통이었으니 이는 위압감이나 공포분위기 조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연수영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대의 영걸 연개소문과 피를 나눈 누이동생이니만큼 체격이 당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나운 남자 장수들과 수만 군사를 호령한 당당한 여장군이었으니만큼 아무래도 가냘프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지인 석성의 도사(道使)로 부임한 것은 오라버니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태왕을 새 태왕으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더나 일선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梳壯樓)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소장루(梳壯樓)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자기 누이 개수영(蓋秀英:淵秀英)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개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대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대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되었다. 개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軍務)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한편 같은 석성 점장대(點將臺)의 비문에는 ‘태왕(太王) 1년(보장태왕 재위 1년) 계묘년(癸卯年) 9월 왕이 교서를 내려 연수영을 석성도사(石城道使)로 삼았다’는 명문과 함께 이런 내용도 있다.
"3년 을사(乙巳) 봄 3월, 당(唐) 매괴왕(埋魁王) 이세민(李世民)이 수륙(水陸) 105만 병력으로 요동지역을 침범했다. 비사성(卑沙城)의 성주(城主) 우소(于炤)가…… 묘도(妙島)로 출병했다. 석성도사 연수영이 이르기를, 출병하여 가는 길이 역류가 일고 군선이 뒤집히니 출병은 옳지 않다. 또 묘도는 적지(敵地)이며 적세가 강하니 출병은 불가하다. 그러나 우소부(于炤夫)는 이에 따르지 않고 묘도로 병력을 보냈다. 결국 역풍이 불어 군선이 부서지고, 묘도에서 적을 만났다. 적장 장량(張亮)은 기다렸다가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형세가 매우 위급해져 대다수 군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수영이 곧 수군을 이끌고 나아가 구원을……"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未詳)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까지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片鱗)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남매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누비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되었고, 당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장산군도(長山群島)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다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되었다.
● 동북아 정세와 연개소문·이세민의 대립
그러면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고구려의 국왕을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민은 아연 긴장했다. 이세민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의 정사를 독판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 땅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거란(契丹)과 말갈(靺鞨)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고자 하니 의견들이 어떠한가?”
그러자 이세민의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이렇게 대답했다.
“개소문이 자기의 죄가 큰 줄 알고 우리가 토벌할까 두려워서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개소문이 방심을 하게 되고 또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의 죄악이 더욱 커질 터이니 이렇게 된 뒤에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렵 고구려의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즉위 이듬해인 642년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 장군은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品釋) 내외를 죽였다.
그런데 품석은 바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였다. 다급해진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만 했다.
당시 연개소문은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경우, 만일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황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은 644년에 ‘대국(大國)으로서 국제분쟁을 조정한다’는 되지도 않은 명목으로 현장(玄奬)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고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함락시킨 연개소문이 장안성에서 현장을 맞이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적대하는 것은 어제 오늘에 새로 생긴 일이 아니다. 수나라가 우리를 침범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5백리 땅을 도둑질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러자 현장이 이렇게 반문했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 하겠습니까? 옛 땅을 찾기로 말한다면 귀국이 차지하고 있는 요동도 옛날에는 모두 중국 땅이 아닌지요? 그러나 우리 대당제국은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데 유독 고구려만 옛 땅을 찾으려고 고집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에 연개소문이 대노하여 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구나! 너희가 우리의 요동 땅을 옛날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유철(劉徹:漢世宗)이 도둑질하여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너희 나라 영주나 유주도 모두 옛날 우리 대고구려의 군현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되찾고 말 터이니 너는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그렇게 전하라!”
이렇게 푸대접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한 현장의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좀 더 명분을 쌓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한 번 장엄(藏儼)을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장엄을 아예 토굴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이세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해 11월에 마침내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던 것이다. 동원된 군사는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육군 6만여명,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 장량(張亮)이 이끈 수군이 4만 3천여명, 군마 1만필, 전함이 5백척이었다. 이 10만여명의 침략군은 태종의 친정(親征)과 함께 3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그 이듬해인 645년 4월에 요하를 건넌 이세적의 당군은 신성(新城)과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철벽 같은 수비에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구려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중국의 여러 왕조와 무력충돌을 하는 동안 터득한 청야전술(淸野戰術)에 능했다. 이는 들판을 텅텅 비워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우물까지 막은 뒤애 모두 산성에 들어가 철통같이 방어하는 전술이다.
