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제(日帝)의 야만적인 경신참변(庚申慘變)
1920년 10월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의 전역(戰役)에서 일본군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를 격파하고 일제(日帝)의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무력화하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일본 정부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일본군은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한 데 보복으로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三道溝) 지방을 중심으로 간도지방에 거주하는 한국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국인 촌락을 불지르고 전혀 무장을 갖추지 않은 농민들을 무참히 살육했으며 학교와 교회를 파괴하였다.
일본군이 1920년 말기까지 간도 일대에서 살해한 한국인의 수효는 공식통계로 3천 1천여명이었으나 실제로는 무려 1만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 휘하 일본군에 의해 일어난 끔찍하고 참혹한 경신참변(庚申慘變)은 군인들이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만큼 수치스럽고 경악할 일은 없기에 세계 인류의 역사상 유례없는 잔인무도한 만행이었으며, 제국주의 강대국의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 가운데 가장 야만적인 탄압이었다.
구수하(九水河)의 신흥동(新興洞)은 이주 조선인들이 피땀으로 이룩한 한국식 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신흥학교(新興學校)가 있었는데 정기선(鄭基善)이라는 지식인이 교장으로 있었다. 1920년 12월 6일의 간도는 겨울답지 않은 비교적 온화한 날씨였다. 그때 저학년의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선 정기선은 일본군 1개 기병중대 병력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이 여기저기에서 잔악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정기선은 급히 교실로 되돌아와 유소년 학생들을 뒷길로 내보내 집으로 돌려보내고 일체 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정기선 자신도 부락의 상황을 살피며 서서히 내려갔다. 군마(軍馬)에서 내린 일본군 기병들은 총검(銃劍)을 장착한 장총(長銃)을 들고 일부는 마을을 포위하고 일부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민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5~6명의 보민회(保民會) 소속 친일파 한국인들이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렸고 일본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총과 칼로 위협하여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그리고 어린이와 노인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한 뒤 신흥학교 편으로 가서 벼짚단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보잘것 없는 목조 건물인 학교는 순식간에 불덩이로 변했다.
보민회원들은 종이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젊은이들을 하나, 둘 심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군에 가담했거나 도움을 준 사실이 있는 듯한 사람들은 한쪽으로 모았다. 그들은 기고만장하여 구두발로 마구 걷어차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정기선 교장은 그들을 보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당신들도 한국인이면서 어찌 마을에 일본 군인들을 데리고 들어와 같은 민족에게 이런 행패를 부린단 말이오? 조사해서 죄가 있으면 정식 재판을 거쳐서 처벌하면 되는 것이지 어째서 반항도 하지않는 죄도 없는 불쌍한 농민들을 마구 폭행하는 것이오?”
그러자 보민회원 한 사람이 웃음을 띄우며 “흥, 네놈이 말 한마디 잘했다. 그래, 네놈을 정식 재판을 받도록 해주마.” 하고 일본군 장교와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하며 무엇인가 상의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정기선은 그 내용은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가 닥쳐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무기도 지니지 못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한국인 청년들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지 보민회원과 일본 군인들은 껄껄 웃어대더니 조금 뒤에 정기선을 끌고 나가 나뭇가지에 사지를 묶었다. 보민회원들이 준비해 온 죽창(竹槍)으로 정기선을 마구 찔러대니, 정기선은 신음소리 한 마디없이 입을 꼭 다물고 눈망울이 서기 나는 듯 일본 군인들과 보민회원들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일본군은 총구(銃口) 부분에 꽂아두었던 대검(大劒)을 뽑아들고 아직도 살아있는 정기선의 두 눈을 도려냈다. 그리고 정기선의 귀 밑부분에 칼을 대고 얼굴 가죽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몸서리치는 광경이었으며, 인간이 잔인해지면 얼마나 악마로 변할 수 있는지를 그들은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도 정기선은 채 숨을 거두지 않아 동맥이 뛰어 피가 용솟음치고 있는데 그 모습은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처럼 보여 한참 근육이 실룩거리며 일본군의 만행을 저주하는 듯 보였다. 일본군 기병들은 눈이 충혈되어 독립군을 도와준 혐의가 있는 청년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사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있던 일본군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니 목조 초가집들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화염을 피하여 나오는 사람들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로써 몇 시간만에 신흥동 마을은 잿더미와 피바다로 변하고 산천초목만 한국인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듯 서서히 불어 닥치는 바람과 함께 나뭇가지만 슬픔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보민회원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연길현(延吉縣)의 와룡동(臥龍洞)에는 기독교 계통의 신자들로 구성된 교포들이 이주하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종교의 교리로 단합되고 만주 땅의 어느 교포들보다도 건실하고 모범적으로 자치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의식이 강하여 감히 일본인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한 교포들은 마을 중앙에 아담한 교회를 건립하고 그곳에 모여 예배하고 그들의 생활터전의 핵심체로 모든 공동생활의 윤법(倫法)을 자연스럽게 지키며 와룡동 마을의 지도체계를 구축하고 한국인사회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곳에도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기병 1개 소대, 보병 1개 중대의 병력이었다. 이들의 안내를 맡은 보민회원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러 왔소. 모든 주민들을 이 교회당으로 모이도록 하시오. 단 한사람이라도 모임에 빠지면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에 따라 마을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주민이 교회당으로 모여들었다. 한국인들은 눈에서 적개심이 불타고 있었으나 후환을 두려워해서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주민들 대다수가 교회당에 모여들자 마을 주변을 지키던 일본군 병사들은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다. 병사들은 거동을 못하는 환자와 어린이를 보는 대로 총검(銃劍)으로 마구 찔러 무참히 죽이고 목을 잘라 머리를 총검에 꽂은 채 어깨에 들쳐 메고 교회당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교회당의 주민들은 아연실색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일본군 장교가 권총을 머리 위로 들어 방아쇠를 한 번 당기고 소리지른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교회 밖의 병사들은 소총을 겨눈 채 교회당을 에워싸고 있었다. 다시 일본군 장교가 입을 열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천황 폐하의 칙령을 무시하고 불온사상을 가진 자들을 집안에 숨겨두고 이곳에는 집합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 말에 교회당 담임목사가 앞으로 나서서 항변했다.
