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대신들을 모두 물린 광해가 서궁에서 은밀히 무영과 운을 만났다. 무영과는 지속적으로 밀서를 나누며 보아오고 있던 그가 불현듯 운과의 동행을 명했다. 인목과의 껄끄러운 대치로 편한 잠이 이루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또한 영창의 존재가 늘 가시처럼 박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함께 할 수도 내 칠 수도 없는 혈육의 고리가 비정한 정치 속에 뒤섞여 광해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풀어내지 못할 일에 봉착할 때마다 무영과 자리를 하던 그가 내심 마음에 담아 두며 궁금해 하던 운을 꺼냈었다. 시원스레 광야를 내달리던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광해의 가슴에 묘한 떨림이 일었다. 그것은 개시를 품어 몸이 달아오르는 정욕과는 사뭇 달라 자신도 의아했다.
‘너는 그리우나 들어나지 않고,
미천하나 푸른 기운이 성스러운 하나의 숲과도 같다.
그 숲을 지키고 선 존재의 강건함 또한 나를 자극하고 울분케 한다.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 사내로서의 질투를 일게 하는 그 존재의 굵고 곧은 기운이 나로 하여금 너를 한층 더 그립게 한다.’
술상에서 뒤로 물러나 앉은 운을 바라보던 광해가 그 야윈 얼굴에 마음이 쓰여 염려를 흘려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어찌 이런 것이냐?”
광해가 무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운을 건너다보며 양미간을 모아 진심어린 염려를 담아 말을 내었다.
“혹여 무슨 근심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그저 훈련이 잦아 그런 듯 하옵니다.”
“사병들과 같이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어째서 이리 상하도록 몸을 혹사했느냐?”
“몸에 익은 일이라 차라리 그것이 편하옵니다.”
광해가 무영을 건너다보며 알고 있는 연유를 은근하게 물었다. 운을 그렇게 놓아둔 책망인 듯 했다.
“아마도 요즘 무영이 여러 일로 경황이 없어 네게 무심했던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이리 상해서야 되겠느냐.”
광해가 다시 무영에게 시선을 주며 운을 또 한 번 당부했다. 그 속에는 두 사람의 밀접함을 외면하려는 광해의 경계가 깔려있었다.
“차후로는 이리 무리하지 못하도록 네가 마음써주어라.”
“송구하옵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가문이 구명되었다고는 하나 그동안의 일들을 바로 잡으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바람에 피를 본 자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상 쉽구나.”
“아직은 전하 곁에 내놓은 제목이 못되옵니다. 이리 뵙고 뜻을 보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망극한 일이옵니다.”
“내가 목이 마르구나. 일각도 쉬지 못하고 정사를 훑어야 함도 그러하나 궁 안에 수없이 도사리고 있는 당파의 칼날들이 무겁기 그지없구나.”
광해가 술잔을 내려놓고 운을 빤히 응시했다. 당해가 어색한지 자꾸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시선이 광해를 웃게 했다.
“어색하냐. 내 보기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복장이다. 이제 자주 입어 보거라.”
운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지 못하자 광해가 시원스레 웃으며 또 한잔을 비워 내렸다. 운이 방으로 들어서든 순간부터 광해의 시선이 순간순간 그곳을 스쳐 지나고 있음을 무영이 놓치지 않고 있었다. 운을 함께 들게 한 연유도 무영의 마음에 걸리고 있어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운을 바라보는 광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질 않았고, 내어놓는 소리 또한 너무도 다정한 온기가 깃들여있었다.
“운아!”
“하문하시옵소서.”
“이제 무영의 가문이 구명되었으니 더는 무사 복을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늘 함께 했던 두 사람이니 아마도 한동안은 허전함이 클 듯싶구나. 너는 앞으로 어찌 할 생각이냐? 따로 행보를 정 한바는 있느냐?”
광해의 말에 무영은 가슴 깊은 곳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운에게 아무런 길도 열어줄 수 없는 자신을 알아 그 말이 날아드는 화살처럼 아프고 날카로웠다.
“따로 생각한 것은 없사옵니다. 지금의 일도 제게는 과분한 것이고 불편함이 없사옵니다.”
광해의 시선이 잠시 무영에게 머물다 술잔으로 옮겨졌다. 그 속에 미묘한 감정의 엇갈림들이 오가고 있었다.
‘비워 내리는 술잔 속에 신하된 자의 곧은 뜻과 사내의 붉은 가슴이 담겼구나.’
‘그 둘은 늘 같은 곳에 서 있으나 같을 수는 없사옵니다.’
‘나는 너의 그런 가슴을 아낀다. 한 치 흔들리지 않을 고목의 푸른 기운과,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인정이 늘 나를 목마르게 한다.’
‘허나 지금의 저는 마마의 신하이기 이전에 가슴이 뜨거운 한 사내일 뿐이옵니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하면 너는 내게 그 검을 빼어들겠느냐?’
