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 참석해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운의 일을 붙잡고 있던 무영은 결국 오후의 집회를 무산시키고 김인수를 찾았다. 그저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광해에게 발탁돼 검밖에는 믿을 것이 없는 자라 여기고 있던 무영이 반정으로 몰락한 서인의 수구였던 강구문의 혈손이라는 것을 전해들은 김인수는 그날로 속창자가 꼬여들고 있었다. 그 당당한 기운에 알 수 없이 기가 질렸던 연유를 그제야 알아 그 속이 분노와 자괴감으로 쓰라렸다. 서자인 자신의 신세가 곱절의 굴욕으로 느껴져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차에 운과의 일이 호기를 만들어줘 내심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방을 들어서는 무영을 바라보는 김인수의 낯빛에 은밀한 조소가 흘렀다.
“그리 당당했던 이유가 있었소이다. 대갓집 자제셨더이까? 모진 바람을 숨어 피해 오늘의 광영을 보았으니 세상이 다 발아래 깔린 듯 하외이까?”
“다시는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말라 했습니다.”
김인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무영을 노려보았다. 고개 숙여 부탁해올 것을 생각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더 뻣뻣한 무영의 태도에 악이 바치고 있었다.
“이제 지체 높으신 나으리가 되신 양반이 아직도 신분을 숨기고 놀던 천한 계집을 잊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 계집의 비기를 나도 한번 알아보고 싶은 지경입니다 그려.”
“함부로 그 입 놀리지 마라. 네 서자의 신분을 비관해 세상을 그리 산다 여겨 잠시나마 너를 동정한 적이 있었다. 허나 너는 처음부터 그리 태어난 졸렬한 인간이다. 네가 달리 태어나 다른 곳에 섰다 한들 지금과 다르겠느냐! 너는 이미 썩어빠진 가지다. 내 가슴의 울분이 세상의 탓이라 여겼느냐? 너는 이 세상에 난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될 썩고 오염된 환부이다.”
김인수가 경직된 가슴을 애써 태연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그 앞에 알몸으로 까발려진 모멸감이 밀려들어 말을 내는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역시나 타고난 먹물이라 언변이 날카롭구만. 잘 봤소. 환부지. 그 환부가 피를 타고 온몸을 돌아 결국 몸을 썩게 하고 그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 일개 종기로도 죽어 나자빠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외다.”
“내 화살이 그 심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 있지 마라. 두 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니 더 이상 운의 곁에 그림자도 내비치지 마라.”
“난 아직 그 계집과 남은 계산이 있으니 그리는 못하겠는데 어디 그 화살촉이 내 심장 어디까지 와 박히는지 기다려 보겠소.”
그날 이후 열흘이 지나도록 무영은 초가를 찾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인근의 집회와 유생들의 회합에 참석했고 밤낮으로 정책의 실사와 생겨날 수 있는 오류들에 대한 세밀한 자료들을 집필해 광해의 개혁정책 초안의 기틀을 마련해 갔다.
그 머리와 심장 속으로 다른 바람이 세어들지 못하도록 숨 쉬는 여지만을 남겨둔 채 심신을 끝없이 몰아붙이이고 있었다.
산채를 내려온 김시로가 무영을 찾아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놀라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흘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신분을 복원한 선비의 고아함이 한껏 깃들어 그 얼굴에 서광이 빛났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너무도 까칠하고 초취해 한눈에 보아도 제대로 먹지도 않고 몸을 혹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저녁 무영은 겹겹이 자신을 누르고 있던 무게들을 풀어내며 술잔 속에 자신을 던져 넣었다. 늘 정돈되고 올곧은 무영을 알아 쉼 없이 술잔을 비우는 그이 모습에서 김시로는 말하지 못하는 힘겨움의 무게를 건네받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김시로의 말에 대답 없이 술잔을 비운 무영은 빈 술병을 흔들며 작게 웃어보였다. 실없이 부서지는 그 웃음 속에 강하게 살아내야 하는 한 사내의 시린 연민이 녹아 있었다. 김시로는 막연하게나마 그 시린 기운의 끝이 운에게 닿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빈 술병을 흔들어 술을 재촉하던 무영이 술기운이 돈 눈가에 허허로운 웃음을 만들어 자꾸 실소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게 뭔가. 그저 오랜만에 벗을 보니 마음이 편해 술잔이 너무도 가벼워 그런 것이지.”
