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침 햇살이 좁은 나의 창을 관통하면 내 허름한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은 눈부시게 젖어있다.
"뚝, 뚝, 뚝, 뚝......"
멈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리는 것은 더더욱 아닌 빗물이 땅에 닿이면 자신의 주위에 보호막을 형성한다.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막으려는 것일까. 세상이 정해 놓은 값어치에 따라 오늘도 그들은 공장을 가동시킨다. 어떤 이는 자기 몸 두 배의 보호막을 형성하고, 어떤 이는 자기를 겨우 가릴 만큼 작은 보호막을 형성한다. 각자 서로 다른 보호막이지만, 공통된 점은 그 보호막은 금방 만들었다가도 금방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요즘들어 나도 보호막을 형성할 때가 더러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얼마일까. 얼마를 지불해야 내 몸에 배가 되는 보호막을 나도 설치할 수 있을까.
내 눈물은 언제쯤이면 마르려나. 지금도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 승재야, 어디야?"
"목사님, 제가 생각이 많아서요. 제가 너무 부족해서요. 도저히 교회에 못 들어가겠어요."
"승재야, 네 생각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와라."
"목사님, 제가 늦은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운전면허 시험장까지 거리도 멀고 집에서 다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승재야, 혼자 있으면 안 좋아. 일단 교회에 들어와라. 교회에 들어와서 운전면허도 따고 교제도 하고 같이 직장도 구해보자."
"...목사님... 죄송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전화 수화기를 놓고 내 눈에는 뜨거운 액체가 솟아 흐른다. 어제도 흘렸던 눈물인데, 일정한 기간도 없이 정해 놓은 주기도 없이 미련한 나의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렇게 눈물은 연약한 나임을 확인시켜준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눌 때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정액 속에 삼억 마리의 정자가 있다고 들었다. 여자 몸에서 나오는 난자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삼억 마리의 정자가 경주를 하는 것이다. 삼억 분의 일. 대단한 경쟁률이다. 삼억 마리 중에서 난자를 만나는 것은 단 한 마리 뿐. 나머지 이억 구천 구백 구십 아홉 마리는 경주를 하는 중에 일위를 뺏겨 실의에 빠져 죽는 단다.
아버지와 엄마도 나를 나을 때 분명히 경주를 했을 텐데 지금 나의 모습은 뭔가. 이억 구천 구백 구십 아홉 마리를 제치고 단 한 마리의 정자가 나인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슬프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죽기는 싫은데... 산다는 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디제이들의 웃음처럼 마음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엄마 말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도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게 힘든 것일까.
풍성하게 눈이 내리던 날이었는지, 성난 비가 퍼붓던 날이었는지, 따사로운 난로 불이 그림자를 곤하게 했던 날이었는지. 그 날의 날씨는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날 낯선 종이 한 장이 바람을 타고 나의 발걸음을 더디게 한 기억은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아련한 눈물을 생성한다. 제대로 갖추어 지지도 않은 종이 한 장이 나의 마음을 동요 시키는 건 왜 일까.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동안을 사뿐히 사뿐히 방황 길을 질주하던 나인데,
‘꿈의 학교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인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인데, 두 손에 쥐어져 있는 종이 쪼가리가 놓아지지 않는다. 나를 막다른 길로 내몬 형편은 나의 의지를 장렬하게 짓밟고 종이 속에 담긴 그 호화스러움으로 나를 이끈다. 그렇다고 현실과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씩은 현실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나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 현실과 가상을 동시대에 오갈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더욱 혼란으로 내몰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일개미들인데. 어디서 훔쳐왔는지 입들마다 한가득 먹이를 물고 줄을 지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 일개미 뒤를 쫓아간다.
"야!"
"...나요?"
"뒤에 너 밖에 더 있어?"
"...내 얼굴이 보이니?"
"너 만화책을 많이 봤구나. 젊은 놈이...쯧쯧, 안 됐어.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다 네 부모 탓이지."
이상하다. 아까까지 난 분명 사람이었는데. 일개미들이 하는 얘기가 다 들리네. 내가 개미였던가. 도대체 난 누구야?
