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윤정씨, 어디 가는데 그렇게 서둘러?"
"약속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윤정씨, 애인 만나러 가는 구나!"
금세 윤정이의 얼굴색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오른다.
"좋을 때다!"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의류 디자인을 하는 업체에 신입사원으로 취직 된 박윤정. 윤정이는 나를 모를 것이다.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같은 전공까지 하면서도. 언제나 나서지 않는 나를, 언제나 말이 없이 모서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물론 윤정이 앞에서도 말을 꺼내 본 적은 없다. 언제나 윤정이 뒤에서 윤정이의 그림자를 쫓아 다녔을 뿐. 사실 나는 윤정이에 의해 모든 것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나의 인생까지도. 지금도 내 맞은편에서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는 윤정이는 나라는 존재도 모를 것이다.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 디자인 조금 할 줄 안다고 유세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윤정이는 태엽을 감아놓은 로봇처럼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나는 윤정씨를 믿고 일을 맡겼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마침, 옆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전광현 이사가 디자인 팀에서 이는 파도를 멈추인다.
"하영씨, 그만해요. 그 정도하면 됐잖아요. 윤정씨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그 정도 말하면 알아들어요. 신입사원이 일이 서툴러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하영씨는 신입사원 때 실수 안 했어요? 다 그렇게 실수를 하면서 일이 손에 익는 거예요."
"점심 식사하러 갑시다."
"저-, 죄송한데요. 저는 선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애도 상황을 보면서 해야지. 신입사원이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윤정이를 코너로 내모는 눈치와 속삭임이 음악처럼 흘러나온다.
"자-아, 윤정씨는 선약이 있다니까 우리끼리 시원한 매운탕이나 먹으러 갑시다."
먹이 사슬과 같은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윤정이를 오빠처럼 때론 아빠처럼 챙겨주는 것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전광현 이사의 몫이 되어 버렸다. 전광현 이사는 젊은 아이디어로 차세대 유망주로 의류업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회사의 모든 여직원들이 흠모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윤정아, 여기야. 왜 이리 늦게 나왔어?"
"치현 오빠! 그런 소리마! 내가 빠져 나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기저기서 눈치를 얼마나 많이 먹었다구."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내가 미리 시켜 놨잖아. 니가 제일 좋아하는 걸루."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와-! 맛있겠다."
"넌 얼굴에 맞지 않게 뭐 이런 걸 좋아하냐?"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오빠도 보고만 있지 말고 한 번 먹어봐. 한 번 맛보면 오빠도 곱창만 찾게 될 걸."
"아무리 곱창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만날 때마다 곱창은 좀... 넌 질리지도 않아?"
"난 괜찮은데.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느껴져."
대학교 신입생 시절 알게 된 김치현 선배.
"오늘은 디자인과에 들어온 새내기들을 위해서 이 한 몸 불사르겠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한 몸이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가 뭐라구.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교내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누구도 입은 열지 않는다.
"하나에 김치를 외치고, 둘에 만세를 외치면서 일어선다. 알겠나?"
"예-!"
"하나!"
"김치!"
"둘!"
"만세!"
"야! 너는 애들 군기 잡으라니까 장난이나 하고. 뭐야?"
"장난이라니! 김치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식. 디자인을 배우기에 앞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자긍심을 갖자는데, 뭐가 잘못 되었냐?"
"하! 하! 하! 알았다. 알았어. 머리 아프니까 너 알아서 해라."
"거기 네 번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저요?"
"그래 너! 손 풀지마."
"......"
"아이-시, 자꾸 신경 쓰이네. 너! 이름이 뭐야?"
"유기철 입니다."
"너 나한테 찍혔어. 내가 졸업할 때까지 내 눈에 안 띄게 조심해라."
"......"
"우리는 하나다! 한 명이라도 낙오자는 용서치 않는다. 알겠나?"
"예-."
"소리 봐라! 알겠나?"
"예-!"
"하나!"
"김치!"
"둘!"
"만세!"
"두 번째 단합은 인간 김밥 말이다. 양쪽 옆에 있는 동기의 손을 잡고 뒤로 눕는다. 실시!"
50명 되는 신입생들이 일자로 눕는다. 군소리 없이. 모두가. 시키는 대로. 마치 로봇처럼.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김밥을 말겠다. 어머니가 해주듯이. 정성을 담아서. 실시!"
"으-."
"으-."
"으-."