광해와 무영이 서로의 속내를 가슴에 묻으며 무언의 항변을 서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 속에 신하와 사내의 두 가슴이 엇갈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영은 궁을 빠져나와 마을에 이를 때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갑작스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운의 말씨와 몸짓이 낯설어서 입속에 맴도는 말들만 붙잡고 있었다. 집 앞에 이른 운이 무영을 돌아보며 감정을 짜낸 마른 목소리를 흘려냈다.
“이제 돌아가세요. 이미 많이 늦은 시각이에요.”
“네가 이닌 듯 딱딱하고 메마르구나. 아직 내게 화가 나 있어 그러느냐.”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무사로 살 거예요. 제가 여인인 것도 잊고 싶어요. 오직 최고의 무사로 인정받고 싶어요.”
자신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그 가슴이 아파서 무영은 자꾸 목이 매어왔다.
“오늘은 여기서 청할 것이다.”
“이제 여기는 오라버니 집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시선도 생각하세요.”
“무슨 상관이냐. 몇 년을 살던 곳이다. 내게는 여전히 이곳이 집이고 이곳보다 편한 곳은 없다.”
“이제 제가 불편해요. 돌아가세요.”
무영은 참고 있던 인내를 버리고 감정을 들어냈다. 광해의 시선이 스스럼없이 운에게 멈추어 미소를 자아낼 때마다 그 가슴이 돌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 끝에 운의 차디찬 말들이 더해져 결국 술기운 속에 아픔을 토해냈다.
“네가 이르지 않아도 충분히 그 아픔을 안다.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르지 마라.”
“그러니 돌아가라 하지 않습니까. 보고 있는 것이 아픈 사람들이니...”
‘너는 고요하나 늘 큰 목소리로 내게 외쳤었다.
세상 어떤 소리보다 크고 선명하게 내 가슴을 흔드는 그 소리를 나는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내가 지쳐 모든 것에서 물러서고 싶을 때마다 너는 말없이 내 발목을 잡았고,
보이지 않는 칼로 내 이기들을 겨누고 있었다.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하나의 꽃잎이었고,
내 의지를 굳건히 세우는 버팀목이었다.
그런 네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내가 용서할 수 없어 이토록 서럽구나.’
새벽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무영은 방을 나와 초겨울의 싸한 바람 속에 몸을 세웠다. 불이 꺼진 운의 방을 바라보며 떨치지 못하는 상념에 사로잡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그리움에 가슴이 저렸다. 겨우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둔 그 얼굴이 너무도 사무치게 간절해지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얼음 같은 찬물에 얼굴을 담갔다.
당해를 입어 어색한 듯 홍조를 드리우던 그 모습이 늦은 새벽까지 무영을 목마르게 했다. 무사 복 속에 꼭꼭 싸매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여인의 몸이 알알이 탱글하게 연근 석유처럼 그 몸을 열어 붉고 윤기 나는 향기를 흘려냈다.
초겨울 새벽바람에 얼굴을 씻어내고도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무영은 운의 방문 앞에 다가서 한참동안 댓돌위의 신을 내려다보았다.
‘참도 어리석은 한 사내를 보아라.
네 깊은 고통을 세월 속에 묻어 외면하고도 뜨겁게 몸을 태우는 사욕에 너를 탐내고 있다.
이리도 이기적인 가슴이 있느냐.
아름다움은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다.
나만이 너를 알아 그 찬연한 빛과 설푸른 향기를 가지고 싶다.
난연하게 숨겨 핀 그 봉우리를 세상 속에 내어놓기 싫다.
그 누구의 시선도 네게 머무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을 물린 광해가 남은 술잔의 아쉬움을 개시와 나누었다. 크고 작은 매듭을 붙잡을 때마다 은밀하게 무영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개시는 그날 운이 함께 입궁한 것을 듣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광해의 술잔을 채우던 개시가 불현듯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저도 한잔 주시지요.”
“어쩐 일이냐. 네가 술잔을 다 들고...”
“오늘은 이 술의 힘이 필요한 듯싶사옵니다. 그 힘을 빌려 전하께 투정을 부려볼까 합옵니다.”
“네가 내게 서운한 게 있는 모양이구나.”
개시가 또 한잔을 비운 후 광해를 응시하며 마음에 품었던 그것을 꺼내놓았다.
“그 아이를 원하시옵니까?”
“네 지금 운을 두고 하는 말이냐?”
“거칠게 살아오긴 했으나 미천한 신분과는 달리 온화하고 기품이 있어 쉬 대하기 힘든 아이라 여겼사옵니다.”
“아니다. 오랜 세월 나를 지켰던 편안함이 있어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 쓰고자 하신다면 무영을 두실 일이옵니다.”
광해가 쓴 웃음을 지어며 술잔에 내려앉은 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 날개를 힘 있게 펼쳐든 한 마리가 둥지에 앉은 암컷에게 다가 앉고 있었다.
“그 아이를 두는 것이 곧 무영을 두는 것이다. 둘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불편하시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느냐.”