이세적은 군사를 돌려 10일간의 맹공 끝에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킨 뒤 요동성(遼東城)으로 공격 방향을 틀었다. 요동성은 전에 양광(楊廣)이 수차 공격하다가 실패한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거점이었다. 연개소문은 요동성이 포위당하자 4만의 정예군을 보내 구원하도록 했다.
한편 5월에 이세적의 뒤를 따라 수십만 본군을 거느리고 뒤따르던 이세민은 2백리에 걸친 요하의 늪지대인 요택에 흙을 퍼붓고 초목을 베어 다리를 놓고 가까스로 이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렀다. 이때 이세민은 자만심에 들떠 요택의 다리와 장비를 모두 부숴버리는 큰 실책을 범했다. 자칭 병법의 대가치고는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와 수백 겹으로 요동성을 에워싼 당군은 10여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하루는 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퍼부었다. 성루와 성안의 많은 집이 불탔다. 요동성의 군졸과 백성들은 사력을 다해 밀려드는 당군을 맞아 싸웠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요동성 점령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이번에는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급보를 받은 연개소문은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에게 전령을 보내 구원병 1만여명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백암성의 군졸과 백성들도 악전고투했지만 비겁한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당군과 몰래 내통하는 바람에 성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동성과 백암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백성 수만명을 포로로 잡고, 60만석의 군량을 확보한 당군은 이번에는 안시성(安市城)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후방에 안시성을 두고는 고구려의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므로 안시성은 두 나라 모두에게 더없이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당시 안시성에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양만춘(梁萬春)이란 출중한 양장(良將)이 성주로 있었다.
연개소문은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에게 고구려군과 말갈족 병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의 배후를 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요동방면군 총사령관인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작전을 전개하다가 당군의 유인책에 빠져 무너져버렸다.
사흘간 안시성 외곽 주필산에서 벌어진 서전에서 고구려군은 패배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했지만, 전투는 결국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연개소문과 고정의의 계략대로 고구려의 주력군 15만은 끈질긴 지구전을 펼쳐 적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데 성공,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당군은 안시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든가, 아니면 퇴각하든가 양자택일(兩者擇一)밖에 남은 수가 없었다.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는 그 해 7월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이세민의 조카인 이도종(李道宗)이 선공을 퍼부었으나 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세민은 공성무기도 별 효과가 없자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간 50만명의 인원을 동원해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이 토산은 며칠도 안 가서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고구려군 수백명이 재빨리 무너진 성벽을 통해 밀고나와 토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참호를 파서 당군의 진격을 막은 뒤 불을 놓고 방패를 담을 쳐 수비를 굳건히 했다. 화가 난 이세민은 토산 책임자 부복애(傅伏愛)를 처형했다.
이후 양군은 토산을 두고 4일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때는 음력 9월 말, 찬바람은 불어오고 양식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안시성은커녕 자기들이 쌓은 토산조차 탈환하지 못한 이세민은 마침내 이번 전쟁은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길은 퇴각뿐. 결국 이세민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이 급히 퇴각을 결정한 것은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도 연개소문이 당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유격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 바다에서 당의 침략군을 격퇴한 ‘여자 이순신’
이세민은 그렇게 하여 요택을 건너 퇴각했으니 그 해 음력 10월이었다. 이렇게 제1차 여당전쟁은 고구려와 연개소문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연수영(淵秀英)은 어떤 활약을 펼쳤던가? 지금까지 출토되어 밝혀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642년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천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그녀는 비단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들의 신망을 받았다.
