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 Kei
나는 지금 낯선 곳에 서 있다. 낯선 땅, 낯선 바람, 낯선 사람들.
지금까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치열하게 싸워왔다. 구속, 속박, 억압, 나를 짓눌렀던 것들.
이제 눈에 보이는 것과 싸워야 한다. 적이라고 부르게 될 사람, 딱딱한 총구.
눈앞의 총구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는 매운 화약가스에 눈이 감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고 기침이 연방 터졌다. 릭은 총구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콜록…… 제발… 이거 치워.”
“빌어먹을 자식. 끝까지 버티겠다는 거지?”
“내가…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그러니까 이거…”
“닥쳐!”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릭이 내게 이러는 건지.
녀석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대체 무엇 때문이지?
일주일 전.
“귀하는 정말 모든 신원을 버리고 본사의 용병으로 가입하길 희망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계약은 기간만료 이전에 절대 취소할 수 없습니다. 위약금은 계약금의 10배입니다.
서명하시면 24시간 내에 귀하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됩니다.
더 이상 바깥세상에서 당신 존재는 없단 얘깁니다.”
1차 단계부터 지금까지 저 말을 수십 번도 더 들은 것 같다. 계약금 열 배, 신원불명의 존재가 된다는 것.
물론 담당자마다 말투와 단어의 선택에서 약간씩 차이는 났지만 결국 다 같은 말이었다.
이 돈을 벌려면 당신 자신을 버려라.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며칠 뒤 나는 본사에서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헬기를 타고 가서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나를 섬에 떨어뜨려놓고 사라졌다.
정신없이 다시 등록 절차를 마친 나는 이곳에서 불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넘버 10745. 케이.
“당신은 지금부터 넘버 10745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지금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나?”
“네?”
“넌 이제 전투용병이란 말이다! 대답 크게 못하나?!”
“네, 넷!”
밤이 깊어 나는 배정된 숙소로 갔다. 막사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막사 안에 가득 차 있는 것만 느껴졌다. 나는 멍한 채로 어둠을 응시했다.
“이봐.”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누구?”
몸을 오른쪽으로 틀자 희미한 라이터 불빛에 비친 얼굴 하나가 있었다. 순간 나는 기겁을 했다.
“네가 10745?”
라이터를 든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난 네 앞번호. 10744. 넌 좀 늦었군.”
“…….”
“너, 뭘하다 왔지?”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이미 다 지워진 건데.”
“순진하긴. 진짜 자기 과거를 지우고 깡그리 잊고 사는 사람이 여기 얼마나 될 것 같냐?”
“……뭐…특별히 한 건 없는데.”
“군인은 아니란 말이군.”
“넌 군인이었어?”
“나? 훗, 그보다 더한 거였지. 그래, 새 이름은 뭐라고 하디?”
“케이.”
“새로 지어준 이름이 입에 잘도 붙나 보지? 난 어색해 죽겠는데.”
“넌?”
“어차피 금세 바뀔 이름 따위…… 릭이라고 해두지. 이 몸은 피곤해서 이만.”
릭은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정말 생각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내린 결정에, 절차를 다 밟고 나니
머릿속이 누가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놓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저 멀리에서 커다란 쇳덩이가 쿵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두 손으로 꾹 누르고 나는 애써 잠을 청했다.
삐비비빅-
몇 시나 되었을까? 호출신호가 귓가에서 어지럽게 울려댔다. 훈련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깨에 장착된 붉은색 버튼을 눌러 신호를 멈추게 했다.
눈을 떠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벌써 훈련장에 나간 건가?
옷은 입었지만 뭘 챙겨 나가야 할 지 몰라 어제 지급받은 걸 다 들고 달려나갔다.
마음만큼은 달리고 싶었지만 장비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숙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훈련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대열에 합류했다.
“누가 지각하나?”
선글라스를 낀 교관이 노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긴 시시껄렁한 훈련장이 아니라 특수부대 훈련장이다. 그저 평범한 군인이 되려고 온 놈들은
미리 알아서 포기하도록.”
남자는 다부진 몸에 짧은 머리, 각진 얼굴로 뼛속까지 군인인 듯 보였다.
무엇보다 흐트러짐이 없어 굳어있는 것 같은 자세가 그랬다.
자리를 잡고 부랴부랴 장비를 챙기는데 옆에서 누가 아는 체를 했다.
“꼬맹이, 지각했군?”
“넌 어제 그…?”
릭이었다. 라이터 불빛에 비쳤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아주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도 잘도 넉살 좋게 말을 건다 싶었다.
눈동자에 흐르는 이상한 기운을 그때 진작 느꼈어야 했다.
광기 비슷한 열기 같은 것. 옆으로 길게 째진 눈매에서 번쩍이는 이상한 빛.
릭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한 척 했다.
“여기 영감들 엄청 까다로워. 조심하라구.”
교관 옆으로 교관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갔다.
남자는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이제 훈련은 여기 아담 중위님께서 맡는다. 나한테 훈련 받던 놈들, 각오하는 게 좋아.
이 분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건 별로 없다. 총 쏘는 법? 지형 파악하는 법? 그런 건 전투에 한 번만 나가도
몸이 알게 되어있다. 대신 너희가 스스로 터득할 게 있다. 그건 바로, 살아남는 법이다.
죽지 않고 사는 법만 터득하면 너희는 이미 최고 용병이다.”
말을 마치고 애꾸 교관이 손짓하자 부교관들이 우리들을 몰아세우며 소리쳤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각자 자리로!”
부교관들 말에 따라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애꾸 교관은 담배를 피우며 옆으로 피했다.
기초체력 훈련만으로 첫날을 보냈다. 몸은 금세 지쳤다.
몸을 쓰는 동안 그나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원해서 지원했지만 자꾸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짓눌러대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달리고, 또 달리고, 서로 몸과 몸을 부딪치니 조금씩 머리는 텅 비어져갔다. 후련했다.
살갗을 파고들 듯 강렬한 태양빛, 종일 멈추지 않는 고함소리와 포탄소리.
훈련이 계속될수록 평화로워 보이던 무인도는 점차 지옥처럼 느껴졌다.
이름이 지워지고 신분을 잃어버릴 때도 실감나지 않던 내 자신이 지워지는 것이 이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매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 고국을 떠나던 때부터였나? 아니, 십 년 전부터? 아니다.
그보다는 더 오래된 것 같다. 그럼에도 잠들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잠들었을 때가 현실보다는 나았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 모를 상태에서 온통 어둠인 공간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기이하고 끔찍한 쇳소리 같은 것이 계속 내 귀를 괴롭혔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상황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숨이 막혀왔다. 발버둥치며 눈을 떴다.
희미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 어둠 속이라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머리를 툭툭 쳤다. 눈을 뜨자 하얀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아직도 꿈인 건가? 그때 누군가 말했다.
“정신이 드냐?”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 목소리는……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릭이었다. 릭이 매그넘500을 들고 내 앞에 있었다.
릭에게 말하려 했지만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줄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말을 하시게?”
릭이 내 입에 물린 가재를 풀어주었다. 목구멍의 간질간질하던 것이 기침으로 터져 나왔다.
“자, 이제 내가 궁금해하는 걸 말해주시지.”
릭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이 릭 혼자였다.
지난 며칠 동안 먼저 아는 척하고 친근하게 굴던 릭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대체…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턱에 강한 타격이 왔다. 턱이 후끈거리며 따끔따끔했다.
릭이 총을 쥔 채 내 턱을 가격한 것이다.
입가로 뭔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드는 게 피도 나는 것 같았다.
“시치미 떼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몸을 일으킨 릭이 갑자기 총구를 들이댔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