“마마의 심중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시옵소서. 그 속에 진정으로 품은 것이 무엇인지 거부하지 마시고 보시옵소서. 사사로이는 저의 지아비나 한나라의 어버이시옵니다. 길가의 꽃 하나 꺾어 들이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렵겠사옵니까. 미천한 신분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그 또한 꽃이라 여기면 꺾어 취하고 싶은 것이 사내의 마음이지 않겠사옵니까?”
“너는 어찌해서 투기하지 않느냐?”
“내가 다른 꽃을 꺾어 들이는 것이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에겐 더 없이 괴로운 것일 터인데 어찌해서 도리어 내게 그것을 일깨우려 하느냐?”
“저는 마마의 첫 여인이었고 또한 마지막 여인이 될 것이옵니다. 무릇 사내는 새로운 대지에 올라서 씨를 뿌려보고 싶은 것이 그 타고난 기질이옵니다. 하룻밤의 통정마저도 가로막아 큰 기운을 꺾으려 든다면 어찌 진정한 내조라 하겠사옵니까.”
“너는 참으로 여장부구나. 허나....... 그 아이는 그리 두고 보고 싶지가 않구나. 내 하룻밤 사내의 통정으로 품어보고 싶은 그런 아이가 아니다.”
개시의 가슴에 또 한 번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그 속에 여인의 위험한 향기가 함께 스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광해의 가슴에 가랑비처럼 젖어들어 다른 그리움을 일으키고 있는 운에 대한 붉은 시기심이었다.
보름 후 야행을 나온 광해가 또 다시 운을 찾았다. 옥좌의 무게를 잠시나마 벗어놓은 그 얼굴이 한결 편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그날 당해를 입었던 운의 모습을 한 점 실바람처럼 가슴에 담았던 광해가 앞에 앉은 운을 가만히 응시하다 빙긋이 웃어보였다. 여전히 밤의 그림자 속에 묻히기 쉬운 먹빛의 무사 복에 싱그러운 생기를 가두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 어찌 아직 무사복 차림이냐.”
“활을 손보느라 시각이 이리 되었는지 몰랐사옵니다.”
운에 곁에 놓인 낡고 빛이 바랜 활을 광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세자였던 그때도 그 활을 손보고 있었던 것이 떠올라 왠지 씁쓸했다.
“아직도 이것을 쓰고 있구나.”
“손에 익어 편해서 버리지를 못했사옵니다.”
“눈을 감아도 안다 했더냐.”
오래전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광해에게 놀랐는지 운이 시선을 들어 놀란 빛을 전했다.
“그런 것을...... 기억하고 계시옵니까?”
“너는 무엇이든 한번 담으면 버리지를 못하는 성품이구나.”
“그저 정이 들어 그러한 것이옵니다.”
“오늘 내 야행길에 호위무사가 되어주질 않겠느냐?”
“마마. 그 무슨 망극한 말씀이옵니까? 어찌 제가...”
“혹여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더냐. 그래서 실망했느냐?”
“아니옵니다. 무사에게 군왕의 야행길을 모시는 것은 꿈과도 같은 일이라 들었사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그러하옵니다.”
“그리 생각하느냐? 정녕 네게도 꿈같은 일이냐? 궁금하구나?”
그것을 묻는 광해의 눈이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가슴에 품어진 하나가 아니라면 어쩌면 운의 말대로 그에게 드리워진 가장 큰 나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태초의 근원처럼 굵고 장대한 뿌리가 그 몸을 지탱하며 영혼 속에 각인돼 있어 광해를 씁쓸하게 했다. 나라의 주인이 되어 만인의 어버이가 되었다 해도 결코 그 뿌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리라!
“일전에 물었던 것은 생각해 보았더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것조차 잊은 걸 보니 생각해 보지 않은 게로구나.”
광해의 말뜻을 퍼뜩 알아차리지 못한 운이 애써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야행 길을 다음으로 미루고 운에게 조촐한 술상을 받은 광해가 그 속내를 읽어 재미있는 듯 정색을 가장하며 농을 던졌다.
“네게는 내말이 그리 큰 뜻을 전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귓불까지 불어져 말을 재대로 잊지 못하는 운을 보며 광해가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소리를 문 밖으로 흘려냈다.
“되었다. 되었다. 내 농을 해본 것이니 그리 난색 하지 마라.”
“송구하옵니다.”
“궁에 들어오겠느냐?”
갑작스러운 광해의 말에 운이 놀란 눈을 들어 그 시선을 받았다.
“왜 그리 놀라느냐?”
“어찌 미천한 제가...”
“사가에서 나를 호위했다면 지금 하지 못할 연유가 무엇이겠느냐?”
“전하. 허나 엄연한 국법이 있사옵고...”
“궁이라 해도 한시도 바람 잘날 없는 곳이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위를 할 자는 그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은밀히 둘 수 있는 것 또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마도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닐 것이다. 어명을 내린 것은 아니니 수일을 두고 생각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