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군은 어떤 방법으로 전투를 벌였을까?
옛날 전쟁에서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형이다. 기원전 6세기에 로마군은 게르만 종족과의 전쟁에서 밀집대형을 펼쳐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전투시 상대방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를 연출하면 승기(勝氣)를 잡는 것이었다. 상대방 군대가 자군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진지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면 대개는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이것은 총포와 창검을 병용한 19세기 미국남북전쟁(美國南北戰爭) 같은 근대의 전쟁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 시기의 군인들은 총탄이 날아오고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서도 꼿꼿하게 서서 사각형 대열을 이룬 채 전진했다. 몸을 낮게 숙이고 넓게 산개해서 전진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전투에서 백병전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사용되던 총기(銃器)는 사거리도 짧고 총탄과 화약을 따로따로 장전하는 방식이라 사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므로 밀집대형으로 전진해도 집중사격이 날아오는 순간은 한 번 내지 두 번이다. 진짜 승부는 백병전으로 판가름 난다. 그런데 어떤 군대든 촉장(蜀將) 관우(關羽)처럼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공격군이든 수비군이든 먼저 대형이 깨지는 편이 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뻣뻣이 서서 걸어가는 공격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대포와 기관총이 맹위를 떨친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때였다.
적군의 대형을 허무는 중요한 임무는 먼저 기병대가 맡게 된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대를 내보내 밀집대형의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가는 이 전술은 서양에서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제왕인 알렉산드로스 1세[Alexandros Philhellene]가 개발했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계승하여 로마의 군인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강력하고 정교한 기병전술이 사용되었다. 중장기병은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匈奴族)과 선비족(鮮卑族)도 중장기병대를 운영했으며 중국에서도 당대(唐代)까지는 군대에서 중장기병을 양성했고, 거란족(契丹族)의 요(遼)·여진족(女眞族)의 금(金)과 청(淸)·몽고족(蒙古族)의 원(元)도 모두 중장기병을 중시했다.
중장기병대는 밀집대형을 이루어 천천히 진격하여 적진의 모서리나 측면을 공략한다. 중장기병들이 적진에 충돌할 때에는 방진 또는 쐐기골 대형으로 창을 내밀고 부딪힌다. 고구려의 중장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나 로마의 기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지녔는데 그 비결은 말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鐙子)였다. 서양에서는 8세기부터 보편화된 등자를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초로 중장기병의 장비에 등자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던 나라 역시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4미터가 넘는 장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도 모두 합하여 적진에 부딪혔다. 고구려군은 중국인 군대보다 더 길고 무거운 5·4미터에 9킬로그램까지도 나가는 장창을 내지르며 덤벼든다(다만 모든 창이 이렇게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투에서 잽과 페인팅 모션처럼 적군의 눈을 혼란시키는 화려한 창놀림과 함께 말이다. 물론 동양의 기병들도 서양의 기병들처럼 투창술(投槍術)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군을 비롯한 동양의 기병들은 사실 등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투창술의 위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투창 공격은 원거리에서 적군을 제압하는 장점이 있다. 보병의 밀집대형과 충돌할 때도 여러 명의 기병이 빠르게 선회하면서 집중사격을 하고 빈틈을 노려 돌격조가 치고 들어가는 전술도 활용됐을 것이다. 장갑을 높이면 군마의 속도는 떨어지고, 속도를 높이려면 장갑을 가볍게 해야 하기에 장갑과 속도는 상극이다. 당나라의 기병대는 장갑보다는 속도를 선택했고 금나라의 군사들은 반대로 속도를 아예 포기하고 말에 두세벌의 갑옷을 껴입혀 그야말로 화살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탱크를 만들었다.
두세벌까지 껴입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중장기병도 상당한 장갑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아무리 중장갑을 했어도 말은 속도가 있으므로 적군의 기병이 5미터나 되는 긴 창을 내지르며 50미터 이내로 들어오면 사격할 수 있는 기회는 한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중장기병대의 장갑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지는 약점이 있으므로 보병들은 진지 앞에 녹각이나 마름쇠 같은 장애물이나 함정을 설치, 적군의 기병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사격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수비군의 대응전술이 만만치 않다고 여겨지면 공격군도 중장기병대가 보병과 충돌하기 이전에 가능한 수비대형을 동요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경기병대를 함께 출동시킨다. 기마민족의 상징처럼 된 환상의 기마술과 사격솜씨를 자랑하는 부대는 중장기병대가 아니라 이 경기병대다.
