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족의 가설
두 번째는 민족의 가설이다. 너무나 확고하여 마치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은 실상 모두 어느 특정 시기에 특정 사람들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역사를 갖고 있다. 명명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명명이란 실체가 먼저 있고, 다음에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인데, 어떤 집단이나 현상의 명칭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 이름에 따라 실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계급의 개념이 그런 것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내리자마자 이때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마치 자석 주위에 쇠가루들이 모여들 듯 한데 모여 노동계급이라는 실체가 되었다. 민족(nation)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너무나 그 의미가 견고한 단어이지만 근세 이전까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혹 단일한 땅위에 사는, 비교적 단일한 언어와 풍습, 그리고 단일한 법을 가진 다수의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민족이 아니었다. 관습과 언어의 같음과 다름이 혼재하면서 희미한 국경선 너머로 서로 넘나들던 아득한 중세의 사람들이 나중에 누군가 민족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자 헤쳐 모이기의 바쁜 동작 속에서 그중 가장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 집단을 형성했다. 하나의 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것이라면 그 단어가 지칭하는 실체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만일 같은 단어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정의했다면 그중에서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살아남는 정의가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다.
민족은 처음에는 왕의 신민을 뜻했다. 집단 구성원 각자가 살아있는 육체적 실체인 왕과 법률적이며 동시에 물리적인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민들 각자와 물리적-법률적 관계를 맺고 있는 왕의 육체, 그것이 바로 민족의 몸체였다. 17세기의 법률가인 르몽테(Lemontey)는 각 개체는 왕을 향한 하나의 개인일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민족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왕의 인격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절대왕정 옹호자들의 민족 개념이다. 그러나 왕에 대항하여 귀족의 권리를 주장했던 불렝빌리에에게 있어서 민족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의 귀족 계급을 뜻했다. 그는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의 이해(利害)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 사이에 공통의 풍습, 습관,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민족의 세 번째 정의는 대혁명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농업, 공업, 상업등의 직업과 공통의 법률 및 입법기관을 갖춘 집단이라고 정의되었다. 오늘날 민족의 정의는 대체로 세 번째 것과 일치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헤게모니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민족의 부르주아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은 대혁명 당시의 정치가인 시예스이다. 그는 민족의 법률-형식적 조건에 역사-기능적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왕당파의 가설이건, 루소주의의 방향이건간에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민족 개념을 뒤집었다. 우선 하나의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부가 있을 필요도 없다.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군주가 생기기 전에, 권력의 대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민족은 존재한다. 시예스에 의하면 하나의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명시적인 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정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법-입법기관의 필수적인 짝짓기는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형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정의하는 첫 번째 단계는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존속하고, 그들의 법률이 적용되고, 그들의 입법기관이 인정받고, 그들이 역사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직업 과 직책 이다. 직업은 농업, 수공업, 공업, 상업, 자유업등이고, 직책은 군대, 사법, 교회, 행정부등이다. 요컨대 민족에 대한 법률적 정의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시예스는 농업, 상업, 공업등을 민족의 실체적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요소들은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존재에서 파생되는 후속적인 결과들인 것이다. 대지 위에, 숲 가장자리 혹은 초원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농업을 발전시키고, 상업을 개시하며, 상호간에 경제적 관계를 맺을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의 법과 국가, 혹은 정부를 스스로에게 마련해 줄 것이다. 이 모든 기능들은 결국 민족의 존재에서 생겨나는 결과의 차원이다. 다만 민족이 법률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이 기능들이 더 잘 발전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예스는 그 분석을 뒤집어 직업이나 직책, 기구들을 민족에 우선시켰다. 하나의 민족은 그것이 상업, 공업, 수공업의 역량이 있을때에만, 그리고 군대, 사법부, 교회,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있은 개인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민족으로 존재할수 있고, 또 역사 안에 진입하여 역사적으로 존속할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처럼 앞뒤를 뒤집어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시예스의 숨은 의도가 있다. 농업, 수공업, 상업, 자유업 같은 직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제3신분이다. 누가 군대, 교회,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이는가? 물론 상층의 중요한 직위는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 공동의 법은 없었다. 귀족에 적용되는 법, 제3신분에 적용되는 법, 성직자에 적용되는 법이 따로 있었을 뿐이다. 공동의 법과 입법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국민 전체는 민족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민족의 역사적 실체를 보장해주는 능력을 갖춘 개인들의 집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시예스의 중심 개념이다. 그는 제3신분이 완벽한 민족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유도된 결론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는것과, 민족의 역량은 부르주아 계급만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민족이라는 개념 하나로 부르주아지는 근세 이후의 보편계급으로 우뚝 올라섰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역사 기술이 사실은 언제나 그 기술자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 왕권과 부르주아지의 공모
