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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상자

골룸 |2003.08.06 11:35
조회 480 |추천 0

  20030806  

네이트닷컴 게시판지기가 드리는

그대의 상자

누구나 남모르게 간직한 자기만의 상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속깊이 모셔두고 좀처럼 꺼내놓지 않는 마음속의 상자 말입니다. 제게도 그런 상자가 있습니다. 그 상자는 평소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잊을만하면 별로 상관도 없을것 같은 작은 기척에도 딸깍 하고 열리고 마는 것입니다. 방심한 사이 열려버린 상자속을 바라보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객원지기 골룸

 

(매주 수요일은 객원지기 골룸님의 한마디로 꾸며집니다..수요일을 기대하세요~)

 

 골룸의 한마디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서면 희뿌연 안개가 작은 물알갱이들을 싸하니
몰고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걸 꽉 짜서는 탈탈 털어 햇빛에 말리고 싶은
나날들입니다. 까끌거리는 그 느낌이 절실한 요즈음,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식을 띄우게 될줄은 몰랐겠지요?
아, 물론 부치지 못할 편지지만요. 사실 이제는 그대의 주소 따위도 알지
못합니다. 무심함만은 아니란걸 아시겠지요?

 

며칠전에 그대의 상자가 딸깍 하고 열렸습니다. 글쎄 그게 이렇다할 계기가
있었던것도 아닌데... 아, 계기가 있긴 했지요. 며칠전에 <비치>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의아하실테지요. 도대체 <비치>란 영화가 당신과 무슨 연관이나 있단
말입니까. 사실 그 영화는 그대를 안본지도 상당히 오래된 어느날 혼자 봤던
영화인걸요. <비치>를 보고나서 생각했던건, 어쩌면 그대라는 파라다이스는
실존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어떤 꿈같은 기억, 그게 바로 파라다이스 아니던가요?

 

이렇게 가끔 그대의 상자가 열릴때면 나는 그대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몇 개
뒤적거리다가 상자를 닫곤 다시 생활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비밀의 상자 하나쯤은 있는 법입니다.
그대의 상자가 무슨 열면 난리법석이 날 판도라의 상자도 아닌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얘기했다시피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거구요.

 

지금은 여름입니다. 기억나나요? 그 푹푹 찌던 여름, 그대가 나를 찾아
서울로 왔었지요. 더위에 지친 우리는 석촌호수 다리께에서 서성이다
물가에서 헤엄치는 거북이를 구경했습니다. 내가 말했죠.
영화 <은밀한 유혹>에 보면 거북이란 녀석이 우디 헤럴슨과 데미 무어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다고. 우리도 거북이를 봤으니 모든게
잘될거라고 얘기했지요. 당신은 여전히 지친 표정이더군요.
당신은 그날 '땡겨'라는 아이스바를 걱정스러울만치 먹고는 결국 배탈이
나고 말았지요. 내게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향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이렇게 가끔 그대의 상자를 열곤하는 내가 걱정스러운가요?
만일 그렇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지는군요.
사실 이젠 나도 예전같지가 않아요. 나는 이젠 더이상 라디오 프로에
사연따위를 써보내지도 않고, 라이브콘서트를 찾아다니지도 않는답니다.
당신도 이젠 시스템이니 나이스크랍이니 하는 옷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보내진 않겠지요. 시간이란건 그런겁니다.

잠깐 한눈을 팔면 "그때가 언젠데..." 하며 시치미를 떼는겁니다.

 

또 언제 그대의 상자가 열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점점 그 주기가 길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걸 다행스러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의 나로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진거죠. 그래서 상자 따위에 연연할순 없답니다.
내가 당신을 까마득히 잊지 못한다고 나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거예요.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계란후라이를 싸왔을때
그걸 뺏어먹은 녀석의 이름도 기억하는데 하물며 당신이겠습니까.
그런건 마음먹는다고 되는일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더운 날씨에 아무쪼록 그대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고 그대의 상자가 열리는 날에, 그때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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