“내가 자내를 모르는가?”
“그르게 말일세. 자네도 아는 나를, 나는 왜 모르는지! 내가 나를 이리 붙잡을 수 없는데 어찌 사람의 세상을 읽어내겠는가!”
“자네의 뜻과 가슴이 하나일 수는 없네.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아픔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네.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말게.”
눈시울이 축축한 무영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술잔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입술을 작게 열었다.
“불편하고 아파서 볼 수가 없네. 그 불편함이 싫어 차라리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많은데, 잠시라도 내 시야에 없는 그 아이를 내가 견딜 수가 없으니, 도대체 이런 나를 무엇이라 해야 하는지.”
“지금까지 잘 견뎌오지 않았는가. 자네의 신분이 복원되었다 하나 두 사람 달라진 것이 있는가. 여전히 서로를 끔찍이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 아이도 모르지 않을 것이니 자꾸 다른 무게를 실지 말게.”
그 말을 내놓는 김시로의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머물다 사라졌다. 아픈 것도 은혜함이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슴보다 나을 거라는 운의 말이 떠올라 세삼 두 사람의 무게를 알아가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인 두 사람은 축시가 지나서야 자리를 파했다. 술기운을 털어내기 위해 한참동안 차가운 밤길을 걷던 무영이 갑자기 뒤따라오는 시종아이를 불렀다.
“말을 타고 먼저 집으로 가거라.”
“도련님께서는...?”
“당숙께는 일이 있어 벗을 만나러 갔다 말씀 올리거라.”
“예.”
길을 되돌아 나온 무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초가로 향했다. 술이 돌아 심장이 뜨거워질수록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웠다. 그저 눈앞에 두고 싶은 그것밖에는 더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성이 끈을 놓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술 속에 자신을 던져 비굴함 속에 그대로 방치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원하고 있는 것에 치를 떨면서도 그 숨 막히는 그리움에 목이 타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초가에 도착해서도 한참동안 불빛이 세어나는 방을 지켜보고 섰던 무영이 그 앞으로 다가서 작게 말을 내었다.
“자느냐. 잠들었느냐?”
“.........”
방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무영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운이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었다. 무영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머물다 흩어지고 댓돌을 밟아 올라서 방안으로 들어섰다. 대답할 때를 놓쳐버려 잠이 든 척 누워있던 운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무영의 발자국 소리에 호흡이 떨려 편한 숨을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껴 그가 술을 하고 왔음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얼굴 보여주기 싫어 그러느냐?”
몸을 일으켜 무영을 바라 본 운의 눈가에 금방 메마른 서글픔이 고이기 시작했다. 무영이 오지 않은 열흘 동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하지 못하던 서운함이 그 초취하고 거칠어진 얼굴을 보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아픔으로 번지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린 운이 애써 감정을 누르며 말을 내었다.
“아직도 이곳에 올 이유가 남은 것이에요?”
무영이 조심스레 운에게로 다가가 앞이마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얇은 웃음을 흘려냈다.
“왜 이리 자꾸 야위어 가느냐. 뭘 먹기는 하는 것이냐?”
“괘념치 마세요. 훈련이 많아 그런 것이에요.”
계속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운에게 무영이 부드러운 말소리를 건넸다.
“고개 좀 들어 보아라. 내 얼굴 좀 보아다오.”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들어 달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아 달라 하고 있질 않느냐.”
“이제 있어야 할 곳이 달라진 사람들이에요. 몸을 낮추어 살았던 시절의 정리에 연연하지 마세요. 저와의 인연 또한 여기까지라 여기세요.”
