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던 주말에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정치+우표 박물관 '아고라'에 다녀왔습니다. 헤이리에 워낙 다양한 주제의 전시관들이 많아 어딜 갈지 항상 고민했는데 이번에는 잘 고른 것 같은 마음에 판에 소개까지 하네요.
아고라는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신명순 교수님께서 5년 전에 설립한 박물관입니다. 3층 높이의 회색 건물에 들어서면 1000여점의 정치자료와 우표 3000여장을 만날 수 있고 더불어 압화 작품도 전시 중입니다.
갔던 날 마침 '박물관장'님께서 방문객들에게 소장품 설명을 해주셔서 듣고 왔습니다.
1층은 세계 정치관입니다.
세계 40개국의 정치관련 물품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선거 포스터나 투표지, 선거운동시 사용되었던 물품과 정치인 피규어까지, 개인소장품이라고 하기엔 그 수가 상당했습니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유명 정치인의 모습을 본딴 피규어였습니다.
닉슨, 부시 부자, 존슨 등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피규어 비율이 높았고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것들도 많았습니다. 러시아 정계인사들의 마트로시카나 바비인형처럼 만들어진 힐러리 클린턴의 피규어도 재미있습니다. 세계인에게 큰 가십거리를 안겨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사건을 풍자한 '클린턴 오프너'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계인사들의 피규어도 널리 상품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희화화에 대한 우려를 하지만 오히려 친숙한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을까 싶네요. 현직에 있는 정치인들이 먼저 내는 것도 좋은 생각일 것 같습니다. 정치는 항상 귄위적이거나 엄숙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은 정치인은 물론 유권자들이 없애야 할 장애물인 것 같습니다. 정치무대는 사실 다양한 국민들이 뛰어놀 수 있는 큰 마당이 되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선거 배지도 많이 보이고 부시와 링컨의 전신 판넬도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간히 배지를 쓰는 후보자분들을 봤는데요, 배지는 물론 성냥이나 담배커버 등 여러 마케팅 수단을 사용해 선거운동을 하는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배워 선거운동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위의 사진은 각국의 투표용지입니다. 사회적 특수성에 따라서 투표 용지의 성격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일본의 경우 후보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기재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한자를 모르는 경우는 어찌 대처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이 문맹률이 높은 국가의 경우 경우 정당과 이름 옆에 사진을 첨부하기도 합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것은 일견 부정적인 현실이지만 유권자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눈에 띄네요. 투표용지에 공약이 담는 국가도 있습니다. 빽빽하게 요약된 공약을 보면 막상 투표하러 가서 고민할 수도 있겠네요.
사진에 못 담아 아쉽지만 전시된 투표용지들 중에 독일국민들이 히틀러에게 투표한 투표용지도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그 독특한 위치가 역사적 이슈가 되는 만큼 그들과 관련된 물품을 볼 때마다 눈이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김일성 훈장 증서입니다.
여러 국가의 정당, 선거포스터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스타일의 것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경우, 정당명만 내세운 민주당, 크레파스가 담긴 접시를 선보여 약간은 형이상학적인 공명당 포스터 등 가까운 나라임에도 스타일은 달랐습니다. 중간에 놓인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일본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홍보를 위해서 총리나 대표 정치인의 얼굴이 담긴 과자를 판매한다고 하네요. 순간 우리나라에서 손학규 쿠키나 박근혜 사탕이 출시될 걸 생각하니 흥미로웠습니다.
포스터 중에 눈에 띄는 건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을 패러디한 고르바쵸프의 '국가 없는 반항 (Rebel without Country)' 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공개적으로 정당이나 선거포스터에 패러디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기발한 포스터들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선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시와 케리가 맞붙은 선거 표스터도 보이네요.
유독 아들 부시 대통령이 선거과정에서 낳은 이슈들이 많아서인지 선거 배지나 피규어, 포스터가 눈에 잘 들어왔습니다.
