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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의 형(神獸之形) 2

Wagi |2003.12.11 07:51
조회 213 |추천 0

 

 

기린은 길게 숨을 내뱉고
정중한 몸짓으로 검집에 담긴 옥상(玉霜)을 대에 눕혔다.

 

우웅 하는 검명으로 불만을 나타낸 옥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달래며
자신도 모르게 살풋 미소를 지었다.

엄마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아이처럼
옥상은 나날이 욕심이 커져간다.


“수련은 끝난게냐?”


인기척도 없이 들어온 할아버지의 말에 기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부족하다.
무예쪽으로는 타고난 기린이었으나
아직 신수와의 본격적인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래서야 퇴마행에 뛰어들기에는 턱없이 이르다.

 

인당(人堂)을 이끌어가야 할 막중한 사명을 지닌 기린으로서는
아직까지 현장에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만 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다들 위로하지만
그것은 기린의 뒤에 숨은 신수의 힘을 보기에 가능한 소리다.

 

그러나 기린에게는 그 신수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타인의 신뢰란 늘 어깨를 무겁게 한다.
기린에게 있어 그것은 치명적이고도 부담스러운 짐에 지나지 않았다.

 

한번도 신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는 걸 알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까.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아도 누구에게 의논할 수조차 없다.

현재 인당에는 신수의 형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가문의 누구에게 상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육도문(六道門)의 내부는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얼룩진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목줄기를 맹수에게 내맡기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기린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긴 침묵끝에 고개를 떨구는 기린의 자괴감을 눈치챈듯
할아버지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다. 너는 근 백년만에 처음 나온 ‘기린(驥?)’의 형(形)이다.
잠들어 있는 신수를 깨운 존재이니 반드시 기린은 너를 찾아올게다.”

 

“예, 할아버지.”

 

“그래, 계속 그 분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말거라.
무예도 중요하지만 소환사(召喚師)의 능력은 신수를 부리는 데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눈으로 기린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 것이 벌써 이렇게 성장했구나 싶어 새삼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엄하기만 한 할아비의 품에서 자라면서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을 거다.

 

대대로 이어온 퇴마의 길을 어려서부터 강요하고
그를 위해 어린 아이를 혹독하게도 몰아붙였다.

 

눈앞에서 부모가 죽은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재삼재사 되새기게 하였으니 지 속으로야 얼마나 괴팍한 늙은이를 원망하였을꼬.

 

꿈많을 소녀를 한 자루의 비수로 별려 놓은 것은 자신이다.
그런 집안에 태어난 것이 너의 불행이려니 생각하라고
모른 척 해 온 일이 가끔 후회가 되기도 했다.

 

품에 안고 다독이기라도 해 줄 것을 어찌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삼대가 지나도록 신수의 형이 나지 못한 김씨가문은
급격히 힘을 잃고 위축되어갔다.

은연중 여섯개 가문의 수장을 다투던 가문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서는 약체로 전락했다.

 

분한 마음을 삭이며 뒤돌아서서 한숨을 내쉬던 것이 몇번인가.

 

한 뜻으로 받들어 온 길,
그러나 쉽지 않은 기다림 끝에
아들 내외가 결혼한지 칠년만에 얻은 아이가 신수의 형으로 태어났다.

그것도 백년만에 나타난 ‘기린’의 형으로.

 

얼마나 기뻤던지 말리는 소리들을 다 내치고 이름마저 기린이라고 지었다.

 

기린은 그 동안의 한을 풀어줄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계집애라서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기린’의 힘이라면 육도문(六道門)의 수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 위안하며 그야말로 세상을 얻은 듯이 기뻤던 것도 잠시.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기린을 얻은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아들 내외가 변을 당했다.

 

그 슬픔에 치우쳐 기린을 너무 엄하게 대했다.
힘이 전부라고, 강한 것만이 미덕이라고 일러주었던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바람만 불어도 울고 웃는다던데.

그러고보니 이 녀석이 웃는 소릴 들어 본 적이 있던가. 허허, 그것 참.

 


“그만 들어가 쉬려무나.”

 

“안녕히 주무세요.”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기린의 머리를 쓸어주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저 돌아서가는 가녀린 등을 눈으로 어루만져 주었을 뿐이다.

살갑지 못한 자신의 성정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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