“내게 화가 나 이르느냐. 열흘 동안 오지 못한 것은....”
“오래 두어 해가 될 사람들이 있어요.”
운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서운함이나 얕은 감정에서 만들어진 결단이 아니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준비해와 가슴 한편에 화석처럼 쌓인 말들이었다. 무영의 얼굴이 차츰 경직돼 부드럽던 목소리에 무게가 내려앉고 있었다.
“네 가슴에서 내어놓는 소리가 아니면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너를 괴롭히지 마라.”
“마음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가슴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낸 세상은...... 또 하나의 심장이 내 가슴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 심장이 살아있는 한 나는 놓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의 가슴으로 깊게 내려앉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집안이 구명되어 내 신분이 달라졌다 해도 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 속에 던져져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해도, 나는....... 그 하나 가슴으로 숨 쉴 것이다. 그러니 다른 말들로 서로에게 .......”
무영의 말을 중간에서 받아간 운의 눈동자에 마른 가슴에서 짜낸 한스러운 원망이 녹아내렸다.
“더 이상은 오라버니 곁에 있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인연으로 충분해요. 그러니 더 이상 제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마저도 불편하고 싫어요.”
무영은 운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다른 말을 꺼내놓았다.
“전하께서 찾으신다. 배온지가 한참인 듯 하구나. 천하를 얻으셨다 하나 아직은 전하의 세상이라 하기엔 남은 바람이 너무 거세다. 적적하실 게다.”
“저를 왜.....”
“함께 들라 하셨다.”
“밖에 당해를 가져다 놓았다. 내일 입궁할 때 입도록 해라.”
“어찌 미천한 신분으로 그것은 법도에도 맞지 않은 일일 것인데...”
“전하께서 특별히 내리신 것이다. 그런 것은 관여치 마라.”
무영이 신분을 회복해 광해의 은밀한 책사로 그 영향력을 키우는 동안 김시로 또한 산을 내려와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그 뜻을 모으고 있었다. 국운의 새 장을 열어 그 젊고 맑은 기운으로 만인을 품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광해의 개혁정책이 조금씩 그 빛을 퇴색해 가는 것에 결국 또 다른 무리들이 불만의 씨앗을 키우고 있었다. 출생의 벽에 가로막혀 뜻 한번 재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서자나 반쪽 양반의 출신적 결함을 가진 이들이 그 미천한 힘을 모아 광해의 새 길에 반석이 되고자 몸을 던졌었다. 그러나 세상위에 우뚝 선 광해는 자신의 왕권을 굳히는 또 다른 술책으로 그 어떤 끈도 쉬 잡아당기지 않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타는 갈증으로 애타를 비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에겐 잔인한 인내의 시간들이 되어 광해에게 원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에 형인 임해를 죽이는 패륜마저 자행해 민중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 중앙에 김시로가 있었다. 어린 영창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그 하나로 모든 명분을 상실한 광해에게 더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긴 또 하나의 반군들이 그 세력을 소리 없이 모으고 있었다.
늦은 새벽 김시로의 집으로 두령이 찾아 들었다. 김시로가 한껏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았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을 없으셨는지요?”
“세상이야 늘 이런저런 불편함으로 살아내는 것이지. 그것마저 없다면 내 어찌 살아있다 느끼겠느냐.”
“술상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아니다. 술은 뒷날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내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다.”
“무슨 일이라도...”
“별일은 아니다. 뭘 좀 알아 볼일이 있어 잠시 저잣거리를 다녀와야겠다.”
“밝은 날 가시지 않으시고, 이 늦은 시각에, 제가 가면 안 되는 일입니까?”
“어둠속에서 더 잘 들어나는 자들이 있으니 내 휙 다녀오마.”
김두령이 다시 집을 나와 자자거리로 향했다. 이미 시종 아이가 외눈박이의 초가 근처에 먼저 도착해 오가는 이들의 근황을 살피고 있었다. 은밀한 약재들은 세상의 눈을 피하는 자들이 늦은 새벽을 이용해 외눈박이를 찾아들고 있어 그 시각에도 오가는 이가 없지 않아 한참을 더 기다려 김두령이 초가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두령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의래 밤손님을 맞듯 외눈박이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먼저 말을 내었다.
