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1권
저자 유일한
출판일 2000.8.28
제작/판매 (주)와이즈북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햇살이 침대 난간을막 넘어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지만 20년이 넘게 보아 온햇살의 움직임 같은 것은 보지 않고도 감지할수 있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 이 곳에 자주 오는 김 신부님과 테레사 수녀님, 그리고 낯선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사람은 날렵한 몸매를 지닌 여자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불쑥 허공에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수녀님이 들려 주었던,
내가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천사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이쪽은 사무엘 형제예요. 선천성 뇌성마비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해요.
사무엘 인사해요,
이쪽은 서지영이에요. 대학생인데 여기서 자원 봉사를 하고 싶대요.
앞으로 사무엘님도 보살펴 줄 거예요.”
김 신부님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왔다.
서지영이라는 아가씨가 싱긋 미소를 띄웠다.
마치 혼이 모조리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무엘님, 잘 부탁해요.”
그녀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인사를 하며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순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핏줄기는 혈관 속으로 좌충우돌 뛰어다녔다.
그녀가 옆 침대의 친구에게 인사하기 위해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나는 신열에 들떠서 천장만을 올려다보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지 세상이 온통 아른아른거렸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왔다. 5시간 가량그녀는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우리들을 돌봐줬다.
징징거리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똥오줌도 못 가리는 우리들의 속옷을 더럽다는표정 한번 안 짓고 갈아 주는 등 한시도 쉬지않고 우리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면서 마음한구석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을 때처럼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끔씩 내가 불쌍하고 측은한지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나는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속삭이곤 했다.
울지 말아요, 나의 천사여 . 그대가 곁에 있는 한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오.
그녀는 나의 이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그녀의 변함없는 눈길을 대하면서 나는 차츰차츰 가슴이 매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단 한마디라도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따뜻한 손을잡아볼 수 있다면.나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게 어떤 감정인지알 수 있었다. 사랑은 사막을 걷는 여행자가느끼는 갈증과 복권에 당첨된 순간의 기쁨과소풍을 가기 전날 아이가 느끼는 설레임을 동반하는 거라는 걸.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깊어만 갔다. 언젠가 수녀님이‘이 세상에서 사랑
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없다’고 했지만 내가 느끼는 사랑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것만
은 아니었다. 그것은 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괴로움 덩어리였다.
그녀가 안 오는 날은 세상은 온통 암흑 천지였다. 또한 그녀가 찾아오는 날은 그녀가 모습
을 드러내기까지 순간순간이 살을 베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가고 나면 전신이 그물로 짠 것처럼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만나고부터는 그토록 재미있던 텔레비전도 보기가 싫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의 처지를한없이 원망했다.
나를 낳아 준 부모를 저주했으며 나를 이땅에 보낸 신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괴로웠다.
차라리 입에 넣어 주는 죽이나삼킬 줄 아는 그런 인간이라면 이런 고통은 없을 터인데 .
괴로움을 몸부림을 치다 보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물로
방으로 찾아왔다. 내 가슴속의 증오는 그녀를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고 나는 순한 한 마리짐승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천국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녀의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때 나의 인생은 환희에 넘쳤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질 때 내 인생은 절망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의 모든 것이 되어 갔다. 그
녀가 나의 가슴속에 가득 차면 찰수록 나의 고통은 심해져 갔다.
아, 나는 한송이 꽃보다도 못 하구나. 내가꽃이라면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내 사랑을 전할수 있으련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나는 참담한 절망 속에서 내가 그녀를 위해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궁리해 봤다.
천만다행이도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내가 표현해 낼 수있는 가장 애정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없을 때도 그녀를 생각하며애정어린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곤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그 날도 평상시와 같이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얼굴 한구석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난 그런 그녀가 너무도 안쓰럽게 느껴져, 왜그렇게 우울한지 나에게 말해 보라고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이런 것들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난 뒤로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나의 텔레파시가 그녀에게 전달된 걸까? 내침대 옆에서 꽃병을 정리하던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니 내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해 보세요. 모두.다시 한 번 그녀에게 정신을 집중해서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창 밖을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나에게다가와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사무엘님, 움직일 수는 없다고 해도 제 말은 알아들으실 수 있나요?”
나는 그녀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몸은 안타깝게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무엘님은 참으로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계세요.
주변을 따뜻하게 해 주는. 힘드시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으시니.
사무엘님의 고통에 비하면 내 고통은아무것도 아닌데. 하지만 털어놓고 싶어요. 사무엘님의 눈빛이 모두 말해 보라고 재촉하는것 같아요.”
나는 그 순간만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행복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알아 준 것
이었다. 그녀는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분명히들었다. 내 몸의 전 세포들이‘야호!’하고 외치는 소리를.
“사무엘님은 누구를 사랑해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요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
아요. 짝사랑이지요. 그 사람은 제가 자기를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전 용기가
없어서 다가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답니다.
제 감정을 털어놓고도 싶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질까봐 두려워요.
그 사람에게는 슬픈 추억이 있대요. 그 사람은 아직도 바보처러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답니
다. 그래서 제가 그의 가슴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나 봐요.
휴우.
전 사실 사랑을 처음 해 봐요. 전 그래서 남을 좋아한다는 것이 행복한 일인 줄 알았어요.
그건데 아니더라고요. 언젠가 읽은 책에 이런구절이 있었어요.
‘왜 우리는 항상 서로의 등만 쳐다보고 살게 되는 거죠‘하는.
정말로 그런 것 같아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는 도저히 그에게 내마음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만나도 마음에 없는 말만 꺼내게 되고 헤어지고 나면 몹시 후회해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도해 봤어요. 그래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좋
은 후배로만 대해 주는 거예요. 이렇게 계속가다 가는 그 사람이 제 곁을 떠나고 말 것만
같아요.
휴우 고마워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그래도 사무엘님에게라도 털어 놓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사무엘님,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화병을 들고일어났다. 물을 갈러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정말이지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지영 씨,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있어요.
나의 외침이 한 마디도 표출되지 않는다는것을 깨닫고 나니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눈물조차 흘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니.하루종일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되씹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에게 적개심과 증오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적개심과 증오는 금세질투와 부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