"야!"
"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너 바보냐?"
"뭐?"
"네 눈에는 줄지어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들이 안 보여?"
"......"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지는데, 겨울에는 뭐 먹고 살래? 굶을까? 식량 창고에 저장해 둬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일개미들을 따라서 땅 아래로 들어간다. 따라오긴 따라왔는데,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전부터 개미였다면 일이 몸에 배여 있을 텐데,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기억 상실증인가? 개미도 기억 상실증에 걸리나? 잃어버린 기억을 된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두리번 하는데, 내 귀에 이어폰처럼, 내 눈에 다큐멘터리처럼 그들의 생활이 엿보여진다.
그들은 내가 안 보이나 보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귀에 들리는 음성을 좇아 눈에 보이는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여기는 학생 개미들이 합숙을 하면서 공부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어떤 학생 개미는 땅 속에서 살다가 왔고, 어떤 학생 개미는 썩은 나무숲에서 살다가 왔고, 어떤 학생 개미는 썩은 두엄에서 살다가 왔고, 어떤 학생 개미는 인간의 집이나 마당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마흔 여섯 마리의 학생 개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다르고, 성격이나 취향도 다르지만 이제부터는 이 학교 속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같노우 클루 왙 아이슈드두
아일 고우 크레이지 잎 아이 캔 겥 넥스투유
마이 티철 세즈 투 칸쏀트레이트
소우 왙왓 히즈 네임 위즈 피덜 더 그레잍
더 킹즈 앤 퀸즈 윌 해브 투 웨잍
커즈 아이 돈 해브 폴애벌
아이 위시 댙 야야야.. 아이쿠드 워크 라이업 투유
이치타임아이 츄라이야.. 더 세임 올드 혜지테이션"
"얘들아, 일어나! 여섯시 십분 전이다!"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선생 개미들은 자신의 색깔대로 학생 개미를 깨웁니다. 어떤 선생 개미는 몽둥이를 가져다니며 깨우고, 어떤 선생 개미는 창문을 열어서 밖의 찬 공기를 밤새 달궈져있던 숙소 방으로 침입을 부추겨서 학생 개미들을 깨웁니다.
"선생님, 창문 좀 닫아 주세요. 추워서 일어나기 더 싫어요."
"빨리 일어나 올라가면 되잖아!"
"오늘은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에 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왜 야곱은 복을 입고 에서는 저주를 받는 지 말이죠."
지금은 이 학생들에게 말씀은 지루하고 한낱 자장가로만 들릴 테지만, 저는 이 학생들이 바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뤄지니까요. 처음에는 안 될 것 같지만 끝에는 꼭 이뤄집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킵니다.
학생 개미들과 선생 개미들은 목사 개미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나서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고, 정해 놓은 시간표에 따라 마흔 여섯 마리의 학생 개미들이 오늘도 분주하게 교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특강을 듣도록 하겠어요. 특강 주제는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노랑 망토 인형은 우리의 적인가 동지인가'입니다. 특강을 해주실 분은 썩은 나무 제국에서 여왕개미님을 바로 옆에서 호위하시는 호위대장 수개미님이 십니다. 다들 찌글로써 환영해 주세요."
"찌글 찌글 찌글 찌글......"
"감사합니다. 저는 방금 전에 소개 받았듯이 썩은 나무 제국의 여왕개미님을 호위하는 호위대장 수개미입니다."
하루 종일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학생 개미들은 호위대장의 바깥 세상 얘기에 숨을 죽이고 듣는다.
"노랑 망토 인형의 특징은 꼭대기에 UFO로 추정되는 돔형 모양의 접시가 붙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제국 박사 개미들의 추정에 의하면 그 UFO에 우리와 같은 형체를 가진 외계 개미들이 노랑 망토 인형을 조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노랑 망토 인형들이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우유 수영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랑 망토 인형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우유 수영장을 건설하는데, 우리 개미들이 그 수영장을 점령해도 관심을 갖는 노랑 망토 인형이 있는 반면 관심이 없는 노랑 망토 인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 개미들은 호위대장의 말이 딴 나라 얘기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앞으로 더 조사와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에 의하면 노랑 망토 인형은 우리의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닙니다. 어떤 노랑 망토 인형은 순한 반면 어떤 노랑 망토 인형은 성질이 사나우니까요. 여러분들도 각자의 성격이 있듯이 노랑 망토 인형도 그렇다고 보여 집니다. 재미없는 얘기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찌글 찌글 찌글 찌글......"