“필요한 것을 먼저 말씀 해보슈.”
김두령이 대답 없이 자리를 잡고 앉자 약재를 정리하던 외눈박이가 그제야 김두령의 얼굴을 보려 삿갓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양미간에 굵은 주름이 선명해 어림으로도 예순은 되어 보이는 듯한 생김에 그 눈빛만은 청년의 그것처럼 힘 있게 빛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김두령의 기운에 수없는 사람들을 접해본 외눈박이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김두령이 대답 없이 소매 춤에서 뭔가를 꺼내 외눈박이 앞에 내밀었다. 외눈박이가 의아해 사내를 건너다보며 되물었다.
“이것이 뭡니까요?”
“밀봉해 두었던 것이니 아직 그 향이 남아 있을게요. 한번 맡아 보시오.”
외눈박이가 천을 들어 코끝에 같다 데고는 짧은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며 다시 내려놓았다.
“무슨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디 희미해서 잘 모르겠소만. 이것이 왜...”
김두령이 삿갓을 들어 올려 그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으로 외눈박이에게 쏘아 보냈다. 상대의 심장을 투과할 듯 한 그 섬광에 외눈박이가 놀라 퍼뜩 시선을 돌려 피했다.
“이것은 흑사향이오. 그 향이 독해 아주 짧은 순간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놓게 할 수 있소. 청에서 은밀히 거래되고 있으나 아직 그 효음이 정확치 않아 조선으로는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오. 지금 관에서는 한참 금기 약재품의 밀거래와 그 운반책들을 소탕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들었는데....”
김두령이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고 외눈박이를 응시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사람을 속여 내고 말을 둘러치는 술수에 능수능란한 외눈박이였으나 김두령의 육중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자꾸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 그것이 어쨌단 말이요? 왜 제게 그런 말을...?”
외눈박이가 말을 다 내놓기 전에 김두령이 입가에 웃음을 걸며 내놓았던 옷자락을 다시 소매 춤에 넣었다. 그리고 좀 전과는 다른 하대로 외눈박이를 차갑게 내몰았다.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느냐? 내가 이곳에 더 길게 있을수록 네게는 손해가 생긴다. 너는 들춰내면 낼수록 명이 짧아질 운명이고, 나는 굳이 다른 것을 캐내 내 명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얻고자 하는 그 한마디면 된다. 어찌하겠느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듯 너무도 당당히 죄를 묻는 김두령에게 외눈박이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그 기운에 자신이 휘말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무엇을...... 어찌 해란 말이요?”
“이것을 가져간 자가 좌포장 김인수가 맞느냐?”
외눈박이가 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김두령이 이번에는 싸늘한 웃음을 걷고 부드러운 말소리를 흘려냈다.
“내가 그것을 몰라 네게 묻는 것이 아니니 너는 비밀을 흘려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다른 염려는 마라. 허나 너의 입을 한번은 확인해야 할 일이라 이리 온 것이다. 그자가 맞느냐?”
“.....예. 허나 이놈이 발설한 것을 알게 되면 저를”
“염려 말라 하지 않느냐. 차후로는 그자가 다시 이곳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내게 다오.”
“흑사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요?”
“어차피 네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며칠 후면 관에서 저잣거리 모든 약재상과 약방을 조사할 것이다. 그저 관례상 하는 것이 아니니 어떤 것도 숨겨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미리 치우고 지금까지 해온 밤 거래는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으로....... 제게는 해가 없는 겁니까요? 좌포장 그자의 행실은 장안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저를 가만둘 리가.....”
“너와 그자의 죄는 같은 선상에 있다. 너를 들춰 자신을 더 위험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니 염려는 접어라.”
다음날 김시로와 조반을 들던 김두령이 불현듯 운을 꺼내놓았다.
“운으로 너 또한 마음 고생을 한 것을 안다.”