언제나 권리가 문제였다. 18세기까지 프랑스를 지배해온 왕가들은 5세기에 골 지방을 정복한 게르만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 권리(王權神授說)는 이 아득한 옛날의 정복의 권리였다. 그들의 조상과 함께 정복군으로 들어온 게르만의 무사들은 귀족 계급이 되었다. 당시에는 왕과 무사들이 별로 다를것이 없었으나 우연히 왕으로 뽑혔던 사람의 후손은 왕가를 이루었고, 시골로 내려가 영주가 되었던 사람들은 귀족이 되었다. 이처럼 출생은 쌍둥이 자매였으나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 두 계층은 평온한 외관 밑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는 적대 세력이 되었다. 왕권과 귀족의 힘겨루기는 최초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들의 엎치락 뒤치락 싸움은 역사를 매개로 해서였다. 이 역사적 싸움은 17세기에 불렝빌리에가 시작했다. 귀족의 반동을 대변하는 그는 최초의 프랑스왕이 로마의 법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 함께 들어온 정복군은 모두 평등했다는 것, 따라서 현재의 왕은 지배의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당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뒤보스(Dubos)와 모로(Moreau)는 프랑크족이 불렝빌리에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게르만의 침략같은 것은 없었고, 따라서 야만의(게르만의) 귀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절대 왕정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물론 침략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민족들, 예컨대 부르군디나 고트족에 의해 일어났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들 침략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던 로마인들이 군사적으로 우수한 한 소수 민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크족이었다. 그러니까 프랑크족은 침략자 혹은 지배와 약탈 가능성이 있는 무서운 야만인이 아니라 다만 유용한 연합 세력인 소수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왕권과 귀족의 이런 줄다리기 사이에서 부르주아지는 착실히 실력을 쌓아가며 힘을 축적했다. 그리고 대혁명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기까지에는 귀족을 적대 세력으로 하는 왕과 부르주아지의 공모 내지는 연합이 큰 몫을 했다. 19세기의 망명 귀족인 몽로지에의 가설이 그것이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왕은 조공신민들에게 조공을 면제해주고, 노예를 해방하고, 도시들에게 권리를 부여하여 그들을 귀족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결국 왕은 권리에 있어서는 귀족과 동등하고, 인구에 있어서는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새로운 인민,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새 계급의 생생한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 반란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저항의 뒤에는 물론 새로운 계급의 불만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특히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몽로지에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 역사를 통털어 왕정과 민중 봉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 관계가 있다. 왕은 모든 저항들을 지원했다. 이 모든 저항은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왕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이로써 왕들은 귀족들의 양보를 받아낼수 있었다.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 권력이 왕정으로 이전된 것은 왕권의 지지로 활기와 집중력을 얻은 이 저항들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왕정은 혼자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수행될수 없는 것이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새로운 계급에 맡겼고, 이렇게 해서 이 계급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최종의 단계는 최후의 반란, 즉 이 새 계급의 수중에 떨어진 국가 전체가 왕권을 벗어나는 그런 단계일 것이다. 이제는 민중 저항에 의해 지탱되는 권력밖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왕과 손 안에 국가의 모든 도구를 장악한 민중 계급만이 서로 1대1로 얼굴을 마주본채 남아 있었다. 이 역사의 마지막 에피소드, 그것이 바로 대혁명이었다. 그러니까 몽로지에의 분석에서 대혁명은 역설적으로 왕권의 완성 단계이다. 모든 사물의 질서는 너무나 완벽한 순간 정반대의 방향으로 역전되는 성질이 있는것이다. 이런 정치적 주장 안에는 물론 귀족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국유화된 재산을 환수하며, 옛날에 인민 전체에 대해 그들이 행사했던 지배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결의가 들어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왕과 귀족이 치열한 역사적 싸움을 벌였으며, 귀족을 약화시키기 위해 왕과 민중이 연합했고, 그 산물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사실을 읽을수 있다.
나가면서
18세기 까지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역사적 존재로 자리잡기 까지에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 철학과 계몽주의의 자연법 사상이 필요했으며, 도시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가설이 필요했다. 18세기말 대혁명으로 보편성을 획득한 이들은 천년이 넘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꾸준히 상승하며 귀족과 경쟁하고 투쟁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작 2백년전, 혹은 완전히 공화체제가 된 제3 공화국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백30년전만 해도 그들은 귀족 앞에서 비굴하게 몸을 굽히던 피지배 계급이었다. 귀족의 억압이 부당하다는 인권 사상의 이데올로기로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았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보편 계급이며, 따라서 계급은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사회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만인의 평등은 겉에 내세우는 허구의 외관일뿐 실질적인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허구의 거짓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르트르 또는 푸코가 부르주아의 역사를 문제삼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당신들은 그렇게 당당히 남을 지배할 권리가 있는가? 고작 1-2백년전만 해도 당신들은 비참하고 비굴한 계급이었는데. 라고 그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앎과 건강이다. 천년 동안 다져진 혈통의 명예도 없고, 평생 무위도식하며 사치를 누릴수 있는 재산도 물려받지 못한 이들에게 건강한 육체와 명석한 두뇌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결국 이들은 앎이 총칼보다 무서운 권력쟁취의 수단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셈이다. 이 앎-권력의 가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단숨에 해체시켜 버린 새롭고도 충격적인 문제틀이었다. 20세기 후반에 푸코가 그토록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의 권리의 기원은? 한국의 인문학적 교양인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질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