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군(隨軍)에게 지옥으로 변한 요택(遼澤)
한왕(漢王) 양량(楊諒)의 군대가 임유관(臨渝關)을 돌파해 대릉하(大凌河) 하류에 당도했을 무렵, 유성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구려가 유성을 손쉽게 장악한 것은 이번 전쟁의 양상을 바꿀만한 큰 사건이었다. 수국(隨國)은 유성을 고구려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고 군량과 장비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유성이 떨어졌으니 수국은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양량은 급히 행군을 멈추고 장수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했다.
“불과 며칠 만에 유성이 함락되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아무리 고구려군의 전력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위충이 많은 군사로 성을 지켰는데 어찌 그리도 쉽게 패배할 수 있단 말이오?”
전쟁에서의 경험이 부족한 양량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분명 저들의 계책에 빠져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성을 넘겼을 겁니다. 제가 듣기로는 고구려의 병마원수가 지략이 뛰어나다 하더이다. 아마도 그가 내놓은 계책이 아닐까 합니다.”
부원수 왕세적(王世績)의 조카인 중군장 왕식충(王息忠)이 아는 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그는 양량에게 수족과 같은 인물이었다.
왕세적이 고개를 저으며 양량에게 말한다.
“이번에 영주부를 함락시킨 고구려 장수는 연자유라 합니다. 그는 지난번 고구려의 국왕이 몸소 영주성을 쳤을 때,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소장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 자가 지난날 영주성이 혼란한 틈을 타서 미리 손을 써 둔 듯합니다.”
“그 자가 강이식 못지 않게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자유는 용맹스러운 장수이기는 하지만 성미가 급하여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섭니다. 이번 영주의 패배는 그 자가 의외의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전장(戰場)에서의 오랜 경험이 그를 노련(老鍊)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사람의 성품이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의 약점을 이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왕세적의 머릿속에는 이미 연자유를 잡을 방책이 들어 있었다. 곰이 백 년을 묵는다고 해서 여우가 될 수는 없었다. 이제 함정을 파고 적당한 미끼를 던진 후에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번 일을 부원수에게 맡기기로 하겠소. 꼭 유성을 탈환하기를 바라겠소.”
양량은 연자유와 같은 하찮은 장수는 왕세적에게 맡기고 자신은 고구려의 영토 안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요택은 요하 하구의 낮은 땅으로 강물이 범람하며 만들어진 습지였다. 요택의 땅은 대부분 진흙이나 늪지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 지역을 오가던 사람들은 수월한 왕래를 위해서 흙과 돌을 이용해 길을 닦았다.
“각 길마다 판석(板石)을 깔아 정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유실될 경우를 대비해서 아군만 알 수 있는 표식을 해두었습니다. 여기 지도에 상세히 표시해 두었으니 길이 진흙에 묻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강이식은 부하 장수인 말객(末客) 고이중(高利重)의 보고를 들으며 지장도(地場圖)를 살펴보았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면 이 땅은 제단으로 변하여 무수히 많은 수병(隨兵)의 피를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저들은 분명 이 요택을 통과할 것이지만 내가 미리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낙수계곡(落水溪谷)이 그의 무덤이 되리라.”
강이식이 말하는 낙수계곡은 개모성 부근에 있는 계곡으로 특히 폭포의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대는 이 길로 태제(太弟) 전하(殿下)에게 달려가 내 말을 전해라. 내가 어제 천문(天文)을 보니, 남두육성(南頭六星)의 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는 필시 용왕(龍王)의 진노가 일어날 조짐이다. 그러니 전선(戰船)들을 단속하여 바다로 나가는 일을 금해야 할 것이다. 말을 전한 후에는 그 곳에 머물며 전하를 돕도록 하라.”
용왕의 진노라 하면 엄청난 태풍을 뜻하는 것이었다. 강이식의 지시를 받은 고이중은 재빨리 준마(駿馬)에 올라 패수구 쪽으로 달려갔다. 강이식은 자신이 치밀하게 짜놓은 전략을 다시 상기하면서 건안성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언덕에 올라 유성(柳城)을 바라보던 수장(隨將) 왕세적(王世績)은 성벽을 지키고 있는 고구려 군사들의 절도 있는 모습에서 군기가 정연함을 알 수 있었고, 공성전(攻城戰)을 펼쳐 성을 탈환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고구려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는 것뿐이었다.
왕세적이 거느린 5만의 수군(隨軍)은 유성을 향해 쇄도(殺到)하여 고구려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천자(天子)의 군대가 왔으니 적장 연자유(淵子遊)는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그리하면 지난날의 죄과를 묻지 않겠다.”
연자유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의 됨됨이로 볼 때 항복을 권유하는 말은 모욕과 다르지 않았다.
“웃기고들 있구나. 하늘의 아드님이 세우신 나라는 오직 우리 고구려뿐이다. 천제(天帝)께서 하늘의 아들[天子]을 사칭하는 너희들에게 천군(天軍)을 보내 징벌하실 것이다.”