어느새 5개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학생 개미들과 선생 개미들 간에 어느 정도 가족이 형성 된 듯이 보여 집니다.
"선생님, 뭐 하세요?"
"자율학습이 맨 마지막에 마치니까 청소를 해야지. 너희가 안 하니까 나라도 청소를 해야지."
"선생님, 도와드릴까요?"
"......"
선생 개미는 미소는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허락할 수 없는 아름다운 눈길로 학생 개미를 바라본다.
"민정아, 넌 학교 졸업하면 뭘 할 거야?"
"미용사 할 거예요. 저 머리 만지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 그럼, 선생님 머리도 좀 만져줄래?"
"...예?"
"왜, 자신이 없어?"
"아니예요. 선생님이 저의 첫 손님이 되어주시는 거예요?"
"첫 손님이라ㅡ 멋진데."
"선생님, 고마워요. 나의 첫 손님이 되어주셔서."
"선생님, 저 오늘 나갈 거예요."
며칠 전에도 학생들이 학교를 이탈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ㅡ더구나 사랑하는 민정이가 한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다.
"거짓말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마! 민정이 너 자꾸 그런 소리하면 맴매 때려 줄 거야."
진실일까. 거짓일까. 아침 청소 시간에 민정이가 내게 스치듯 한 말이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되뇌어진다. 어떻게 해야 민정이의 기분을 풀어 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민정이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수 있을까? 민정이를 향한 나의 관심이 여느 사제지간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난 민정이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도 깊은 여운이 남는데... 사랑일까. 사랑일까. 민정이를 향해 불쑥불쑥 기지개를 켜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짓누를 수 있을까? 이번이 기회인 것 같다. 민정이를 향한 나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ㅡ금테를 두른 듯 나의 못난 얼굴이 비치는 서랍을 열고, 나는 편지지 한 장을 꺼낸다. 민정이에게 편지를 부쳐야겠다. 그런데 자꾸 민정이를 향한 바보 같은 나의 눈물이 편지지에 적혀지는 건 왜 일까. 버리고 다시 쓰고, 버리고 다시 쓰고, 몇 번을 다시 해도 나의 눈물은 글귀 하나하나에 묻어난다.
널 사랑 했었어 한동안
니가 그리웠었어 한동안
널 잊을 거라 다짐했어 한동안
너 없이도 살았었지 한동안
민정아, 네가 자꾸 힘들어 하니까 선생님도 힘들다!
내일부터 힘내하자. 알았지? 화이팅!
짙은 어둠이 창 밖에 찾아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나는 편지를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다들 불이 꺼진 학교 안에 나만 깨어 있고, 다 적은 편지를 가지고 나는 민정이 캐비닛을 열어 민정이의 기분이 밝아지기를 바라며 넣어둔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부터 학교 안이 술렁인다.
"무슨 일이예요?"
"간밤에 여학생 두 명이 학교 밖으로 나갔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혹시, 설마,
"그, 여학생 이름이 뭐예요?"
"희연이 하고 민정이래."
내 몸은 '얼음 땡' 놀이를 하고 있나 보다. 한 번 얼음이 된 몸은 좀처럼 풀려지지 않는 걸 봐서는... 나를 얼음에서 풀어 줄 민정아, 창 밖에는 세차게 비도 내리는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닌지.... 밥은 굶지 않고 제때 챙겨 먹고는 있는지...
희연이와 민정이가 학교를 나간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 날도 예전과 같이 학생들을 깨우고 말씀을 듣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고 남선생 휴게실에서 밤새 채우지 못한 잠을 청하는데, 내 고장 난 귀에 들려오는 개이은 음성,
"희연이와 민정이가 제 발로 돌아왔대."
나는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벽에 귀를 댄다.