645년에 마침내 당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나자 연수영은 그 해 6월에 당군의 해상기지인 창려로 진격하여 적선 1백여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전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 군주(軍主) 겸 모달(模達)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헤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척을 불사르고 8천여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전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척을 격침시키고 5천여명의 당나라 군사를 살상하는 전공을 세워 수군 원수(元帥)로 승진하고, 본진을 광록도 부근 대장산성도로 비정되는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상은 서길수 서경대학교 교수가 해석한 석성 소장루 현판 내용이다.
이 무렵의 중국 측 사서에 당나라 해군의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해전의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사가들이 자기들의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 수군과의 해전에서 당장(唐將) 설만철(薛萬徹)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달아났다.
당(唐) 수군의 연전연패(連戰連敗)에 대노한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丘行淹)·왕대도(王大道) 등 수군 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80여척의 전함과 5천여명의 군사를 잃고 퇴각했다.
전영미 충북대학교 교수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645년 8월 15일에 벌어진 대장산도해전(大長山島海戰)에서 당군은 1천여척의 전함에 10만의 전투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척의 전함과 5만여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은 5분의 1에 불과한 2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태종은 이렇게 소리쳤다고『구당서(舊唐書)』는 전한다.
“적보다 다섯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646년에는 봉래포대첩(峰崍浦大捷)이 있었다. 이 해전에서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은 장량과 정명진이 지휘하는 당의 수군과 4일간 싸워 3백여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2만여명의 적병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총관(靑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과 연개소문·온사문(溫沙門)·두방루(豆方婁) 등이 지휘하는 고구려 개마기사단(蓋馬騎士團)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총관이 되어 3만여명의 당군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했지만 성주인 소부손(所夫孫)이 거느린 고구려 군사들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의 함대는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척을 불애투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받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오라버니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낙마하여 머나먼 부여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녀의 수군 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 총사령관이 되자마자 전공(戰功)을 탐내 그 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마침내 앞에 나섰다. 연개소문은 연정토를 파면하여 옥에 가두고 유사(儒奢) 고두첨(高杜添)·소사자(小使者) 선도해(先道解)·상위사자(上位使者) 경도유(慶道由) 등 그의 주변에 기생하던 자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일설에는 연정토를 아예 죽여버리려고 했으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두려워한 보장태왕이 애원하다시피 사정하는 바람에 목숨은 살려주고, 그 대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상승장군 연수영을 다시 등용하여 수군원수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하게 된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內憂外患) 때문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재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 내우외환은 망국의 지름길
649년 4월에 마침내 이세민이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게 설욕하지 못한 것을 필생의 한으로 여겨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네번째 고구려 원정을 꾀하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은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655년에 정명진(程明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또 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또 658년과 그 다음해에도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 등을 보냈으나 역시 패퇴했다.
660년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 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 이듬해 9월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남생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아리수를 지키게 하니 당군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
662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사수전투(蛇水戰鬪)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의 부대까지 격퇴시켰다.
연개소문은 664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되었을 것이다.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의 자리를 세습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죽기 전에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세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벼슬을 다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되어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668년,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당을 도와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려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추모성왕이 개국한 거대왕국 고구려는 천년도 못 되어 무상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전해주는 사료가 없다. 야사와 전설에 따르면 연정토에 이어 큰오빠 연개소문과도 불화했다고 하며, 전영미 교수의 설화 연구에 따르면 656년 부렵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냈다고도 한다. 이에 앞서 그녀는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발해(渤海)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의 부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아이의 아버지는 양만춘이라고도 한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좀 더 깊은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그동안 연구된 금석문을 통해 알려진 연수영의 유적은 중국 요녕성 개주시 청석관 유적, 요녕성 대련시 대흑산성(비사성으로 비정) 유적, 요녕성 장해현 장해군도 고려성산산성 유적, 요녕성 봉황산성(오골성 또는 봉황성으로 비정), 강소성 검남도 유적, 산동성 동래시(등주성으로 비정) 유적 등이다.
▶출처:황원갑(黃源甲) 한국 풍류사학 연구회장 저술「한국사 여걸 열전」바움 (2008년 9월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