연자유는 부하들을 시켜 대거리를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왕세적은 욕 잘 하는 병사들을 뽑아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게 하여 충동질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심한 욕을 해도 연자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세적은 단순히 연자유의 성질을 자극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을 공격하면서 고구려군의 허실을 탐색하기로 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일만 명씩 대를 나누어 번갈아 가며 유성을 공격했다. 공격하는 쪽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수군의 공격은 고구려군의 기운을 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수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왕세적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다 보면 고구려군의 피곤이 쌓여 갈 것이고 연자유의 참을성도 한계를 드러낼 것이었다.
한편, 왕세적이 연자유가 점령한 유성을 공략하는 사이 한왕 양량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한왕 양량은 왕세적에게 유성 탈환의 임무를 맡기고 일언반구(一言半句) 상의도 없이 나머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로 향했다. 왕세적은 양량과 헤어지면서 요택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알렸지만 양량은 자신이 전쟁을 주도하여 공훈을 세우고 싶다는 욕심에 왕세적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요택으로 향했던 양량은 금방이라도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욕심은 종종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양량은 욕심이 앞선 나머지 장마철에 요택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요택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습기가 찬 바람이 불더니 마침내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지 않고 하루종일 내리니 눈앞에 보이던 길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늪이 점점 입을 크게 벌려 주위를 삼켰고, 사방은 점차 거대한 진흙의 바다로 변해갔다. 수나라 군사들은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마치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풍랑을 만나 돛과 닻을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 같은 신세였다. 많은 비로 인해 불어난 요하가 범람하면서 요택의 수위가 점차 높아졌다. 군량미를 실은 수레는 진흙탕에 빠져 꼼짝하지 못했고, 지대가 낮은 곳에서는 이미 수나라 군사들의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양량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양량은 오랜 시간 차가운 비를 맞으며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져 들어가는 진창길을 헤쳐 오느라 지친 군사들을 독려하여 진군(進軍)을 거듭했다. 기진맥진한 군사들이 하나둘씩 쓰려져 갔다. 길이 없어져서 군량미를 실은 수레는 더 이상 군사들의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보급은 끊겼고 군사들이 소지한 군량미조차 바닥을 드러냈다.
배고픔과 무리한 행군, 그리고 청결을 유지할 수 없는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군사들 사이에 전**이 돌았다. 병마(病魔)는 마치 매복하고 있던 적군처럼 삽시간에 수군을 덮쳤다. 보급이 끊긴 상황이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택에 갇힌지도 열흥이 지나자 군사들은 물론이고 양량조차 버틸 힘이 없었다. 이러다간 고구려 군사들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전멸할 지도 몰랐다.
양량은 왕식충을 불러 의논했다.
“아무래도 군대를 철수하고 훗날을 기약해야겠네. 이런 식으로는 고구려군과 싸워 보기도 전에 군사들을 모두 잃겠어.”
그러나 왕식충은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를 모르는 우직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제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군사들을 모아 길을 열고, 요하를 건너 교두보를 만들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머무르시다가 저의 연락을 받으면 요하를 건너 오십시오.”
절망에 빠진 양량은 충복의 무모함에라도 기대고 싶었기에 왕식충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미 군사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남은 군사들도 많이 지쳐있었지만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군사 삼만을 뽑아 왕식충에게 맡겼다.
“내 오직 그대만을 믿겠다.”
왕식충이 이끄는 선봉부대는 추위와 배고픔을 무릅쓰고 비가 쏟아지는 지옥 같은 진흙길을 지나 요하에 다다랐다. 많은 비로 인해 불어난 강물은 거칠게 강변을 집어삼키고 있었으며, 결코 도강(渡江)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이를 바라보는 군사들의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의지로 굳게 뭉쳐진 왕식충은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쓰디쓴 고통조차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왕식충은 군사들을 다독여 주변에서 나무를 구해오게 해서 뗏목을 만들고 빗방울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강물 위에 뗏목을 띄웠다. 급한 물살을 이기지 못한 뗏목들이 하나둘씩 뒤집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군사들이 강물에 쓸려 내려갔다. 그러나 왕식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물에 빠진 군사들이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 외쳤지만 누구도 구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물살이었다.
왕식충의 군대는 많은 대가를 치른 뒤에야 간신히 요하를 건널 수 있었다. 군사들은 전우를 잃은 슬픔보다 살아남은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에 한동안 온몸을 떨어야 했다. 왕식충은 군사들을 추슬러 진군을 했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고생도 언젠가는 그 끝을 보이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하늘은 수군(隨軍)을 돕지 않는지 그쳤던 비가 다시 세상을 메울 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왕세적의 군사들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요하를 건넜지만 수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그들을 그대로 놓아 둘 리 없었다.
대모달(大模達) 이중손(李重孫)이 이끄는 요동성의 고구려군이 왕식충 휘하의 수군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폭우 속에서 피로감과 더불어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던 수군은 자신들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한 건지도 모른 채 행군을 계속하다가 느닷없이 화살 세례를 받았다. 바람처럼 달려든 고구려 군사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수군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일제히 궁시(弓矢)를 당겨 집중사격을 전개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화살에 맞아 진흙탕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다. 왕세적은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는 부하들을 보며 이번 원정에 참가한 자신의 선택을 저주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선명하게 들리더니 왕세적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어서 고구려 군사들의 요란한 함성소리가 들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