신입생들의 신음소리가 온 교내에 울려 퍼져 나뭇잎을 갈아 먹으러 온 애벌레를 쪼아 먹으러 온 참새들을 쫓아낸다.
"마지막 단합이다. 그릇을 돌아가면서 자신의 소중한 흔적과 건더기를 넣는다. 단, 먹을 수 있는 것으로만 넣는다."
50명의 신입생들은 그릇을 돌리면서 자신의 차례가 오면 처음에는 망설이다가도 김치현 선배의 눈치를 보고는 침을 뱉는 학생도 있고, 가래를 뱉는 학생도 있고, 고춧가루를 쏟는 학생도 있고, 립스틱을 토막 내어서 넣는 학생도 있고, 걔 중에 짓궂은 학생은 그릇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학생도 있다. 50명의 더러움이 담긴 그릇을 김치현 선배는 술이 담겨있는 대야에 뒤집어 붓고는 손으로 휘젓는다. 그리고는 대야에 든 술을 50개로 나눠서 각 신입생 앞에 놓는다.
"여러분 앞에 놓여져 있는 술 속에는 여러분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흔적과 건더기가 들어있다. 우리는 하나다. 동기의 더러움을 나눠야 한다. 모두 앞에 놓인 그릇을 들고 마셔라. 실시!"
신입생들은 눈을 질끈 감고 그릇을 들어서 입에 갖다 댄다. 대부분 신입생들은 구역질을 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그때였다. 윤정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드니 김치현 선배의 뺨을 때린다.
"선배!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예요? 이걸 어떻게 마셔요. 예전부터 이래왔다고 우리도 이래야 하나요? 시대가 변하면 관습도 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디자인과가 이런 곳이라면 차라리 저는 그만두겠어요."
김치현 선배는 맞은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호프집 밖으로 나가는 윤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만 본다.
윤정이는 대학교에 오기 전부터 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곤 하였다.
"윤정이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나중에 대학교에 들어가면 디자인과에 들어가렴."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윤정이는 디자인과를 선택한 것이다.
"띵똥, 띵똥."
"누구세요?"
"선생님, 저예요."
"윤정이 왔니?"
선생님은 윤정이와 내가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을 맡으신 분이다. 젊은 나이로 남편을 여의시고 현재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재직 중인 중학교 부근에 살고 계신다.
"아이고 윤정아! 일요일에 애인 만나지, 왜 또 왔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요."
"한 번의 인연으로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 주어서 정말 고맙다."
"뭐가요. 당연하죠. 선생님 드리려고 제가 곱창전골 만들어 봤어요.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드셔보세요."
"어떤 남자가 윤정이를 데려갈지 참 좋겠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거기다가 음식 솜씨도 좋고..."
"다녀왔습니다."
선생님의 아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숨겨놓은 보석이라도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드르르르륵, 쾅."
"사살 좀 닫고 다녀! 그러다 유리 깨지겠다."
"예-."
"아이고, 내가 저 녀석 때문에 못 살아. 아버지가 없으면 지가 집안에 가장인데, 철도 없고, 또 어디서 맞고 왔는지 이마에 상처는... 공부라도 잘 하면 말은 안 하지. 뒤에서 일 이등을 다투고... 휴ㅡ"
"1절만 하세요."
"어우, 저 자식 봐.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싸가지 없는 놈!"
"선생님, 제가 재현이 공부 좀 봐줄까요?"
"그래주면야 고맙지. 근데 저 녀석 되게 말 안 듣는데, 괜찮겠어?"
"걱정 부뜨러 매세요.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잖아요."
윤정이는 일주일에 세 번씩 선생님의 아들 재현이의 과외를 맡기로 한다.
"윤정아, 너 들었니?"
"뭘?"
"신입생 환영회 때 나대던 김치현 선배가 게이래."
"......"
"학교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너 알고 있었어?"
"...아니..."
"그랬었구나. 그래서 김치현 선배 주변에 남자 애들이 없었던 거구나."
"...아닐...거야... 그냥 소문이겠지..."
미주에게 들은 말에 윤정이는 혼란 속에 빠진다. 김치현 선배의 행동이 마음에 거부 반응이 들긴 하지만... 동정심일까. 윤정이는 김치현 선배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낀다.