김두령의 말에 김시로가 놀라 마주하던 시선을 떨구고 얼굴을 붉혔다.
“그냥 함께 자란 정리로...”
“되었다. 내게까지 그리 숨길 필요 없다. 운이 며칠 전에 좌포장이라는 자와 검술 대련을 버렸다.”
“어찌해서 그런 자와...?”
“지금 그 아이의 마음이 제 것이 아닐 터이니 이유를 물어 무엇하겠느냐?
“물론 실력으로야 지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자가 수를 써 곤경에 처한 듯싶다.”
사내의 말에 놀란 김시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조급히 물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자가 사람에게 치명적인 흑향의 써 그 아이가 제 신력으로 싸우지 못해 패했다. 그것을 빌미로 그 아이를 괴롭힐 것이다.”
말을 전해들은 김시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고 달려갈 태세였다.
“그 놈이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도록 그 손목을 잘래내 줄 것입니다.”
“감정을 앞세우지 마라. 어차피 그자를 한번은 보아야 한다. 그자의 애비가 지금 조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잘 쓰면 우리에게 큰 바람막이가 될지도 모른다.”
“명분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자의 힘을 보태는 것은 차라리 치욕이 되질 않겠습니까?”
“큰 사냥을 위해서는 발자국을 죽여 몸을 낮추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명분이 있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 너에게 다짐받을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아직 운에게 연정이 남았다 해도 더는 가져가지 마라. 벗의 사람이기 이전에 운의 운명이 너희와는 연이 없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운의 처지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두령님께서 아시질 않습니까?”
“그르니 더더욱 그리해야 하는 할 일이다. 지금의 인연으로는 운이 삶이 더 힘들어질 뿐이다.”
그날 저녁 김시로는 더 참지 못하고 운의 초가를 찾았다. 종일토록 훈련소에서 땀을 흘리고 지친 몸으로 초가를 들어서던 운은 마루에 앉은 김시로를 보자 반가움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언제 산에서 내려오신 거에요?”
김시로의 눈이 운의 모습을 한 점 흘리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고 있었다. 격한 훈련으로 묶어 올린 머리가 이리저리 흘러내려 반쯤은 눈을 가리고 있었고 온통 흙먼지로 뒤범벅이 된 무사복은 얼룩으로 제색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얼굴 또한 산채에서보다 야위어 있었고 색을 잃은 입술은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하얗게 말라 있었다.
“모습이 어찌 이런 것이냐? 도대체 무슨 훈련을 얼마나 받았기에 반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런 모습으로 다니느냐?”
그제야 운은 훈련으로 흩으러 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흘러내린 머리를 부끄럽게 쓸어 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오늘 훈련이 좀 많았어요. 방에 들어가 계세요. 잠시 씻고 들어갈게요.”
“도대체....”
김시로는 남은 말을 더 꺼내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렇게라도 무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운에게는 행복일지 모른다 여겼던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었다. 무영과 함께 산을 내려가겠다는 그때 운을 끝까지 잡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도 한탄스러웠다. 자신 앞에서 운을 가지지도 버리지도 못해 힘겨운 술잔을 비우던 무영이 원망스러웠다.
술상을 들고 들어온 운에게 김시로가 낮게 말을 내었다. 그 목소리에 깊은 연민과 보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분노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꼭 이곳에 있어야 겠느냐?”
“지금이 편하고 좋아요. 제가 할일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제 자신을 편하게 해줘요.”
“편하다 했느냐?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이것이 어찌 편한 사람의 모습이냐?”
“육신이 고되다 해서 편치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만해라.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이것을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무영은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 산채로 돌아가자.”
“제가 여기 있는 것은 무영 오라버니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배운 것이 이것이기에 검을 드는 순간은 어느 때 보다 편해요. 무사가 될 거에요.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사가 될 거에요. 그러니 이제 제 염려는 마세요.”
말을 내놓는 운에게서 시린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김시로는 그 낯설고 싸늘한 느낌이 왠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