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사 아버지
"아빠가 머하는데 그러면 날 왜 나서 그래 차라리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뚜우우우~ 뚜우우우~ 전화기에서 붉게 짙눌린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 목은 크고 짠 무언가에 막혀 말을 내뱉지도 못했고 울지도 못했다.
침몰하는 수화기속을 개미처럼 방황하지만 무심한 소리에 길게 흐느끼며 의심했다. 작게 뚫린 많은 구멍을 쓰다듬자 어둠 속에 모래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공중전화 박스 안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정신을 차릴 때쯤 투명유리에 반사된 어느 아저씨가 나를 보고 있다. 긴 정장에 소매는 짧고 두꺼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스트라이트 넥타이가 인상적인 아저씨다.
딱 보니 시대는 빗겨갔고 인생의 막차에 종점을 한 정거장 남겨 놓은 모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 몇 불러 분풀이도 했을 것이다. 소주 한 병 움켜쥐고 흐르는 강물 앞에서 밤하늘을 보며 마셨을 테다. 마구 타락하고 싶어 개처럼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짓었을 테다. 그러나 '그래..' 라는 덤덤한 대답처럼 묵묵히 닿지도 않을 높은 문짝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전화 박스를 나와 집으로 일개미 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약 50세대가 사는 아파트 앞엔 독방에서나 볼 듯한 백열등 한개가 바닥도 채 밝히지 못한채 전등은 노랗게 질려 시름하고 있다. 막상 아파트까지 왔지만 기다렸다. 사춘기인 딸에게 살려달라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집이라는 이유 하나로 레일을 빗겨나가지 못하는 열차처럼 선택이란 없었다. 그럴싸한 체념이라는 단어도 거창하다.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우주처럼 진공속에 살아있는 빛만이 가득창 4평 남짓한 사각공간에 들어갔고 숨도 쉬지 않고 올라가는 이잉 소리는 심장을 짓누르며 숨을 쉬기 힘들게 했다.
땡! 하는 소리를 듣고 몇 층인지도 모른채 엘레베이터에서 정차했다. 순간 내 몸짓을 감지한 열센서가 복도를 밝히고 나는 대문 앞까지 다달아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을 감지하지 못한 복도의 불은 꺼졌고 손잡이를 답은 손에는 땀에 흥건이 젓어 쭈굴쭈굴 해진 손가락의 감촉까지 느낄 수 있게 됐다. 사방은 눈을 감았다 떠도 똑같을 말큼 어두워졌다. 이 어둠속에서 아무일도 없다며 모르는 것처럼 꾀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이 불만 댕그러니 켜져 있는 집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들 자고 있겠지?'
한발 짝 더 앞으로 다가 섯을때 대답없이 딸의 방앞에서 팔장을 끼고 고개숙인 아내가 보였다. 늦은 시간에 화장도 지우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을걸 보니 꾀 오래 서있는거 같다.
꽉 끼는 구두를 벗고 마루에 슬며시 긴장된 엄지발가락부터 틀여 놓을때 지진처럼 갑작 일어나는 파장을 느꼈는지 갑자기 아내는 나를 소란스럽게 쳐다 봤다.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집에 왔어? 너 때문이야 다 버러지 같은 네 놈때문이라고'라는 눈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삭막한 눈빛이 내 두 눈을 찌른다. 갈 수록 사고 하기는 힘들어지고 나머지 한발을 이용해 마루에 있는 발을 대충 구두 속으로 집어 놓고 조용히 옷깃을 펄럭이며 나는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