"선생님, 요즘 제가 대학교에 잘못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생각이 들어? 너 디자인과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디자인과 선배들이 디자인이 아닌 다른 것을 제게 요구해서 부담스러워요. 꼭 디자인과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학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윤정아, 너 두리안이라는 열대과일 아니? 내가 예전에 베트남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어. 그 곳에 도착하니까 그 곳 사람들이 두리안이라는 과일을 내주면서 귀한 거라고 먹으라고 하는 거야. 두리안은 '천국의 맛, 지옥의 냄새' 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조금만 먹고 말았는데, 계속 먹다보니 특유의 맛을 알겠더라.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람마다 특유의 맛과 장점이 있는데, 나쁜 점만 보고 그를 멀리 한다면 좋은 사람을 잃게 되는 거야. 반대로 사람마다의 맛을 인정하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되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돼. 윤정이가 지금 디자인과 선배들이 싫은 것도 윤정이가 선배들의 특유의 맛을 몰라서 그런 것 같애. 윤정아, 조금만 마음 문을 열어서 그들의 나쁜 점만 보지 말고 그들의 장점, 독특한 맛을 찾아봐."
"다녀왔습니다."
"재현아, 오늘부터 네 공부를 도와줄 선생님이셔."
재현이는 잠시 멈칫하고 윤정이 얼굴을 쳐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선생님, 들어가 볼게요."
"어-. 들어 가봐."
"드르르르륵."
윤정이가 방으로 들어서고 재현이와 눈이 마주친다.
"드르르르륵."
"안녕. 오늘부터 재현이 공부를 도와줄 거야. 호칭은 박윤정 선생님이라고 불러. 아니, 그냥 누나라고 불러.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데. 선생님이라고 하면 되게 거리감이 느껴지잖아."
"......"
"뭐부터 공부해 볼까? 근데, 재현이는 말 수가 적네. 원래부터 말하는 거 싫어하니?"
"......"
갑자기 재현이는 윤정이를 밀쳐 눕히고, 치마 속에 시커먼 손을 넣는다.
"재현아! 뭐하는 거야?"
"......"
"이러지마! 재현아!"
"......"
윤정이는 맞은편 방에 계신 선생님에게 들릴까봐.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소리를 머금는다.
"음! 음!"
재현이 과외가 마치는 시간,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 시간, 윤정이는 그 쓸쓸한 시간을 오늘도 하염없이 걷는다.
"치현아, 속은 괜찮아?"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직도 골이 울리네."
"안녕하세요."
"어-, 어-. 그래."
"기억 안 나?"
"뭐가?"
정수경 선배가 귓속말로 김치현 선배의 의문에 대꾸해 준다.
"신입생 환영회 때 저 여학생이 니 뺨 때린 거. 기억 안 나?"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김치현 선배가 말을 받아 친다.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김치현 선배는 첫날 수업을 마치고, 빈 강의실로 윤정이를 불러낸다. 윤정이는 빈 강의실이라는 점이 별로 내키지 않지만, 선생님 말씀을 따라서 김치현 선배에게 사과하려고 빈 강의실 문 앞까지 다다랐다. 그리고는 모를 묵직함을 토해내고, 강의실 문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윤정이 앞에는 아무도 없다. 먼지만 소복이 쌓인 책상과 걸상, 거미줄이 쳐진 천장 벽. 그거 뿐. 김치현 선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딱."
윤정이 뒤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윤정이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윤정이를 꽉 껴안는다. 얼음 같은 그의 손이 윤정이의 유방을 발효시키듯이 부풀리고, 윤정이의 마음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피스톤을 가동시킨다. 두 사람의 허무한 신음소리가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빈 강의실에서 여전히 동면을 하고 있는 먼지를 깨운다.
"박윤정씨, 오늘 나랑 공장에 갑시다. 보조로 한 명 데려가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죠?"
"예-."
전광현 이사와 윤정이는 공장에 가져갈 서류를 챙기고, 사무실을 빠져 나간다.
"그 소문 들었어?"
"뭐?"
"박윤정 쟤랑 전광현 이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정말? 박윤정씨 능력 있네. 부럽다."
"뭐가 부러워? 넌 가정 있는 유부남하고 그 짓거리 하고 싶냐?"
"뭐 어때? 요즘 시대에 결혼한 게 무슨 흠이야. 전광현 이사 정도면 나도 하겠다. 얼굴 잘 생기고, 돈 많고, 비젼 있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저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만 귀속 된다면 평등 사회에 맞지 않는 거지."
"나, 참!"
"윤정씨, 괜찮죠?"
"뭐가요?"
"소문은 그냥 소문이니까 별 신경 쓰지 말아요."
"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고마워요. 윤정씨."