"뭐 하는 거야?"
남자 선생 한 명이 휴게실 문을 열고 나의 괴상한 행동을 보고 말을 건넨다.
"아...아무것도 아니야...운동하고 있었어. 어제 집에서 티비를 보니까 이렇게 운동을 하더라구..."
남자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 옆을 스쳐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거제에서 우리 학생들을 초대하고 공연 행사가 있는 날이다. 나는 장비들을 챙기고 선발대로 먼저 도착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민정이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학생들은 다 온 거 같은데. 나의 숨 가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그 것도 그럴 것이 이틀 전 희연이와 민정이가 돌아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눈으로 희연이와 민정이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모든 행사가 마치고, 나는 가져온 장비들을 챙기고, 곧 바로 학생들을 실은 버스를 쫓아 식당으로 갔다. 고기 뷔페 집에 도착하니 학생들은 이미 각 테이블마다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굽고 있다. 한 테이블에 여섯 명씩 앉아서 급하게 굽느라고 불을 최대로 올려서 그런지 고기에서 나는 연기에 콜록 이면서도 학생들은 오랜만에 나온 세상 나들이에 즐거워들 한다. 그런데 여전히 민정이가 보이지 않는다. 고기를 가지러 갔을까? 화장실에 갔을까? 바람 쐬러 밖에 나갔을까?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두리번 거린 거 같다. 고기를 접시에 담고 있는 사람들의 틈 사이를 오가기도 하고 여자 화장실 앞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도대체 민정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한동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걸음을 옮겨 다녔는데,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벨이 울린다. 일주일에 두 번도 울리지 않던 핸드폰이 웬 일이지? 산지는 꽤 되었지만 나의 지문보다 친구들의 지문이 많이 묻어나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오래된 친구 이름이 뜬다. 무슨 일로 준수가 전화를 하지?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 가까이에 대어본다.
"어! 준수야! 네가 웬일로 내게 전화를 다 하냐?"
"흐흐흐, 승재가 자살했대."
"뭐? 장난 하지마! 만우절도 아닌데, 오랜만에 전화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장난이야?"
수화기에서 준수의 눈물이 들린다. 내 나이 스물일곱.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목숨이었다면 왜 아둥바둥 살았을까. 훌쩍이는 준수의 서러운 음성만이 나의 고막을 진동시켜 대뇌에 도달한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절규를 할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뭐라고 단정은 내릴 수 없지만, 영화에서 보면 이런 경우 눈물을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영화와 현실이 다른 것 같다. 현실에서는 이런 게 아닌데 말이다. 승재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젊은 나이에 왜 죽어? 죽을 용기가 있으면 어떻게든 살겠다.
깊은 승재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준수 말로는 며칠 전부터 채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단다. 한 번도 남 앞에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승재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탈출하다니, 승재가 채팅에서 한 말들이 진심이었다니,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이게 인생의 마지막인가. 아ㅡ! 오늘따라 승재가 보고 싶다.
사실 승재와 나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다. 가끔 준수가 부른 술자리에 나가면 승재를 만날 수 있었다.
"승재야, 이제 전역했냐?"
"내가 네 아들 군번이잖아."
"이제 전역도 하고 뭐할래? 너 대학 졸업하고 군대 들어갔지?"
"응."
"...뭐 그리 고민해?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밤은 마시자. 마시고 죽은 귀신은 땟깔도 좋다 잖아."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가 아니고? 하하하!"
"그런가? 어디서 많이 들던 말 같더라. 하하하!"
"승재야, 요즘 너 뭐하니?"
"에어컨 만드는 공장에 다니긴 하는데..."
승재는 연거푸 술잔만 비울 뿐 아무런 말이 없다. 일이 많이 힘든가 보다. 승재의 얼굴이 그 걸 증명이라도 하듯 검게 그늘이 져있다.
"승재는?"
"일 하느라고 몸이 많이 피곤하대. 우리끼리 마시자."
"승재는 요즘 뭐해?"
"전번에 하던 일 그만두고, 부모님 몰래 피씨방 다닌대. 부모님한테는 일 다닌다고 속이고 하루 종일 피씨방에서 스타그래프트 한대."
