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86cm의 큰 키에 80kg이 넘는 덩치로 당시 성인야구 선수들보다 커 타자들을 압도했다. 서울고 3학년 선수였던 필자는 추계리그에서 그와 경기를 가져 볼 기회가 있었다.
중학선수임에도 그의 공은 엄청나게 위력이 있었다. 하도 빨라 방망이로 때릴 생각 대신 맞추라는 코치 선생님의 지시가 따랐지만 “윙”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그의 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일부러인지 아니면 실투인지 머리 부근으로 날아오는 공을 던지는 바람에 필자는 펄썩 주저앉고서는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 결국 내야플라이와 빗맞은 땅볼 두 번으로 그쳤다.
1964년 중앙고에 진학한 이원국은 1학년 때부터 주전투수로 활약하고 2학년 때는 제 19회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대회(황금사자기)에서 우승, 팀이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패권을 잡는데 공헌했다. 결승에서 그는 부산고를 만나 단 1안타만 내주고 동료인 유격수 이광환, 3루수 정동건 등의 호타호수비에 힘입어 7-0, 완봉승을 거두었다.
당시는 스피드건이 없어 구속을 측정할 수는 없었으나 150km 내외의 패스트볼로 성인투수보다 빨랐다. 이원국과 비슷한 최고의 강속구 투수는 이후 재일동포 김호중과 선동렬, 박찬호 정도로 기억된다.
이광환 LG 2군 감독은 “내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서울 중앙고로 오니 아주 순둥이 친구가 있더군요. 생기기도 어린애같아 덩치가 너무 커 무슨 야구를 할까 했는데 던지는 것을 보니까 놀랄만큼 강속구였고 재주도 뛰어났어요. 잠깐 반짝했지만 계속했으면 아마도 대표팀 투수로 이름을 날렸을텐데 갑자기 일본으로 가 또 한번 놀랐죠”며 그를 기억했다.
3학년에 올라간 다음 해 봄 그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일본의 다이에이 영화사의 회장 겸 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인 나가노 마사이치 회장이 그를 찾은 것이다. 그 전 해 지구별초청대회 우승 때 나가노 회장이 서울에 왔다가 경기를 보고 이원국에게 반해 스카우트에 나섰다.
재학 중이었던 그 해 6월, 이원국은 일본으로 건너 갔고 졸업을 한 다음 해 봄 정식으로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4년 전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 프로에 진출한 한국 선수가 된 것이다. 오리온즈 2군에서 훈련하면서 경기에 나갔던 이원국은 새로 제정된 외국인선수 규정에 걸리고 일본선수들의 심한 견제로 1군 승격은 하지 못하고 67년 12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다시 68년 초 미국 연수 길을 택했다. 시카고 컵스 스프링 캠프와 마이너리그에 참가한 그는 68년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마이너리거 자격으로 입단하고 시범경기에도 출전했다. 5게임에 등판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메이저리그 진입은 실패했다.
샌프란시스코와 신생팀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을 전전하며 트리플 A와 더블A팀에서 3년간 던졌다. 그리고 72년 5월 멕시코로 가 사비나스 파이레츠, 포사리카팀에서 11년간 150승 85패의 대기록을 올리며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 멕시코에서는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텍사스에 거주하면서 일본계 2세 미국인 간호사 제인 리와 결혼한 이원국은 82년 조국에 프로가 출범하자 다음 해 3월 MBC 청룡의 초청으로 17년만에 귀국했다. 35살의 최고령 멤버로 청룡에 합류한 이원국은 새로 팀을 지휘하게 된 김동엽 감독과 훈련 방식의 차이로 갈등을 느꼈다.
김 감독이 모든 선수들에게 새벽 5시부터 훈련을 요구하자 그는 “야간경기가 많은 프로선수들에게 이런 훈련은 무리이고 효과가 적습니다.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 같은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며 시정을 요청했다.
이종도, 이해창, 이광은, 김재박 등 몇 몇 고참선수들을 제외하곤 혹독하게 기합을 주었던 김 감독은 이원국을 훈련과 경기에서 철저히 ‘왕따’를 시켰다. 불규칙한 일정 때문인지 이원국은 오른팔꿈치 부상까지 당해 고생하면서 빠른 공보다는 컨트롤 위주의 투구를 했다.
결국 이원국은 청룡에서 83년 한 시즌 동안 8경기에 등판해 1승1패, 방어율 4.42를 기록하고 다시 가정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그는 멕시코의 사비나스팀의 단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손재주가 좋은 장점을 살려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와 오스틴에서 건축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삼성의 오스틴 전자공장 건물 중 일부가 그의 회사에서 건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