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의 기원
과학사가들과 기술사가들은 "서유럽" 민족주의에 고무되어 유럽이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부정하거나 의미를 최소화했다. 탁월한 과학사 전문가임에 틀림없는 알도 미엘리가 어떻게 이야기했든 간에 중국인이 화약을 발명했다는 것은 "전설"이 아니다. 9세기부터 중국인들은 초석, 유황, 숯가루 등을 가지고 화약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화기(火器) 역시 중국인들이 11세기에 만들었지만, 다만 연대가 명확한 최초의 중국 화기는 1356년에 나타났다.
서유럽에서는 이와 독립적으로 발명이 이루어진 것일까? 사람들은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약의 발명을 위대한 로저 베이컨(1214-1293)의 업적으로 돌리곤 했다. 확실하게 대포가 등장하는 문서를 가지고 추적하자면 플랑드르에서는 1314년 혹은 1319년에 사용되었고, 메츠에서는 1324년에, 피렌체에서는 1326년에, 영국에서는 1327년에, 치비달레 델 프리올리 포위전에서는 1331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프루아샤르(주1)의 말에 의하면 영국의 “대포(Bombardiaux)"가 말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깜짝 놀라게 만든“ 크레시 전투(1346) 등도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무기가 진짜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다음 세기에 유럽 중심부에서 있었던 후스 교도의 전쟁(주2)이었다. 후스파 반란군은 1427년부터 경화기를 장착한 수레를 사용했다. 결국 대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때는 샤를 7세가(주3) 영국군과 싸운 전쟁의 막바지에 가서였는데, 칼레 전투에서 참패했던 프랑스 군이 1세기가 지난 이때에는 오히려 우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대포가 새로이 중요성을 띠게 된 데에는 1420년경 낟알 모양의 폭약을 발견한 것과 관계가 있다. 이전의 화약은 혼합물을 빽빽하게 뭉쳐서 사용했기 때문에 공기를 흡입하지 못해서 비효율적이었던 데 비해 새로운 화약은 순간적이고 확실한 폭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포가 정규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대포가 14세기부터 스페인과 북부 아프리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잇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1457년에 모로코 해안에 있는 세우타(주4)의 성벽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도시는 1415년부터 포르투갈 인들이 지배했던 중요한 지점인데 무어 인들이 이곳을 재차 공격했다. 이교도와 전쟁하고자 이곳에까지 찾아온 한 용병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는 기계를 사용해서 꽤 성공적으로 그들에게 돌멩이를 쏘았다.......무어 쪽 편에서는 화살과 새총을 가진 저격병이 있었다.......그들은 몇 개의 투석기(Catapulte)를 가지고 하루 종일 쏘았다.” 그렇지만 4년 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명 아래에서 터키 인들이 괴물처럼 큰 대포를 가지고 이 성벽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1475-1476년의 부르고스 포위전 때에도 아직 대형 투석기(trebuchet; 돌을 쏘는 무기로서 주로 성벽을 부수는 데 사용했다.)를 사용하는 정도였다.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이집트에서 1248년경에 “중국의 눈[雪]”이라는 이름으로 초석(礎石)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또 1366년부터 카이로에서, 그리고 1389년에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대포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칼레 1347년, 중국 1356년 등과 같은 이러한 연대들은 대포의 발명에서 어느 한곳이 우월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카를로 치폴라는 15세기 초에 중국 대포가 유럽 것과 동등하거나 아니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기 말에 가면 유럽의 대포가 아시아에서 만드는 그 어느 것보다도 월등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6세기에 극동에서 유럽의 대포가 위력을 발휘했을 때 경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요약하면 중국 대포는 진화할 줄을 몰랐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전쟁의 요구에 맞추어 적응하지 못했다. 1630년경에 한 여행자의 말에 의하면 중국 도시의 성 외곽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대포를 주조했지만, 그것을 다루어 본 경험도 없었고 숙련기술도 없었다.”
주1) Jean Froissart(1337-1400) :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시인, 소설가. 영국, 스코틀랜드, 아키덴, 이탈리아 등지를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1325년부터 시작되는 4권으로 된 연대기(Chroniques)를 썼다.
주2)체코의 개혁적 신부 후스(Hus : 1371-1415)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려고 하다가 체포되어 화형 당한다. 게다가 가톨릭교회는 프라하 시 전체를 파문하고 프라하 대학을 탄압했다. 그러자 종교적인 차이에다가 반(反)독일적인 체코 민족주의의 요소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프라하 시민을 중심으로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다. 교황명령으로 국왕 지그문트가 군대(십자군)을 보냈으나 시민들은 오히려 이 군대를 격파하고 한때 독일 지역 깊숙이 진격(1420-1431)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측이 화평을 제의했는데, 이를 두고 화평을 맺자는 측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측이 두 파로 분열하여 급기야는 이 양 측이 전투에 돌입했다. 화평을 주장하는 측이 이를 거부하는 과격파를 진압한 1436년에 가서야 화약이 성립되어 전쟁이 끝났다.
주3)charles VII(1403-1461) : 프랑스의 국왕. 그의 치세기는 백년전쟁 말기로서, 영국과의 전쟁에서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었으며 여기에 프랑스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국왕 자신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선왕 샤를 6세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침체되어 있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국왕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영국군에게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 종국적으로 그가 프랑스 왕위를 지키는데 결장적 공헌을 한 이가 잔다르크였다.
주4)Ceuta(아랍어로 세브타[Sebta]) : 모로코의 해안도시. 아프리카 북부를 석권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는 전초기지였으며, 반대로 기독교측이 재정복 운동(Reconquista)을 할 때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전에 먼저 이곳을 점령하여(1415)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