말 달리며 활쏘는 기술을 기사(騎射)라고 한다.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에는 말을 타고 활로 사냥하는 벽화가 있고,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에는 표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말을 탄 용사는 앞으로 사격을 하기도 하지만, 몸을 뒤로 돌리고 쏘기도 한다. 이 뒤로 돌려 활을 쏘는 방법을 서구 사람들은 파르티아 사법(射法)이라고 불렀다.
이 파르티아 사법 역시 등자 때문에 가능했다. 등자를 몰랐던 서구의 기사들은 말 달리며 활을 쏘는 동양 기병대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몸을 뒤로 돌려 쏜다는 것은 더욱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몽골군과 싸워 본 유럽의 기사들은 몽골군이 달아날 때 절대로 함부로 쫓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달아나다가 몸을 돌려 날리는 그들의 화살에 엄청나게 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도 왜구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여러 번 이 수법으로 적장을 사살했다. 이동목표를 쏠 때도 그렇고 자신이 이동하면서 쏠 때도 마찬가지지만, 표적이 계속 움직이므로 겨냥을 하거나 사격을 할 때면 조준점을 이동시킬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앞으로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게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좌우간 이 기술 덕분에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고구려인을 포함해서 한예족(韓濊族)은 아주 오래 전부터 활 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예족의 장기(長技)였던 신기(神技)의 궁술(弓術)은 맥궁(貊弓)이라는 활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물소의 뿔로 만들어졌다는 맥궁의 전통은 조선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 당기기가 무척 힘든 이 활은 크기가 작아도 화살을 날리는 힘이 보통 강력한 게 아니다. 조선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활시위를 당겨 보면서 누구 활이 더 센가를 가지고 힘자랑을 하는 풍습이 있었고, 명중률이 좋아도 활 힘이 약하면 일류 궁사로 쳐주지 않았다.
신기의 활 쏘는 솜씨와 기마술, 강력한 활로 무장한 경기병대는 적진의 주변을 돌며 화살을 날린다. 밀집대형의 약점은 언제나 측면과 후면이므로 경기병대도 이 곳을 주로 노렸을 것이다. 피로해진 적군의 대형이 빈틈이 생기면 중장기병대가 돌격한다. 경기병대가 비록 갑옷을 입지 않고 활 하나 이외에는 아무런 무기를 지니지 않아서 백병전 능력은 제로라고 해도 기동력은 우수하기 때문에 중장기병대는 경기병대를 쉽게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중장기병대는 반드시 경기병대의 엄호를 받아야만 적군의 대형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의 군대 하면 흔히 기병을 연상하지만, 사실 기병들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전투의 일부분만을 담당할 뿐이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서나 보병이 없는 군대는 없으며 보병의 불행은 흔하고 신분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병은 기병의 보조부대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기병의 전투력이 보병과 비교해 절대우위라는 생각은 상당한 오류이며 기병은 절대 단독으로 전투를 할 수가 없다.
중장갑을 하고 훈련이 잘 된 보병대열은 제 아무리 중장기병대라 하더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숙적 폼페이우스를 패퇴시킨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고참병만으로 구성한 2천여명의 중장보병으로 7천 기병대의 돌격을 가로막게 했다. 고구려군도 무모하게 기병부대만으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병·보병 혼합전술을 구사했을 것이며, 중장기병대가 단독작전을 구사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경기병을 내보내 사격전을 하고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대끼리 접전을 펼치면서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다가 중장기병대에게 돌격을 감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적진을 돌파한 기병은 적진의 중심부로 진격할 수도 있고, 측면과 후면에서 수비군을 압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보병이 그 틈에 진격하여 적군을 완전히 허물어뜨려야 한다. 기병돌격은 일종의 쐐기다. 쐐기를 꽂았다고 벽이 허물어지지는 않는다. 금이 간 벽을 때려 벽을 허무는 최후의 일격은 보병이 담당한다.
기병이 적진을 돌파하고 중장보병이 적군을 밀어붙여 대형이 허물어지면 적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날 것이다. 전투는 이기는 것 못지않게 적군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해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히 이기려면 추격해서 적군에게 회복 불능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다. 빠른 속도로 뒤에서 쫓아가 헤집고 치는 것이므로 적군은 숨을 돌릴 여유가 없다. 기병이 빠르게 압박할수록 적군의 대형은 더 심하게 흩어진다.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군대일수록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달아나다가 대량살상을 당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을 보유했던 나라로서 군인들의 무장에 있어서 백제나 신라보다 앞서고 병력이나 전술운영 능력에서 우위를 보였기에 예성강·한강 유역에 오직 공격만을 예상한 소규모 보루만을 설치하였다. 반면 백제나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 요새화된 산성과 장성을 많이 쌓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