전광현 이사와 윤정이는 공장 책임자와 면담을 나누고, 회사로 돌아가기 전에 공장을 둘러본다.
"윤정씨, 심심하지 않아요?"
"...아니요..."
"뭐가 아니야? 얼굴에 심심하다고 써 있구만."
"...말 놓으세요."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는 않지만... 괜찮겠어요?"
"나이는 얼마 차이는 안 나도 저보다 사회에 발을 먼저 딛었고, 또 이사님은 저의 직장 상사잖아요."
윤정이는 전광현 이사에게서 친근한 향기를 느낀다. 무섭고 짜증나는 직장 상사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윤정이의 마음은 전광현 이사의 그림자를 조금씩 닮아간다.
"이사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어! 길을 잘못 들었나?"
"......"
"어-, 어-! 바퀴가 빠졌는가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비가 쏟아지고, 어둠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전광현 이사와 윤정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창을 두드리는 어둠의 눈물인 듯 한숨으로 김이 서려 희미해지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다.
"어디 가려고요?"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내가 뒤에서 밀테니까 엑셀 좀 밟아줘."
"같이 나가요."
"비 오는데 뭘 같이 나가?"
"혼자 있기 무서워서 그래요."
"......"
"......"
"나오지마!"
"......"
"나오지 말라니까!"
"......"
하얗게 얼어있던 가지가 숨겨놓은 푸른 싹을 드러내 듯 윤정이의 하얀 반팔 티셔츠가 가려있던 투명하고도 뽀오얀 속살이 드러난다. 전광현 이사의 아랫도리가 이사라는 체통도 잊어먹고 솟아오르기만 한다. 전광현 이사는 붉게 달아오르는 아랫도리를 가리려고 몸을 이리저리로 틀어도 보고 애국가를 속으로 불러도 보지만, 한 번 솟아오른 아랫도리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전광현 이사는 차 안으로 몸을 숨긴다. 풍성한 윤정이의 몸과 하나가 된, 흐릿하게 속살이 드러나는, 그래서 더욱 전광현 이사의 시선을 빼앗는,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게 하는, 윤정이의 실루엣을 전광현 이사는 과감히 차단한다.
"이사님, 차 안으로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
윤정이가 전광현 이사의 옆자리에 앉고는 차 문을 닫는다. 전광현 이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듯 윤정이 몸과 하나가 된 엷은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가 드러나면 전광현 이사는 갓 태어난 아기가 된다. 젖 빠는 법을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엄마 자궁에서 나오자마자 아기가 엄마 젖을 빨 듯 전광현 이사는 윤정이의 유방을 핥는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윤정이의 몸 전체를,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전광현 이사의 허리가 가빠지면 윤정이의 신음소리도 가빠진다.
쾌락의 어둠이 지나고 비 개인 햇살은 더욱 청명 따스하다. 차 안에 침입한 눈부심에 윤정이의 나체가 발각된 게 오래인 듯 윤정이의 살갗에 봉숭아물이 든다. 윤정이는 눈을 감은 채 옆자리를 더듬어 본다. 그런데 없다. 간밤에 윤정이와 쾌락을 울부짖던 짐승은 없다. 윤정이는 살갗에 든 봉숭아물을 가리는 것도 잊고 차 문을 젖힌다. 어둠이 머물 때는 몰랐는데, 어둠이 저문 여기는 나무가 많고 푸름이 무성한 삼림 숲이다. 윤정이는 나체에 하이힐을 신고 이리저리로 전광현 이사를 찾아 부른다.
"이사님ㅡ! 이사님ㅡ! ..."
30분 쯤 찾았을까. 윤정이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전광현 이사가 나뭇가지 위에 목이 매달려 죽어있다. 전광현 이사의 아랫도리는 짤려서 땅에 떨어져 있고, 그 짤린 흔적에서 아직도 피가 흐른다.
윤정이가 정신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병원이다. 김치현 오빠가 윤정이 머리 맡에 서 있고, 그 옆에 남자 두 명이 서 있다.
"유기철! 당신을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유기철! 고개 들어봐! 5년 전에 네가 죽인 김재현 기억나?"
"!... 내가 안 죽였어요. 5년 전에 과외를 해줬긴 했지만..."