“당신들은 죄없는 부녀자와 무고한 어린이를 함부로 죽였소. 나는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만행에 항의하오. 하늘이 무서운 줄 아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들의 범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일본군 장교는 권총으로 교회당 담임목사의 이마를 쏘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주민들의 동요를 억제하면서 교회당의 문을 잠그고 교회 주변에는 짚단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교회당 담임목사를 사살한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군 병사들은 일제히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불을 질렀다.
교회 밖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조용했다. 주민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당이 다 타버려 잿더미가 되도록 단 한사람도 밖으로 뛰어 나가지 않고 모두 꿇어앉은채 조용히 순교했다.
일본군은 마을 전부를 불지르고 사라졌다. 얼마 후에 우연히 이곳을 찾은 한 미국인 선교사는 이 참혹한 광경을 사진기에 담아 세계 각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공개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만행이 세계 만방에 드러나고 세계 여론은 물 끓듯이 일본군의 잔인한 행패를 규탄했다. 와룡동 학살사건은 경신참변에서 유일하게 해외에 공개되었던 일본군의 만행이었다.
일본군은 팔도구(八道溝)에서 많은 부녀자를 겁탈하고 노인과 어린이를 죽이는 등 잔인한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대진단(大震團)·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의 단원들이 총기(銃器)와 궁시(弓矢)를 들고 팔도구를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채 패퇴하였다. 약수동(藥水洞)에서도 일본군의 한국인 몰살 작전이 전개되었는데, 일본군 보병 1개 대대 병력은 느닷없이 약수동을 포위하고 변두리 가옥부터 방화를 시작했다. 집에 불이 나자 사람들은 문을 박차고 뛰쳐 나왔다. 그러자 일본군은 민간인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난사해 마을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었다. 요행히 이웃 마을에 나들이를 갔던 몇몇 사람만이 생존하여 이튿날 아침에 참혹한 약수동 현장에 도착했다.
어떤 집은 그날 아침까지 불타고 있으며 목이 잘린 시체와 물 속에 잠긴 사람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처럼 남북만주의 도처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만행은 독립군 토벌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주저없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서울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취재기자 장덕준(張德俊)은 일본군이 만주 지역에서 한국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한다는 소문을 듣고 현지로 출발했다.
장덕준 기자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참혹한 광경을 생생한 기사로 묶어 본사에 보내 악독한 일제(日帝)의 만행을 전국에 알리는 데에 힘썼다. 장덕준 기자는 수십상의 끔찍한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품 속에 감추고 허술한 촌민의 차림으로 북만주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은신술도 결국 보민회원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훈춘 지방에서 보민회원들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영사관 경찰대에 피체된 장덕준은 “신문기자는 취재권과 선전권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보장되어 있는데 일본 경찰은 왜 나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인가?”라고 항의했으나 일본 경찰관들은 이를 무시한 채 모진 고문을 하며 첩보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깊숙이 감춰둔 필름이 발각되자 경찰관들의 고문은 더욱 심해져 장덕준 기자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장덕준 기자는 훈춘 외곽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는 장덕준 기자의 피살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총독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장덕준 기자가 독립군의 밀정으로 활동했으며 자백을 요구하는 일본 경찰관들에게 반항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니 이 문제에 대해 자꾸 거론한다면 동아일보사를 폐쇄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는 일본군의 만주 교포 학살을 중대시하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安定根)을 특파원으로 보내 현시 실황 파악과 자료 수집을 하도록 했다. 1개월간의 조사 결과 뚜렷한 숫자만을 추려보더라도 일본군의 만행에 의해 피살된 교포는 3천 106명, 독립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238명,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 부녀자는 76명,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가옥은 2천 507동으로 밝혀졌으나 실제로는 1만여명이 넘는 교포가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군이 만주의 한국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첫째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도 약소민족으로 나라와 주권을 잃은 소규모 인원의 독립군에게 패배했던 사실로 보아 전략이나 전술로 독립군을 당할 도리가 없고 만주에 침입한 일본군은 중국 측과 본국에 대하여 면목이 없어지자 양만학살로 분풀이한 것이라 사료되며, 만약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에 성공했더라면 양민학살은 없었을 것이므로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손실만큼 양민을 학살한 결과였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둘째 1910년 8월 경술병합(庚戌倂合) 당시도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파가 앞장섰듯이 일본군의 재만교포 학살에도 반드시 일본군의 앞잡이로서 보민회라는 친일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민회는 일본의 군경만큼이나 독립군이 싸워 물리쳐야 할 적이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