"승재 좀 데리고 나오지?"
"데리고 나오려고 불렀는데, 나오기 싫대. 피곤하대."
이게 내가 들은 승재의 마지막 소식이다. 가족한테 내색 한 번 안하고. 이렇게 지만 떠나면 멋진 줄 알았나 보지. 바보 같은 놈!
승재의 하루 장사를 치루고 나는 집에 들러 늦은 저녁밥을 먹고 전기장판에 몸을 누이어 이른 잠을 청해 본다.
"당장 교회에서 나와! 네가 거기서 눈칫밥 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내가 교회에 있어야 할 이유는 희미하긴 하지만, 남들이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있다.
"운전면허도 집에서 따고, 엄마가 돈 줄 테니까."
내가 이때껏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게 여러 게 있겠지만, 그 중에서 나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운전 면허증이다. 지금도 내겐 그리 늦은 건 아니지만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짓누른다.
희미하게나마 내가 교회에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현실에 부딪혀서 깨어지고, 나는 나의 형편만을 생각하게 된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를 먹을 때까지 운전 면허증 하나 따지 못한 나만을ㅡ
나는 교회를 나올 것을 마음에 정하고 학교에서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내 아씨들아, 요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머니는 네가 왜 눈치 밥을 먹냐고 당장 나오라고 하고, 전도사님은 운전 면허증 따는 데만 치중하지 말고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하고, 일자리를 찾으려니까 어머니가 운전 면허증을 따고 나서 일자리를 구하라고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너희들이 알다시피 내가 나이만 먹었지 생각이 피터팬이잖아. 어린 그대로 남아있는... 학교를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내 아씨들아, 공부 열심히 하고,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목사님, 저 교회에서 나가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별 하는 것도 없고, 목사님 말씀대로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있는 것도 시간 낭비 같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담임 목사님한테는 학교 일 그만둔다고 얘기 했나?"
"아직 연락 안 드렸습니다."
"너를 여기로 추천해 주신 목사님한테 먼저 연락 드렸어야지? 그게 먼저인거 같은데?"
"목사님, 저예요."
"어! 승재야, 잘 지내고 있어?"
"목사님, 저 여기 일 그만두려고요. 여기서 별 하는 일도 없고 해서요. 엄마가 교회에만 있는 다고 많이 걱정 하셔서요."
"...여기 교회로 와라. 거기서 짐 싸고 집에 들리지 말고 바로 교회로 와라."
"알겠습니다. 목사님, 나중에 교회에서 찾아뵙겠습니다."
목사님한테 그렇게는 말했지만, 나는 목사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나의 소리를 따라 짐을 싸서 바로 집으로 갔다.
"시험 치고 오는 거야?"
"예."
"또 떨어졌지?"
"이번에는 돌발은 잡았는데, 기어변속 구간에서 과속으로 떨어졌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딸 때까지 계속해."
늙은 아버지가 벌어 주시는 돈으로 밥 먹고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내가 유일하게 밖에 나갈 때가 운전면허 시험 보러 갈 때이다.
"네 아버지가 몇 살이냐, 네가 빨리 직장을 잡아야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의료 보험증도 네 이름으로 바꿀 텐데."
집에서 나의 생활은 운전 면허증을 따는 것으로 반복되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 액정 화면에는 부재 전화로 목사님의 성함이 자주 뜨고, 나는 그 관심을 무시하고, 이러는 내가 싫지만, 이게 나의 인생인 듯 나를 이끌어간다.
교회를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학생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도 나의 전할 수 없는 마음은 일기장을 가득 메우고, 아련하게나마 떠오르는 기억에 웃어도 본다.
사랑하는 내 아씨들아 어느새 날 잊었니?
값진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서
오늘도 한숨만 채워낸다오.
몸뚱이는 서글픈 아씨들을 잊은 듯
일상을 걷고 있지만,
기억은 엄마를 잃은 갓난아이처럼
엉엉 울며 아씨들의 이름을 부른다오.
"승재씨, 뭘 그렇게 보세요?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서른을 갓 넘은 듯 보이는 사나이가 환자복을 입고, 창살 곁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뚝, 뚝, 뚝, 뚝......"