"너의 대해서 조사하다 보니까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더구만. 지금은 완벽한 여자의 몸을 하고 있지만, 5년 전, 그 일이 있기 전만 하더라도 넌 남자였어. 박윤정이라는 가명을 써서 여자 흉내를 냈었지. 그 전부터 여성 호르몬을 맞고는 있었지만, 수술은 안 했더군. 김재현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유기철 너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더군. 그 당시 김재현 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상태 였지만, 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너 역시 담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 비밀리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거야. 김재현이 죽은 날 아무리 기척을 못 느낀다고 해도 아들이 죽는데, 기척을 못 느낄 수는 없지. 담임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한 거야.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
"혐의가 그 것 뿐이었다면 못 잡을 뻔 했는데, 도대체 전광현은 왜 죽였어?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거 몰라? 김재현을 죽였던 수법 그대로 전광현을 죽였더구만. 잔인하게. 그래도 고맙게 전광현은 토막 내지 않았더군. 김재현처럼."
"김형사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유기철은 재작년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현재 수원 교도소에 수감 중이랍니다."
김재현 형사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김재현 형사는 이걸로 원한을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같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를 두고 유기철과 바람을 핀 어머니. 교내에 소문이 퍼지자 아버지를 토막 내어 죽인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5년 전 과외 선생으로 온 윤정이를 미리 준비해 둔 밧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손과 발을 묶은 뒤, 재현이는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넣어 윤정이의 볼록한 아랫도리에 칼을 갖다 댄다.
"재현아! 왜 이러는 거야?"
"아가씨가 불알을 달고 다녀서야 되겠어요? 제가 수술해 드릴게요."
"제발! 이러지마!"
"되게 시끄럽네. 엄마가 듣잖아요."
"......"
"그럼, 아프지 않게 마취부터 시켜드릴게요."
재현이는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랍에서 마취제를 꺼내 윤정이 몸에 투여한다. 그러고는 볼록한 아랫도리를 오목하게 도려낸다. 재현이의 수술의 결과로 윤정이의 오목한 아랫도리에서 용암처럼 피가 흘러 방 안을 빨갛게 적신다.
다음으로 재현이는 어머니의 방 안으로 들어선다. 윤정이의 피가 묻은 수술 칼을 여전히 한 손에 들고.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어머니 방 옆에 붙어있는 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솨ㅡ"
재현이는 조심스럽게 욕실 문 손잡이를 돌린다.
"윤정이니? 나 샤워 다 해 가거든, 조금만 기다려."
재현이는 욕조에 쳐진 커튼을 걷어 젖힌다.
"재현아! 왜 니가..."
"엄마, 놀랬어? 엄마가 그렇게 원하던 윤정이가 아니라서. 과외 선생님은 내가 잘 모셔 놨으니까 걱정마, 엄마. 그나저나 엄마, 가슴이 두부 같애."
"......"
"윤정이 보다는 못하지만, 내가 엄마랑 놀아줄게."
재현이는 어머니를 밀치고, 어머니는 바닥에 묻어있는 수분에 미끌려 욕조에 머리가 부딪쳐 죽는다.
"엄마, 이렇게 쉽게 죽으면 재미없잖아."
재현이는 은밀한 피가 묻어있는 칼로 어머니의 사지를 토막 낸다.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에 어머니의 잔혹한 피가 물과 같이 하수구로 씻겨 내려간다.
"어서 오십쇼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김형사님!"
"요즘 골치 아픈 사건이 있어서... 나 없는 동안 업소 물갈이 좀 했냐?"
"모든 게 김형사님 덕분에 제가 삽니다. 김형사님, 오늘 특급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이때까지는 특급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 말이 아니라..."
"하! 하! 하! 넌 이래서 재미있단 말이야. 하! 하!"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의 일곱 가지 불빛만이 어둠을 즐기는 짐승들을 흥분시킨다. 이리저리로 애무하는 수컷과 그런 수컷을 유혹하는 암컷. 여기서 세상의 시름 따위는 만나려 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다.
김재현 형사는 룸 하나를 잡고, 그녀를 기다린다.
"야! 테이블 다시 차려! 특급이라고 하드니, 누굴 호구로 아냐?"
그때 그녀가 룸 안으로 들어온다. 오늘따라 별이 하나도 없는 밤하늘을 닮은 그녀가 김형사를 꼴리게 한다.
"오랜만이야. 박윤정. 아니 김치현!"
"......"
김형사가 왼 손으로 쇼파를 툭툭 두들기며 말한다.
"여기 앉아봐."
"......"
"수술이 얼마나 잘 됐는지 한 번 볼까?"
김형사가 윤정이의 짧은 치마 속에 손을 넣고 더듬는다. 윤정이는 싫은 듯 몸을 틀어 술잔을 비운다.
