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이 밝았다. 뭐 볼만한 드라마 어디 없을까?
말도 안 되는 러브라인으로 여심을 흔들거나, 그냥 봐도 예쁜 여자 배우를 공주로 만들어 대한민국 여자 모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만들게 하는 그런 드라마 말고.
선덕여왕과 자이언트의 막방을 보면서 나는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조필연과 미실을 떠나보냈다. 아, 다시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인가. 권력에 대한 거침없고 가식 없는 그들의 소름끼치도록 솔직한 욕망을 시청하는 내내 나는 그들이 가엽기도 했고, 멋지기도 했으며, 슬프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과 정의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려놓았다. 과감하다랄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권력 속엔 ‘정상에 대한 욕구’ 이외의 불순물은 단 1%도 섞이지 않았을 테니까. 두 드라마 속에 선과 악은 없었다. 옮고 그름도 의미가 없었다. 때로는 반발심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대적할 만한 논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 자이언트의 조필연이 남긴 명대사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선거 중 표차가 심해지자 음모와 계약으로 표차를 뒤집고 병원에 누워 조필연이 아들 조민우에게 하던 대사..)
“나는 정의 따위는 안 믿어. 정의는 인생의 패배자들이 들어놓는 보험 같은 거지...적어도 인생의 패배자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을 테니까..정의 보다 중요한 건 바로 승리다 아들아!”
조필연의 눈빛에 감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억울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한번 쯤 해보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 못 한 말이었다.
가슴 속에 뭔가 맺힌 무언가를 훅, 하고 들쑤시던 말이었다.
정의와 도덕이라는 무거움에 얽매여 착하게 살아야하는 누군가를 향한 따끔한 충고였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권력에 도덕과 정의는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말했다. 권력 속에는 거대한 힘의 이동만이 있을 뿐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사는 오늘도 어쩌면 과거 대중들에게 ‘악인’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어느 리더의 찬란한 유산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과연...도덕과 정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규범과 논리는 권력 속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최근 <권력전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규범적 논리나 도덕적 잣대 등을 쏙 빼고 인간의 권력욕 자체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국 역사 속의 인물들의 권력사를 에피소드처럼 풀어내 소설처럼 술술 읽혔다. 무엇보다 몇 천 년 전 이들의 정치다툼이 지금의 정치 현상과도 오버랩되어 자뭇 씁쓸하기까지 하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물이야 불이야 가리지 않고 ‘올인’해주시는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며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부둥켜안으시는 더 거친 국회의 모습은 얼마나 우리의 삶을 가슴 뛰게 하는가.
“권력은 서로 다른 성질의 사람들도 구성된 집단에서 폭력적인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로부터 권력은 태생적으로 음모와 공생관계를 맺으며 도덕을 깨뜨리는 사악한 힘으로 간주됐다.
...중략
전쟁에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력이 동원되듯이 권력을 둘러싼 음모에도 온갖 지략이 가득 차 있다. 권력 혹은 권력을 둘러싼 음모를 단순히 ‘죄악’으로 규정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류가 필요로 하는 사회와 질서 유지, 공공의 목표 달성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다.”
- 권력전쟁 서문 중에서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묻고 싶다. 권력 속에서 정의와 도덕은 대체 무엇일까? 규범과 원리는 무엇일까? 권력 속에서 그것들의 실현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온 가족이 모인 따뜻한 저녁 식사 시간 라디오, 뉴스 속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보다 웃기고 시트콤 보다 기막힌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 속의 권력은 너무나 맵고 단호하다. 그럼에도 뛰어들었다면 제대로 ‘한판’ 붙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