창 밖에는 멈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리는 것은 더더욱 아닌 빗물이 땅에 닿이면 자신의 주위에 보호막을 형성한다.
"아빠!"
승재를 찾아온 어린 사내아이가 승재를 보자마자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승재에게로 뛰어간다.
승재 옆에 서 있는 담당 간호사가 놀란 표정으로 사내아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말을 건넨다.
"이 아저씨가 네 아빠야?"
사내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야?"
"준수, 이준수."
옅은 어둠을 지나고 하이힐을 신고 토닥토닥 젊은 여인이 걸어 나온다. 이십대의 앳된 얼굴을 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여인이 복도에서 걸어 나온다.
"엄마, 울어? 울지마."
사내아이가 담당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 여인에게로 달려간다.
"엄마, 울지마."
사내아이가 여인의 옷을 잡아당기며 연거푸 울지마ㅡ복도가 울릴 만큼 서글픈 목소리로 정신병원의 침묵을 깨운다.
"이승재씨 아내 분되시나요?"
"예."
담당 간호사가 승재씨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말한다.
"승재씨, 우민정씨가 왔어요. 밤새 그렇게 찾고 부르던 우민정씨가 바로 앞에 있어요."
승재가 담당 간호사의 말을 듣고는 있는지 여전히 잠에 취해 창 밖만을 응시한다.
복도가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우민정씨의 눈물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담당 간호사가 민정을 안고서 슬픔을 어루만져 준다.
"김간호사, 오늘도 밤 샐 거야? 보고서도 좋지만 쉬면서 해야지. 그러다가 몸이 나마나질 않겠어."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럼, 수고해. 나 먼저 갈게. 내일 봐."
"들어가세요."
승재 담당 간호사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대학교 교수가 졸업 논문 대신에 제출하라고 한 보고서를 사나운 어둠이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면서 혼자서 시체와 날을 새려한다.
"똑똑, 똑똑"
"네, 들어오세요."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여닫이문이 열리고 민정이와 승재가 실습실 안으로 들어선다.
"놀랬지?"
"난 또 누구라고? 준수는 안 데리고 왔어?"
"피곤하다고 해서 우리끼리 왔어. 왜, 사랑하는 낭군님이 아니라서 실망했냐?"
"솔직히 말해서 좀 그렀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장난, 장난이야."
희연, 민정, 승재, 준수는 같은 대학교 동기다. 민정과 승재는 교내에서 다 알고 있는 닭살 커플이고, 희연과 준수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아직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숙맥이다.
"희연이 넌 무섭지도 않아? 이 늦은 밤에 혼자서, 그것도 시체랑..."
"둘이서 놀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혹시나 하고 올라왔더니, 너! 우리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요즘 교내에서 강간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민정아, 승재야, 너희가 이렇게 날 걱정해 주는 줄 몰랐어."
"그걸 이제 알았어? 우리가 아니면 누가 네 생각해 주냐? 하하하!"
"근데 희연아,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간호과 교수가 졸업 논문 대신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해서 적고 있던 중이야."
"눈물 소비 사례?"
"보지마! 다 적고 보여 줄게."
"너 또, 이렇게 적으면 바로 들통 날걸?"
"왜 나만 안 돼? 다들 대충 적고 졸업하는데."
"그렇다고 없는 얘길 지어내냐?"
"다들 이렇게 적어 내잖아. 교수들이 다 알걸? 학생들이 제출하는 논문이나 보고서가 가라라는 거 알면서 속아 주는 거야. 속이고 속고, 알면서 속아 주고, 그게 세상 아니겠냐?"
"너 계속 고집 피우면 준수한테 이른다?"
"민정이 네가 이러면 안 될 텐데..."
"...뭐?"
"옆에 승재도 있는데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민정이와 희연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재가 물음을 던진다.
"뭔데?"
민정이의 얼굴은 금세 새빨개지고, 급하게 희연이의 입을 손으로 막는다.
"아무 것도 아니야. 민정이가 준수한테 들킬까봐 수쓰는 거야. 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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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