"김치현! 니가 이러면 안 되지. 누가 너를 박윤정으로 만들어 줬는데. 벌써 까먹은 거야. 네가 죽인 전광현. 누가 가려 줬는데, 니가 이러면 안 되지."
김형사는 윤정이를 밀쳐 눕히고 공장을 가동시킨다.
"음! 음!"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실태를 엿보았습니다. 가상의 상황이었지만, 충분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성형수술 1위, 제왕절개 1위, 여성흡연자 1위, 낙태율 1위, 포르노 사이트 접속률 1위, 청소년 흡연율 1위, 교통사고율 1위, 이혼율 1위, 성폭력 발생 빈도 1위, 자살률 1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는 일들이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현주소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위험수위를 넘은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이제는 그 얼켜설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틀 전, 부녀회 참석으로 제시간에 보지 못한 시사보도, 녹화해 놓은 은밀한 본성을 미주는 무슨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어둠의 시간이 지난 듯 미주는 커튼을 젖혀 방 안 곳곳에 숨어있는 우울한 찌꺼기를 제거하고, 작년 이맘때에 맞선으로 만나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남자의 거친 체취가 묻어있는 이불 속에 오늘도 몸을 누인다.
질퍽한 안개가 물러갔는데도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톡 쏘는 탄산음료와 같은 땡볕 위를 걷는다. 한 손에는 성경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땀으로 흔건하게 젖은 손수건을 들고.
"띵똥, 띵똥."
집 주인이 걸어 놓은 문을 열고, 그 틈 사이로 나를 맞이해 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길 건너에 있는 교회에서 나왔는데요..."
"꽝!"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 주인이 문을 가볍게 닫는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내 마음도 세상 사람들의 폐쇄적인 반응에 무덤덤해 졌나 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본다. 시계 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불현듯 나의 기억을 관통하는 약속이 떠오른다. 아참! 오늘 윤정이 면회 가기로 했는데. 나는 급히 택시를 타고, 수원 교도소로 날아간다.
"2269번 면회!"
교도원이 소리를 치면 녹슨 철창문이 열리고, 윤정이가 걸어 나온다. 내가 뜸한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윤정이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 교도소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윤정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죄인들은 자주는 아니지만 바깥에 나올 기회가 많다고 들었는데. 바빠도 꼭 일주일에 한 번은 면회를 오겠다는 약속을 괜히 했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면회 온 게 두 달이 훌쩍 넘었다. 너무 자주 안 와서 윤정이가 화가 난 것일까. 오늘따라 윤정이가 얌전한 이유는 뭘까. 다른 날 같았으면 왜 왔냐고, 내가 이 꼴을 하고 있으니까 속이 시원하냐고,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악담을 퍼부었을 건데. 전에 교도원의 손을 빌려 전해 주라고 한 성경은 받았을까. 윤정이가 고개를 숙인 채 내 맞은편에 앉는다. 플라스틱 유리판을 사이에 두고.
"윤정아, 요즘 몸은 어때?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해."
"......"
"......"
"...미주야...고마워..."
윤정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고, 윤정이의 두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흐른다. 예전 같았으면 원망과 저주만이 나왔을 입에서. 윤정이는 분명 하나님을 만나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윤정이에게 은밀한 감정을 느꼈던 나를 구원해준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윤정이를 이끄시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울지마, 윤정아... 세상 사람 모두가 너를 유기철이라고 불러도 나에게 넌 영원한 박윤정이니까... 울지마, 윤정아."
"오늘은 새로 전학 온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짝, 짝, 짝, 짝."
"난 유기철이라고 해. 서울에서 지내다가 아버지 직장 땜에 마산으로 전학 왔어."
서울에서 전학 온 유기철. 아버지가 군인이라서 그런 걸까. 자주 거처가 바꿔서 그런 걸까. 아무튼 유기철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서울 애들은 다 저래?"
"되게 싸가지 없다."
여기저기서 기철이를 비판하는 소음들이 이른 파리 떼처럼 내 귀가에서 윙윙 거린다.
"여기서 얼마나 지낼지는 모르지만, 있는 동안 잘 지내보도록 하자."
"짝, 짝, 짝, 짝."
"기철이는 여기 생활이 익숙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도록 하고, 기철이는 현수 옆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기철이가 나의 짝꿍이 된 일로 나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지, 그때는 몰랐었다. 남중(男中) 시절부터 시작된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