미국과 두 대통령 후보(부시와 고어)의 운명을 가른 플로리다 주의 투표기도 한켠에 놓여 있었습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당시 사용된 투표기가 세계에 두 세대 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그 중 하나라네요. 투표 용지에 구멍을 뚫어 투표하는 방식이라 구멍이 제대로 뚫리지 않았을 때 종이조각(Chad)이 남는 데 이게 문제가 되었었죠. 가서 보시면 진짜 잘 안 떨어집니다. 근데 옆에 보니 분명 투표 후 정확히 조각을 제거하라고 명기 되어 있는데 흠..이렇게 되면 투표자 잘못인가요?
2층 한국 정치관
한국정치관에서는 한국 정치사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전시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희귀 전시품이 두 점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우리나라에 한 장만 남아있는 제 1 공화국 시기 대통령/부통령 선거 포스터입니다. 이곳에 전시된 50년대 선거 자료를 보면, 후보들의 기호가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막대 개수로 표기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문맹률이 높아서 선택한 방법이라네요. 국회의원의 경우 스무 명, 서른 명이 선거에 나왔을 때도 있다는 데 인쇄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1961년 쿠테타를 일으키기 직전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필 편지입니다. 원본 외 남아있는 두 개의 복사본 중 하나가 이곳에 있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라 주의깊게 봤습니다. 이 글을 보며 편지를 써내려갔을 박정희 소장과 이를 읽었을 장도영 참모총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역사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생각은 했을까요?
전시관 한켠에 후보들의 얼굴이 담긴 달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연말연시에 쉽게 달력을 구할 수 있지만 50, 60년대에는 달력이 귀해 선거를 앞둔 후보자들이 자신의 얼굴과 약력을 담은 열두달 달력을 유권자들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투표장에 들어가면 일년내내 본 후보를 찍는 것이 인지상정일테니 참 좋은 홍보방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 선거포스터 사이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어느 시대나 선거철에 커지는 구호는 한결 같습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익히'(당시에는 맞춤법이 정립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성명 표기를 썼다네요.) 대통령 후보와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포스터가 보입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신익희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시민이 40만명 정도라는 겁니다. 대중교통도 발달 안 되어 있고 음향시설도 거의 미비한 상황에서 40만명이 모인 건 신익희 후보의 인기와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뜻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려는 시민의 힘은 참 대단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 후보가 사망해 그 염원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이외에도 시대별 국회의원 배지, 투표함, 민주당 당사에 걸렸던 현판 등 한국 정치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물건들을 만날 볼 수 있습니다.
3층은 압화 작품과 우표를 모아놓은 전시관입니다.
압화는 꽃잎을 눌러서 그림을 '만들거나' 장식장을 꾸미는 미술방식입니다. 사모님께서 작가로 활동 중이시라네요. 실제로 보면 너무 아름다운데 제가 사진을 제대로 못 찍어 아쉽습니다. 아이들이 압화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있다고 하니 가족이 함께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방학에 아고라를 많이 찾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우표는 주로 1층에 전시되어 있고 정치관련 우표는 2층에, 3층은 만화와 정치는 물론 세계주요 인사와 영화, 문화, 열대어까지 다양한 주제의 우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군과 정치 섹션에 있는 아이젠하워의 우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스로를 '정치 위의 대통령'으로 생각할 만큼 군에서 체화한 강한 위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를 했던 이의 모습이라 그런지 우표 속 그의 사진은 다른 인사들보다 강한 인상을 줬습니다.
다른 우표들 역시 사진과 같이 우표와 설명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우표 수집에 관심있는 분들은 '순례'하셔도 좋은 듯!
정치를 생각하면 가끔 머리가 아프지만 아고라는 흥미로움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헤이리 가시면 꼭 들러서 정치의 '즐거움'으로 빠져보세요!
위치: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 2200번 좌석버스를 타고 법흥3리 정거장에서 하차.
헤이리 9번 게이트로 걸어들어가면 오른편에 위치.
개관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대표전화: 031-957-5051
홈페이지: www.agora500.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