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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어느날갑자기 (1-1)

에효;; |2011.03.07 14:04
조회 1,421 |추천 1

어느날 갑자기1권
저자 유일한
출판일 2000.8.28
제작/판매 (주)와이즈북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사람을 보내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잡아야 하는 것일까?
사랑의 딜레마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샤워를 했다. 간밤에 과음한 때문인지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곳을 가야 했다.


아침도 먹지 않은 채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천안행 티켓을 끊고서 자판기에서 커
피를 한 잔 뽑아서 창가로 갔다.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고 있었다.
죽은 이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하지.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그녀
의 얼글을 지우고 차에 돌랐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나는 차 창에 머리를기댄 채 스쳐가는 10월의 경치들을 무심히 바
라보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심하게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속도로는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시원하게뚫려 있었다.

쓸쓸한 가을을 하늘하늘거리며떠받치고 있는 코스모스가 물끄러미 나를 쳐
다봤다.


천안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공원 주차장까지는 택시로 올라갈 수 있었
지만 나는 입구에서 내렸다. 석재상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서
울에서 그리 멀리 않은 거리였지만 은영은 너무도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걸어가다 보니 왼편으로 꽃집이 보였다.

 

문득, 꽃을 사오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늘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사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은영에게 할 말을 생각하느라고 깜빡 잊고 있었다.
꽃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무표정하게 맞았다.

나는 은영이 좋아했던 흰장미를 스물세 송
이 샀다.


양편으로 붉은 기둥만 두 개 서 있는 공원묘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영이 누워 있는
곳은 주차장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산비탈 아래로 수많은 무덤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오래 된 무덤,
만든 지 얼마 안 된 무덤, 가난한 무덤, 부유한무덤, 기독교식 무덤, 불교식 무덤 들이 하늘
아래 낮게 엎드려 있었다.

 

 나는 은영이 살고있는 산의 윗부분으로 올라갔다.
은영의 묘지 앞에는 예쁜 조화가 한 다발 꽂혀 있었다. 은영의 어머니가 꽂아 놓은 모양이
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영의 묘지를 바라보았다.

봉분의 파란 잔디가 금잔디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사이에 다시 3 개
월이 흐른 것을 깨달았다. 은영은 땅에 묻힌지 정확히 3년하고 3개월이 흐른 것이었다.
가져 온 하얀 장미를 은영에게 내밀었다.

 

은영은 손을 내밀어 받지 않았다. 나는 봉분 앞에 세워 두었다. 하얀 장미를 받고 좋아 할 은
영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니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죽은 뒤에 완전히 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었는데 .

나는 그녀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짐짓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언제 몰려 왔는지 검은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기세였다.


가을비는 차가울 텐데. 그렇지 않다도 몸이약한 은영인데.
구름을 한동안 올려다보며 멍히 서 있었다.
문득, 은영을 찾아온 목적이 떠올랐다.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은영은 뭐라고 그럴까? 나를 꾸짖을까?


나는 다시 은영이 누워 있는 자리를 보았다.
평온히 누워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그녀 앞에 태
연한 척 서 있었다.
그냥 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은영은 이해할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
라도 그녀에게 먼저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무심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던, 아니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무척 싫어하던 은영의 찡그린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콧잔등에 잡힌 주름살까지 선명하
게 보였다.


은영아, 미안해, 깜빡 했어.
나는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배곽에 넣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말을해야지만 속이 후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은영을 내려다보다가 그녀 앞에 무릎을꿇었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은영아.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어.

 

너와 함께 할 때는 물론이고 네가 떠나고 나서도 상상도 못 했어.

 난 네가 떠나면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던 사랑도 함께 데리고 갔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걸 원했고. 그런데 우습지.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러찾아오고 말야.

나도 내가 한심해 보여.


어젯밤에 술 마시면서 그 노래만 들었어. 너도 좋아한 노래였잖아.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I dreamed a dream’. 그래, 바로 그노래야.


넌 이 노래 처음 듣고 나서 가사가 너무 슬프다고 했지. 특히도 이 부분이.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사랑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꿈이었을까....
휴우, 이런 말 꺼내기 정말 힘들구나.

 

 어젯밤 술 마실 때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은영아, 나 딴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녀가 하늘에서 후두둑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원 묘지는 순식간에 빗소리에 뒤덮이고 말았다.


성묘하러 왔던 사람들이 빗줄기를 피해 뛰어가는 발자국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난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은영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나는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 애는 너와 닮았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를 본 순간부터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거부도 해 봤지. 하지만 뜻대로 안
되더라고. 그런데 말이지 정말로 웃기는 것은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
냥 내 감정이 그래.


나 우습지? 너와 헤어진 지 3년하고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나도 이런 나 자신이 너무도
싫어. 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입술을 깨물었어.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입
안이 짭짜름했다.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이 보였다. 우산을받쳐 든 은영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은영을 처음 만나던 날도 비가 내렸다.

 

학기말 고사를 보고 있던 때였다. 강의실 앞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는데 아
주 예쁘장한 후배가 우산을 펼치며 아는 체를했다.

은영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만알던 사이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 정도하는. 나는 그날 은영의 우산을 쓰고 교문을 나섰
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린 친해졌다. 난 그날의만남을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은영의
말을 들어 보니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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