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게리는 구겐하임 이후에 좀 격이 다른 건축가가 된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게리를 알고 GQ, Esquire 같은 트렌디한 잡지에도 그의 얘기가 자주 나온다. 이제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프랑크 게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게리는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1947년 L.A로 이주한 뒤 계속 거기서 살고 있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부를 나오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도시설계로 석사를 마친 뒤 사무실을 내고 지금까지 돈도 참 많이 벌었을 거다. 이상한 건축물을 계속 설계해서 '앙팡 테러블'이라는 이라는 별명을 들었고 1989년에 건축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한 때 포스트 모더니즘이 잘 나갈 때는 포스트모던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다가 다소 해체주의적 성향도 보이다가 이제는 무슨 조각가가 된 것 같다. 하여간에 프랑크 게리가 현존하는 건축가 중 최고로 유명하고 잘나가고 돈 많이 버는 건축가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스크 정부와 구겐하임 재단은 빌바오의 새로운 박물관 건립을 위해 당시 유명하던 3명의 전위적 건축가(프랑크 게리, 아라타 이소자키, 쿱 힘멜브로우)에게 비딩을 시켰는데, 그들 중 게리가 선택되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선택되었다면 또 여러 사람 팔자가 달라졌을 거다. 나는 당시 개인적으로 쿱 힘멜브로우로 결정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소자키는 일본이라 무조건 안되고, 게리는 좀 정체성이 부족하고 얍삽하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았던 반면 힘멜브로우는 너무나 멋졌다.
빌바오 구겐하임이 이전 게리의 작품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아름다움을 갖게 된 데는 WDCH가 기여한 바가 크다. 1987년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이었던 릴리안은 월트 디즈니에게 헌정하는 콘서트홀의 건립을 위해 5천만 달러를 기부한다. 이듬해에 콘서트홀을 설계할 건축가로 프랑크 게리가 선정되고 1991년에야 비로소 디자인이 확정된다. 그 동안 게리는 수백번이나 계획을 변경하고 모형을 제작해가며 프랑크 게리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예산의 문제로 콘서트홀의 건립이 지지부진하던 사이 구겐하임의 비딩이 있었고 게리는 거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엇비슷한 계획을 제출했고 결국 선택되었다. .
구겐하임이 완공되자 세계는 깜짝 놀랐고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L.A는 원래 디자인을 빌바오에게 뺐긴 게 무척 약 올랐을거다. 게다가 사람들은 가난한 빌바오도 구겐하임 같은 걸 짓는데 L.A는 돈도 많으면서 돈문제로 10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하고 있다고 욕을 해대니 얼마나 열 받았을까 짐직이 된다. 그게 계기가 되었을까 어쨌든 중단되었던 공사는 1999년 재개되었고 2003년 WDCH은 드디어 감격적인 개관을 하게 되었다. .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외부의 마감자재가 라임스톤에서 스테인레스스틸 패널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비용 때문이라고도 하고 지진의 위험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이 변화 때문에 외관에 있어서 티타늄으로 마감한 빌바오 구겐하임과 매우 유사하게 되었고 그래서 WDCH을 구겐하임의 아들(son of guggenheim)이라고 부른단다. WDCH가 먼저 계획 되었고 디자인도 원조기 때문에 WDCH가 아버지고 구겐하임이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 둘은 족보가 정리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WDCH의 활짝 피어나는 장미의 형상은 릴리안이 좋아했던 백장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7년 공사를 의뢰했던 릴리안 디즈니는 공사의 재개조차 보지 못하고 아쉽게도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던 해 멀리 스페인에서는 그녀가 좋아했던 장미 모양의 건물이 개관했다. 그녀가 그 걸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릴리안은 피어나는 장미 모양을 한 엄청난 건물을 두개씩이나 세상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